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동족 포식 (2)
[바토리의 흡혈검의 숙련도가 낮아 강탈한 스킬의 등급이 재조정 됩니다.]
[스킬 ‘열풍’이 ‘열화’로 바뀌었습니다.]
[열화]
등급: D+
숙련도: 0.0%
하르간(리자드킹)의 고유 스킬, 열풍이 초기화된 형태.
인위적으로 원하는 도구에 불길을 생성할 수 있다.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점차 고열을 띠게 된다.
‘고유 스킬이라고? 그것도 버프 스킬을?’
연우는 스킬 내용을 확인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스킬 연계로 인한 후유증은 물로 씻은 듯이 사라진 것 같을 정도였다.
아래 등급으로 격하되었다고 하더라도 무려 고유 스킬을 얻었으니.
고유 스킬.
이것은 유니크와는 비슷하되, 조금은 다르다.
두 종류 모두 특정 대상‘만’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스킬.
당연히 탑 내에서도 한 사람 외에는 가질 수가 없었다.
위력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귀하기까지 했다.
다만, 유니크는 딱 한 사람만 가지는 것과 다르게 고유 스킬은 조금 의미가 달랐다.
고유 스킬은 보통 보스 몬스터가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죽게 되더라도, 회차가 갱신되면 원래 설정대로 리셋되어 나타나게 된다.
동생이 오래전에 하르간을 사냥했었다지만, 이번 튜토리얼에 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열풍은 하르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 스킬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강탈이 가능하다면 이것을 가지게 될 플레이어들도 여러 명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하지만 스킬 강탈은 최상위 옵션이기 때문에 흔하지 않았고, 튜토리얼에서는 더더욱 구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바토리의 흡혈검은 그런 옵션을 가진 여러 스킬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해당했으니.
즉, 하르간의 스킬을 강탈한 플레이어는 연우가 유일하다고 해도 무방했다.
비록 숙련도의 부족으로 열풍은 얻지 못했다지만, 그래도 이것만 해도 아주 큰 성과였다.
버프 스킬.
그것도 화 속성을 도구에다 실을 수 있는 스킬이라니.
‘특정 속성을 아티팩트에 실을 수 있다면 위력은 그만큼 더 증가될 수밖에 없지. 속성 아티팩트가 비싼 값에 거래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
하지만 연우는 굳이 속성 아티팩트를 구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었다.
게다가 열화 스킬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다용도로도 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이란, 속성 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이고 확장성이 컸으니까.
‘나중에 따로 실험해 봐야겠어.’
연우는 흡족한 마음을 가지면서 스킬창을 천천히 껐다.
그래도 새로 얻은 스킬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 정도 후유증이 가셨다.
비틀대는 걸음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칸과 도일이 옆에서 부축했다.
“너, 몸은……?”
칸은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연우를 보면서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하르간이 마지막에 불사르던 불길을 고스란히 맞아야만 했으니.
연우가 입고 있던 옷은 거의 타 버려 곳곳에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쓰고 있던 가면도 절반쯤 일그러지거나 녹아 흉측한 형태였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저 움직이기 버거울 뿐이니.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아질 거고.”
바토리 흡혈검의 에너지 드레인으로 상처를 복원할 수 없었더라면 정말 큰일이 났었겠지.
연우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인마.”
“그래요, 형. 혹시 다른 데 다친 곳이 있을지 모르니까 잠시 앉아 봐요.”
하지만 그래도 칸과 도일은 염려 섞인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옆에서 자꾸 떨어지질 않는다.
연우는 이 귀찮은 것들을 어떻게 떼어 놓을까 잠깐 고심했다.
그러다 마침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둥지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보다 저쪽에 있는 사람들, 계속 저렇게 둬도 괜찮나? 하르간의 불길 때문에 저쪽이 더 위험해졌을 텐데?”
그제야 도일은 인간 농장에 아직 사람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다급히 칸을 데리고 그쪽으로 움직였다.
연우는 그제야 겨우 반쯤 타다 만 그루터기에 등을 기대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후유증을 완전히 진정시키기 위해서.
