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6화 (2권) (26/862)

2권

1화. 동족 포식 (1)

콰콰콰!

마치 잔잔한 호숫가에다 돌멩이를 집어던진 것처럼.

열풍은 파문을 그리면서 몇 번이고 불어닥쳤다.

일행은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아니, 그보다 먼저 열풍이 가져다준 열기에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으니.

연우와 칸은 각자 쓰러진 바위나 나무 그루터기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바위가 지글지글 끓고, 나무가 바짝 메말라 타들어 가는 게 보일 정도였다.

도일은 하루살이를 잔뜩 끌어모아 만든 방패로 몸을 숨기면서 멀찍이 떨어졌다.

‘미칠 노릇이군.’

연우는 바위 너머로 인상을 살짝 찡그리면서 여전히 열풍을 마구 풍겨 대는 하르간을 훔쳐봤다.

녀석은 마치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경건한 자세로 타라간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콰드득.

콰득.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하르간의 골격도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게 보였다. 열풍의 세기나 온도도 급증했다.

‘2차 페이즈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

연우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본래 2차 페이즈는 탑에서도 초심자 구역을 벗어난 꽤 강한 보스 몬스터들이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런 것을 일개 튜토리얼의 보스 몬스터가 해내고 있었으니.

그만큼 원통하단 뜻일까?

그때 연우는 이쪽을 보고 있던 칸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

목표로 했던 하르간의 왕관은 이미 손에 넣었다.

이대로 그냥 도망치면 될 것 같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쫓아오려 하겠지. 게다가 이런 열풍을 피해서 도망치기가 쉽지 않아.’

이미 하르간의 둥지뿐만 아니라, 둥지를 둘러싸고 있던 숲 속 일대 전체에 걸쳐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수풀이 바싹 메마른다. 불꽃이 튀면서 불길이 치솟았다.

게다가 강풍까지 휘몰아쳤으니 도망치기란 요원해 보였다.

칸도 연우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타라간을 잡았으니 이번에도 무슨 방법이 있지 않느냐는 눈빛.

하지만 연우도 이 위기를 타개할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가로저으려는 순간.

‘잠깐. 어쩌면……?’

문득 다른 뭔가가 떠올랐다.

‘어차피 여기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야. 그렇다면 뭐라도 해 보자.’

연우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 내용을 어떻게 칸과 도일에게 전달해야 할까 싶어 잠깐 고민하던 때.

-아, 아. 형, 제 말 들려요?

연우는 갑자기 귓가에 꽂히는 소리에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없고, 손톱크기만 한 벌레가 윙윙 떠다니고 있었다.

벌레는 연우의 오른쪽 어깨에 올라탔다.

연우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너, 도일이냐?”

-히히. 다행이네요. 혹시나 했는데 잘 전달되나 보네. 이쪽도 형 목소리가 잘 들려요.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벌레도 있었나?”

-심어충이라고, 정확하게는 소유자의 의사를 전달하는 벌레긴 한데요……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편하신 대로 생각하시면 돼요.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형, 무슨 방법 생각해내신 거죠?

연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에게 계획을 전달하고 싶었던 차에 타이밍이 좋았다.

역시 도일이 먼저 연우의 눈치를 채고 접선을 한 모양이었다.

“혹시 내 말, 그대로 칸에게도 전해 줄 수 있나?”

-단순히 전달만 하는 거라면요.

“좋아. 잘됐어.”

연우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 * *

쿠쿠쿠!

하르간은 드디어 모든 의식을 끝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라간의 시신은 더 이상 없었다.

대신에 타라간만큼이나 덩치가 커진 하르간이 남아 있었다.

크기만 장장 3미터.

한 손에는 시미터를, 다른 손에는 타라간의 몽둥이를 든 채로 거칠게 포효를 질렀다.

크오오오!

숲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우르르 떨렸다.

“인간! 어서 나와라아, 인가안!”

하르간은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걸음을 옮겼다.

쿵.

쿵.

대지가 들썩이면서 열풍이 더 거칠게 일었다. 바닥이 이글이글 끓으면서 하얀 수증기를 피웠다.

“인간, 나오지 않으면 내가 간다아!”

하르간은 인상을 잔뜩 구기면서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서진 바위 잔해가 널브러진 곳.

감히 왕비와 새끼의 목숨을 앗아 간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바위를 부수기 위해 돌진하려던 그때.

탁!

갑자기 바위 너머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연우가 밖으로 나왔다.

바위 위에 올라선 채로. 하얀 가면 뒤에서 하르간을 보면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와라.”

“죽인다아!”

하르간은 바닥을 거세게 걷어찼다.

콰앙!

하르간의 몸뚱이가 단숨에 연우가 있는 곳까지 치달았다.

