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5화 (25/862)

25화. 거래 (6)

연우의 눈빛이 딱딱하게 가라앉았다.

처음 등지의 입구에서 봤던 플레이어들의 흔적들이 떠올랐다.

거기서 벌어진 납치의 연장선인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잡은 인간들을 여기에 모아 둔 거겠지.

인간들이 가축처럼 갇혀 있는 곳.

가면을 쓰고 있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르간의 둥지는 말 그대로 리자드킹 하르간과 퀸 타라간이 머무는 둥지였다. 게다가 갓 태어난 새끼들도 있기 때문에 녀석들은 독이 잔뜩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따금 배고픈 새끼들의 배를 채워 주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을 사냥하는 경우도 잦았다.

사체들은 전부 하르간의 새끼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서 잔뜩 포식을 한 뒤에 남은 흔적들이었다.

한 마디로 여기 있는 인간 농장은 녀석들이 새끼들이 배가 고플 때면 언제든 내주기 위해 준비해 놓은 먹이 창고라는 뜻.

‘지구나 이곳이나.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건가?’

아프리카에서도 종종 비슷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힘없는 사람들을 묶어다 노예로 부리는 광경들.

아이를 세뇌해 소총을 들게 하거나, 노인들에게 자살 폭탄을 쥐여 주고, 여인들을 성욕 풀이 대상으로 삼는 등, 이보다 더 끔찍한 광경도 많았다.

이것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예가 단순한 가축, 아니, 먹이가 되기만 했을 뿐.

그리고 이런 일을 저지른 당사자가 인간이 아닌 리자드맨이기만 할 뿐이었다.

내용면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리자드맨들에게는 이게 아주 당연한 관습인지도 몰랐다.

‘사람이 소돼지를 취급한 것이나, 이들이 인간을 취급하는 것이나. 다를 게 있을까?’

구해 달라고 소리를 질러 대지만, 그건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가 눈물을 흘리는 것과 똑같았다.

연우는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정리했다.

‘이들을 구출하게 되면 암컷이 가지고 있는 왕관은 가질 수가 없게 된다.’

무엇보다.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스스로 이런 위기를 자초한 것도 있었다.

약육강식이 당연한 상식으로 통하는 탑의 세계에서. 신이 되고자 수행한다는 자들이 스스로의 실력도 자각하지 못하고 헛된 만용을 부린 것이니까.

“암컷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서둘러서 놈을 찾아야 하니 너도 몸부터 숨겨.”

그래서 도일을 불러 돌아서려 하는데.

이상하게 도일이 못 박힌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연우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어 도일을 돌아봤다.

여태 녀석을 이성적이고 감정 조절이 능숙하다고 판단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입구에서 플레이어들이 당한 흔적을 봤을 때 도일이 보였던 표정이 언뜻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꽉 쥔 주먹은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형은…… 화가 나지도 않으세요?”

도일이 주먹을 꽉 쥐었다. 잔뜩 일그러진 눈빛이 연우를 돌아봤다.

“화?”

“예. 화요. 이런 광경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으실 수 있으세요?”

연우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역시 어린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걸까?

“나도 사람이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

“하지만 이들을 구하려 했다가는 칸이 위험해지겠지.”

“……!”

도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연우는 뒤로 돌아섰다.

“잊지 마라. 칸은 지금 하르간의 발목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녀석 혼자서는 하르간을 상대할 수 없고, 우리가 늦어질수록 위험해지고 만다는 걸.”

“…….”

“냉정하게 우선순위부터 판단해라. 만약 사리 분별도 하지 못하고 멋대로 날뛰겠다면 나도 여기서 빠지겠다. 너희들이 죽든 말든.”

도일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수많은 갈등이 눈가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연우는 그런 도일을 보면서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이성과 감정의 대립 속에서 갈등을 겪는 녀석에게서 옛 동료들의 모습이 비쳐졌다.

‘트라우마? PTSD 계통인가.’

PTSD. 통칭,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커다란 사건을 목격하거나 경험한 뒤에 정신적인 질환으로 남은 병.

거기에 어떤 스위치가 작동한 게 틀림없었다.

도일이 어떤 과거를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것과 비슷한 일을 겪었고, 그때의 상황들이 자꾸만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

그렇게 도일은 짧은 침묵 끝에.

짜악!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스스로 세게 후려쳤다.