대지가 들썩이고, 열풍이 사방으로 불어닥쳤다. 불길이 지면을 뚫고 날아오면서 위압감을 형성했다.

단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살이 메마르고 타 버릴 것 같은 열기.

하지만 연우는 불길이 근처까지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저 가만히 눈을 가느다랗게 좁혀 하르간을 주시하기만 할 뿐.

그때 심장 부근에서 가느다란 뭔가가 저절로 일어났다.

마력이 주인을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꿈틀대면서, 스킬을 발동시켰다.

[감각 강화]

[전투 의지]

순간.

연우를 둘러싼 시간이 확 하고 느려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집중력이 극대화되고, 사고 가속이 이뤄지면서 의식을 제외한 주변 모든 것들이 느려진 것이었다.

덕분에 달리는 하르간도, 하르간을 둘러싼 불길이나 열풍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보통 때였으면 뇌가 타 버릴 것 같은 압박감을 받았겠지만.

불꽃의 심장과 서리의 문장을 내장한 육체는 그런 압박감을 견뎌 내고도 남았다.

그리고 연우는 거기다 스킬을 한 가지 더 추가했다.

체내를 돌던 마력이 눈가에 잔뜩 맺히면서.

마치 뱀의 눈을 연상케 하는 세로 동공이 열렸다.

[용마안]

연우는 한없이 느려진 세상 속에서 오로지 결로 가득 찬 세상의 물질들을 엿보았다.

하르간도, 열풍도, 불길도 모두 결로 구성되어 넘실댔다.

바로 그때, 연우가 움직였다.

콰앙!

지면을 거세게 박차 하르간에게로 내달렸다.

남들이 봤다면 자살 행위로밖에 비치지 않을 행동.

하지만 연우는 불길과 열풍 속을 관통하면서 굵직한 결을 따라 대검을 세게 내리그었다.

그러자 마치 세상이 단층을 따라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촤아악!

연우의 앞을 가로막던 불길이 단층과 함께 확 하고 꺼지고 말았다.

열풍도 똑같이 발기발기 찢겨져 연우를 피해 옆으로 충돌했다.

콰쾅!

도무지 눈으로 직접 봐도 믿기지 않을 광경.

“인가아안!”

하르간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는지 쉴 새 없이 시미터를 휘둘러 댔다.

그럴 때마다 불길이 치솟고 열풍이 파도처럼 지면을 휩쓸었지만.

촤악! 최악!

연우는 몇 번씩이고 결을 그어 대면서 불길과 열풍을 마구잡이로 찢어 놓았다.

마치 불바다 속에 갇혀 있는데도 불길이 유일하게 연우만 피해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덧 연우는 하르간이 있던 곳까지 다다라 충돌했다.

콰아앙!

타라간의 힘을 계승한 하르간의 근력은 대단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칼질은 연우쯤은 금방이라도 동강을 내 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시미터는 연우의 미간 바로 앞에서 멈춰야만 했다.

대검과 부딪친 부위에 아주 작게나마 금이 가 있었다. 시미터의 결에 대검이 박히면서 조금씩 안 쪽으로 파고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시미터 자체를 부수지는 못할지언정, 압도적인 근력의 차이를 단번에 메울 수 있게 했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였다.

“크어어엉!”

하지만 하르간은 이런 걸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한 번 포효를 내지르면서 시미터에 잔뜩 힘을 실었다.

다시 한 번 열풍이 불어닥쳤다.

연우는 근력 다툼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검을 우측으로 밀어내면서 몸을 좌측으로 피했다.

시미터가 힘없이 지면에 내리꽂혔다.

하르간의 몸뚱이가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사이.

팟! 파밧!

기다렸다는 듯이 칸과 도일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칸은 검을 곧추세워 하르간의 발목을 깊게 쓸고 지나갔다. 도일은 화염충으로 이뤄진 벌레 폭탄을 연거푸 터뜨렸다.

“이것들이이!”

하르간은 한낱 인간들에게 농락당한다는 사실에 시미터를 거칠게 뽑아 횡대로 휘두르려고 했다.

녀석이 자랑하는 고유 스킬, 열풍을 발동시키려는 것이었지만.

콰앙!

그럴 때면 연우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결을 끊어 버렸다.

“감히! 감히이!”

그러면 다시 하르간이 연우를 잡으려 하고, 그사이 칸과 도일이 다시 달려들어 재공격을 가했다.

콰앙! 쾅!

콰콰콰!

세 사람은 철저하게 차륜전으로 하르간을 상대했다.

연우가 열풍의 결을 끊어 버리면 칸과 도일이 빈틈을 노리고, 하르간이 둘을 잡기 위해 움직이면 뒤에서 연우가 다시 달려들어 어그로를 잡아끄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하르간은 시선이 계속 분산되는 데다가, 스킬을 발동하려는 족족 파훼가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상처는 계속 늘어나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졌으니.

하지만 연우를 비롯한 세 사람은 절대 마음을 놓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컨트롤이 틀어지면 모든 게 끝장이었으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게다가 그들도 지치기는 매한가지라, 악착같이 정신력으로 버티고 또 버려야만 했다.

“용서, 못한다! 타라간, 복수 꼭 하고 만다아!”

그러다 어느 새부턴가.

쿠쿠쿠!

하르간의 공격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녀석을 따라 감돌던 열풍의 온도도 눈에 띄게 줄었다.

“타라간의 복수……! 새끼 복수…… 하고 만다……!”

목소리에도 지친 기색이 섞였다.

바로 그때, 연우가 움직였다.

‘지금!’

스걱!

연우는 하르간의 가랑이 사이로 미끄러지면서 발목을 세게 그어 동맥을 절단시켰다.

하르간이 크게 휘청거렸다.

원래대로였다면 다시 균형을 잡고 일어섰을 상처.

하지만 녀석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시미터를 바닥에 꽂은 뒤에야 겨우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사이 연우는 놈의 어깨 위에 올라 타 왼손을 활짝 열었다.

손바닥을 따라 검은 멍울이 맺혔다. 좌우로 확 벌어지면서 톱니 이빨이 훤하게 드러났다.

연우는 톱니 이빨을 상처가 가득한 하르간의 목덜미에다 쑤셔 넣었다.

녀석을 상대하면서 개시한 네 번째 스킬이었다.

“먹어라.”

[바토리의 흡혈검]

키아아악!

톱니 이빨은 꿈에서나 나올 것 같은 끔찍한 비명 소리를 질러 댔다.

“놔라아! 놔라아아!”

하르간도 영혼이 송두리째 뽑히는 느낌에 마구 발버둥을 쳤다.

어떻게든 연우를 떼어 놓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칸과 도일은 녀석이 움직일 수 없도록 손목을 자르고, 남은 근맥을 베고 지나갔다.

[생기와 정기를 갈취합니다.]

[힘이 3만큼 올랐습니다.]

[민첩이 2만큼 올랐습니다.]

……

[‘바토리의 흡혈검’의 스킬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5.4%]

하르간이 가진 정력이 워낙에 대단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체력을 떨어뜨려 놓았는데도, 연우의 망막에는 메시지가 쉴 새 없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죽인다아!”

정말 이대로는 위험하다고 여겼던 걸까.

하르간은 마지막 남은 정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피부를 따라 불길이 거칠게 일어나 연우를 집어 삼켰다.

화르륵!

“카인!”

“형!”

얼마나 불길이 거셌던지, 칸과 도일은 공격을 하다 말고 멀찍이 떨어져야만 했다.

그러면서 애타는 시선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여전히 그는 하르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으니까.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이 따를 텐데도 불구하고, 연우는 오히려 톱니 이빨을 더 깊게 쑤셔 넣었다.

하르간에게서 갈취한 정력으로 몸을 치료하면서 버티고 또 버렸다.

그러다.

쿵!

끝내 하르간이 한쪽 무릎을 지면에다 꿇고 말았다.

시미터를 지팡이 삼아 어떻게든 일어나야 한다는 마지막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톱니 이빨은 이마저도 송두리째 삼켜 버렸다.

결국 녀석의 손이 손잡이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타라간 복수…… 새끼 복수…… 해야…… 한다아…….”

하르간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2차 보스 몬스터, 하르간(리자드킹)을 처치했습니다. 파티 멤버의 각 기여도에 따라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2,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퀘스트를 달성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500만큼 획득했습니다.]

……

메시지가 미친 듯이 치고 올라왔다.

연우는 그제야 겨우 체액이 송두리째 빨려 미이라가 된 하르간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미치겠군.’

그는 속 쓰림과 현기증 때문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익숙지 않은 스킬 연동으로 인한 후유증.

특히 계속 혹사해야 했던 눈과 뇌가 타 버릴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어떻게든 성공했나?’

바토리의 흡혈검을 이용한 작전.

넘버링 66에 해당하는 최상위 스킬이니 어떻게든 수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덤벼 봤던 것인데.

그래도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질렀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을 테니까.

그래도 퀘스트를 달성하고, 보스 몬스터까지 잡았다는 메시지를 보니 겨우 속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연우를 기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쭉 나열되다가 가장 마지막에 떠오른 메시지.

[바토리의 흡혈검이 상대의 근원을 갈취, 스킬을 일부 강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킬 ‘열풍’이 생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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