눈처럼 하얗던 피부에 손바닥 자국이 붉게 남았다.

분노로 가득 섞여 있던 두 눈도 깊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다짐한 것처럼 단단한 눈빛으로 다시 연우를 올려다봤다.

“죄송했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연우는 지금 이 순간, 도일이 트라우마를 억누르고 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이것이 장차 도일이 쌓아 갈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칠 터였다.

“빨리 다시 시작하죠. 지금도 칸 형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도일이 암컷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려는 찰나.

‘잠깐.’

연우는 문득 다른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르간 부부가 인간 농장을 만든 이유는 새끼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걸 역으로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기다려.”

“왜 그러세요?”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조금만 계획을 수정해도 되나? 잘만 한다면 사람들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도일이 눈을 크게 떴다.

우선순위로 칸을 선택했다지만, 그래도 이대로 사람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같이 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뭔가 싶어 눈을 반짝였다.

“밤에 보여 줬던 화염충, 그게 필요하다.”

가면 아래.

연우가 차갑게 웃었다.

* * *

퀸 타라간은 분노를 잔뜩 드러냈다.

“인간! 감히 인간이 나타나다니!”

그러면서 몽둥이를 세게 휘둘러 옆에 있던 리자드맨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보고를 하러 왔던 근위병은 졸지에 살해당하고 말았지만, 아무도 그런 타라간을 말리지 않았다.

그녀가 히스테리를 부릴 때는 하르간도 어쩌지 못한다.

이럴 때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오히려 피해가 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 새끼! 내 새끼를 노리고 온 거야!”

타라간이 처음 낳았던 알은 열넷. 그중 셋은 알을 깨고 나오지 못했고, 또 셋은 호기심이 많아 둥지 밖으로 나갔다가 다른 몬스터들에게 잡아먹혔다.

그리고 다시 세 마리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르간 타라간 부부에게 남은 다섯 마리 새끼는 아주 각별한 존재였고,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등지는 반드시 보호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인간들이 나타났단다.

먹이로 ‘묶여서’ 온 놈들이 아닌, 칼을 들고 찾아온 놈들.

그것도 이전에 왔다가 도망쳤던 녀석들이었으니.

타라간은 피범벅이 된 몽둥이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너! 너! 너! 내 새끼, 지켜라! 너희들이 죽더라도, 내 새끼 지켜라!”

그녀는 인간들이 새끼를 노릴 거라는 강박증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편보다 더 강한 자신도 나서서 침입자들을 물리쳐야만 했다.

근위병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바짝 긴장하며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새끼들에게 조금이라도 자잘한 상처가 나는 날에는 머리통이 부서질 수 있었다.

쿵!

쿵!

하르간보다 더 큰 3미터나 되는 덩치가 들썩일 때마다 바닥이 크게 요동쳤다.

바로 그때.

갑자기 타라간 앞으로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하얀 가면. 타오르는 안광.

연우였다.

그는 오른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죽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인간, 죽인다아!”

타라간은 감히 겁도 없이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연우를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흉포한 살기가 둥지를 따라 확 뻗쳐 나갔지만.

연우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봐, 리자드 퀸.”

“뭐냐아!”

“혹시 불꽃놀이 좋아하나?”

“무슨……!”

타라간이 무슨 헛소리냐면서 연우를 짓밟으려는 순간.

연우가 갑자기 쥐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새끼들이 있는 보금자리 안 쪽으로 집어던졌다.

타라간은 순간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재빠르게 몽둥이를 휘둘러 허공에서 주머니를 터뜨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가루들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져 타라간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서리와 불꽃의 방에서 수없이 잡았던 몬스터들의 가루.

“도일!”

그리고 연우의 신호에 맞춰 구석에 숨어 있던 도일이 재빠르게 화염충을 가루 쪽으로 인도했다.

거친 폭발이 타라간을 뒤덮었다.

콰아앙!

쐐애애액-

연우와 도일은 서로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땅을 거세게 박찼다.

“크아아아! 이놈드으을!”

폭발이 지나간 자리.

타라간은 힘으로 불길을 헤집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는 한쪽 눈이 부서지고, 상반신이 화상으로 짓물러진 중상을 입고 말았지만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다.

인간들이 새끼들을 노린다는 사실에 다급함이 앞섰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보금자리로 향했지만, 이미 그곳엔 연우와 도일이 근위병들의 제거하고 새끼들을 한 마리씩 낚아채고 있었다.

특히 연우는 주머니를 던졌을 때처럼 그녀에게 잘 보란 듯이 새끼를 잡아 올렸다.

그리고 차가운 웃음소리와 함께 그대로 목을 대검으로 그어 버렸다.

촤아악!

“아아악! 인가아안! 감히이! 감히이이!”

타라간의 두 눈이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로 황소처럼 돌진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연우를 찢어 죽인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쿠쿠쿵-

“인간들을 한낱 가축으로 여겼으면.”

하지만 연우는 다음 새끼를 잡아 뒤로 내빼기 시작했다.

놓으라면서 바동거리는 새끼의 목에다 대검을 갖다 밀어 넣었다. 처절한 비명 소리가 둥지를 따라 잔뜩 울려 퍼졌다.

“너희들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어야지. 안 그래?”

“그 손 놓아라아아! 인가아안!”

그러나 타라간은 연우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두 눈은 천천히 죽어 가는 새끼에 고정 된 채로 연우를 쫓았다.

그러다 연우가 다 죽은 새끼를 아무렇게나 바닥에다 던졌다.

타라간이 새끼를 잡기 위해 앞으로 몸을 날린 순간.

콰아아앙!

콰쾅! 콰콰콰-

미리 매설해 뒀던 부비 트랩이 작동하면서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폭발이 일었다.

폭발은 옆에 있던 트랩을 건드리고, 다시 일어난 폭발은 또 옆에 있던 트랩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연쇄 폭발이 일었다.

지면이 터지고, 나무가 불타며, 주변이 온통 불바다에 잠겼다.

타라간은 그런 불바다 속에서 팔다리가 터져 나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크아악! 인가안! 인가아안!”

원래 주도면밀했던 타라간이었다면 진즉에 부비 트랩을 눈치챘을 것이다.

서둘러서 매설한 탓에 위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곳이 많았으니.

하지만 새끼의 죽음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어미가 어디 있을까.

게다가 타라간의 새끼에 대한 집착은 아주 대단했다.

연우는 바로 이런 점을 공략했고, 타라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안 된다아! 내 새끼느으은! 내 새끼느은!”

타라간은 불바다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 나왔다. 전신이 화상으로 뒤덮였지만, 여전히 새끼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와 도일의 손에는 아직도 새끼가 세 마리나 남아 있었고.

계속 이동을 하다가, 마지막 남은 한 마리가 죽을 즈음에는 타라간도 마지막 남은 부비 트랩에 휘말려 장렬하게 산화하고 말았다.

콰아앙!

연우는 마지막 숨을 내뱉는 타라간의 목젖에다가 대검을 깊게 밀어 넣어 명줄을 마저 끊어 버렸다.

“인간과 몬스터, 둘의 관계는 그것밖에 안 되는 거야.”

[보스 몬스터, 타라간(리자드퀸)을 처치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만큼 획득했습니다.]

[리자드맨들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하르간의 둥지가 공황 상태에 잠깁니다.]

타라간을 성공적으로 처치했다는 메시지가 잔뜩 떠올랐다.

연우는 한 순간 피로가 잔뜩 몰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걸로 서리와 불꽃의 방에서 갖고 왔던 가루는 전부 다 써 버렸나?’

아무리 부비 트랩을 이용한 공격에 의존했다지만, 그래도 타라간과의 간격을 벌리면서 목표 지점까지 계속 끌고 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칫 실수라도 저지르거나, 타라간이 정신을 차리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도일 녀석도 타이밍 좋게 뒤에서 화염충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힘들었겠지.’

즉석에서 떠올리고 시행한 작전 치고는 그래도 제법 손발이 잘 맞았다.

“형!”

그때 도일이 달려와 연우의 옆에 섰다.

그는 여전히 타라간의 시신을 보는 내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처음 하르간의 둥지를 공략할 당시에 칸과 함께 고생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도무지 믿기 힘든 성과였으니까.

우연히 발견한 던전에서의 몬스터 가루로 이런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연우를 존경이 가득 섞인 눈빛으로 바라봤다.

전투에 임하는 판단력이며 작전을 구성하는 능력, 그리고 그걸 실행하는 실력까지.

하지만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는 턱짓으로 시신을 가리켰다.

“왕관부터 챙겨라. 서둘러서 칸에게로 가야 하니까.”

도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타라간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죽은 새끼의 시체를 부둥켜 안은 채로 타 죽어 있었다.

분명 눈물겨운 모정이었지만.

도일의 시선은 싸늘했다.

연우가 했던 말마따나 인간과 몬스터는 서로를 죽일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약하면 잡아먹히는 곳이 탑의 세계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연우는 타라간이 쓰고 있던 왕관을 거두는 도일을 보면서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나중에 일이 전부 끝나고 나면 다시 찾아와야겠어.’

타라간은 죽어서도 여전히 강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비록 살아 있는 녀석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바토리의 흡혈검은 죽은 사체라고 해도 생기를 조금이라도 품고 있으면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었다.

저만한 녀석을 흡수할 수 있다면? 능력치 향상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스킬 생성까지 가능할지도.’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는 사이.

도일은 왕관을 뽑아 손에 꽉 쥐었다. 그의 손이 감격으로 부르르 떨렸다.

연우는 칸이 있을 곳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과 도일이 합류한다면 하르간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공적치는 물론, 타라간처럼 하르간의 사체도 같이 챙길 생각이었다.

* * *

그러던 그때.

“크어어엉! 타라간! 타라가안!”

쿵,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르간이 모퉁이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폭발 소리를 듣고 달려왔는지 녀석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뒤따라 칸도 같이 달려왔다.

혼자서 상당한 격전을 벌였던 걸까.

얼굴이 많이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폭발 흔적으로 가득한 주변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빠르게 눈치챘다.

잘했다는 뜻으로 씩 웃으면서 다시 검을 꽉 쥐었다.

지쳤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팟!

다시 힘을 내면서 움직였다.

연우와 도일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움직였다.

이쪽은 이제 세 명.

조금 지치고 부비 트랩이 없다고 해도 충분히 하르간을 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화아아!

세 개의 칼바람이 타라간의 사체에 정신이 팔린 하르간을 난도질하려던 찰나.

연우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예민해진 감각이 갑자기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뭔가 위험하다고!

순간, 일기장의 내용 중 한 개가 떠올랐다.

하르간은 타라간보다 훨씬 덩치도 작고 약했다. 그런데도 녀석이 리자드맨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가지 고유 스킬이 있기 때문이었다.

……열풍(熱風), 이라고 했다.

동생과 팀 아르티야도 하르간을 잡을 때에 상당히 고생해야만 했다던 고유 스킬, 열풍.

하르간이 꽉 쥔 시미터를 따라 뜨거운 열기가 맴돌았다.

열풍이 터져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피해!”

연우는 앞으로 달리다 말고 재빨리 뒤로 빠졌다. 칸과 도일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각자 방향을 직각으로 꺾어 하르간의 범위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이윽고 하르간이 시미터로 세게 땅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지면이 터지듯이 내려앉으면서 열풍과 불길이 마구잡이로 치솟았다.

불바다가 삽시간에 둥지 전체를 뒤덮으면서 가뜩이나 부비 트랩으로 반쯤 날아갔던 일대를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제길!’

연우도 양팔을 교차시켜 얼굴을 가리면서 후폭풍에 떠밀리다시피 밀려 나야만 했다.

예민한 감각 영역도 열기로 가득 차 도저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칸과 도일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휘이이-

열기가 가신 뒤, 연우는 양팔 사이로 겨우 건너편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하르간이 있던 자리를 따라 완전히 무너진 둥지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불길이 출렁이고, 까만 매연이 자욱한 세계는 왜 녀석이 리자드킹이라 불리는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한 발이라도 늦어 저기에 휘말렸다면?

뼈도 추리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저절로 살 떨리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타라가안. 너의 복수! 내가 대신 이룬다아!”

하르간이 타라간과 새끼의 시신을 같이 부둥켜안으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것과.

와그작!

눈물을 흘린 채로 주저 없이 타라간의 목덜미를 깨물면서 씹어 먹는 모습을.

동족 포식.

녀석은 타라간의 힘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일기장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보스 몬스터, 하르간(리자드킹)이 스킬 ‘포식’을 사용, 타라간(리자드 퀸)의 힘을 강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변이를 시도합니다.]

[2차 페이즈가 발현됩니다.]

쿠쿠쿠-

지진과 함께 열풍이 다시 한 번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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