* * *
노예들의 구출은 빠르게 이뤄졌다.
다행히 하르간이 쏟아 내던 열풍은 인간 농장까지는 닿지 않았다.
아마 새끼들에게 줄 먹이를 보관해 두는 장소이다 보니, 외부 피해를 덜 받을 곳에 설계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으헝헝.”
사람들은 몸을 속박하고 있던 사슬과 구속구가 풀릴 때마다 눈물을 펑펑 쏟아 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신을 되찾았을 때.
그들은 죽은 하르간의 시체를 몇 번이고 걷어찼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아직 살아 있는 리자드맨을 쫓아 분풀이를 하기도 했다.
그들 모두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난 사람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 눈앞에서 새끼 리자드맨에게 잡아먹히는 걸 가만히 봐야만 했었다.
당연히 울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으니.
칸과 도일은 그들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소동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그들 중에 머리를 빡빡 민 중년인이 대표로 다가와 인사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드리겠소. 덕분에 이렇게나마 죽은 동료들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니…… 녀석들도 이제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겁니다.”
칸과 도일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 것을요.”
칸은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래 그의 성격대로라면 자랑스럽게 대답했을 테지만, 그래도 무거운 분위기를 알기 때문에 최대한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눈가에는 뿌듯함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러다 중년인이 슬쩍 물었다.
“그런데 혹시.”
“예. 말씀하십시오.”
“혈검의 칸이신 것 같은데. 혹시 맞으십니까?”
“이런.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하핫!”
칸은 계면쩍은 척 뒷머리를 긁으면서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눈이 커지면서 웅성거렸다.
“저, 정말 혈검의 칸이라고?”
“하긴! 그쯤 되니 리자드킹을 쓰러뜨릴 수 있으셨던 거겠지!”
“말로 듣기만 했었는데. 정말 대단하시구나. 나는 발끝도 못 쫓아가겠어.”
“그럼 옆에 계신 분은, 폭시 테일 아냐?”
“맞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띄워 주면 띄워 줄수록 칸의 입꼬리도 계속 올라가 귓가에 걸렸다.
도일은 그런 형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 저렇게까지 관심을 받고 싶을까.
하지만 칸은 히죽대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하핫!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만 하르간을 잡았던 건 아닙니다. 도리어 저는 거들었을 뿐이지요. 저 친구가 없었다면. 음. 으으음. 생각도 하기 싫네요.”
칸은 익살맞게 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태도 덕분에 사람들은 대부분 긴장과 피로를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칸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그곳엔 연우가 앉아 있었다.
그는 칸, 도일과 다르게 멀찍이 혼자 떨어져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연우를 보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몇몇은 마치 혐오스러운 걸 봤다는 것처럼 대놓고 인상을 찡그리거나, 바닥에다 침을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칸은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 사람, 칸 님이나 도일 님과 같이 다니는 플레이어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말씀드리건대, 저 사람, 부디 조심하십시오.”
칸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었다.
“이유를 여쭙고 싶습니다만.”
“처음 도일 님이 저희를 발견하셨을 때. 구해 주시려던 걸, 버리고 가자 말했던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었습니다.”
중년인은 인상을 잔뜩 구기면서 연우를 노려봤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당시 연우와 도일의 다툼을 떠올렸다.
결국 도일도 연우와 같은 쪽으로 돌아섰다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차갑게 자신들을 버리려고 했던 연우의 모습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칸이 살짝 굳은 눈빛으로 도일을 돌아봤다.
진짜냐는 눈빛.
도일은 연우가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중년인은 그걸 ‘동의’라고 받아들이고,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해서 주제넘은 발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 사람은 도저히 사람으로 볼 수 없을……!”
“예. 주제 넘으셨습니다.”
그때.
칸이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보면서 중년인의 말허리를 잘랐다.
중년인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 무슨.”
“주제가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당신.”
칸은 한쪽 입술 끝을 비틀면서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중년인은 칸이 쏘아 내는 싸늘한 눈빛에 잔뜩 굳어야만 했다. 그건 다른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칸은 비웃음을 짓는 얼굴 그대로 다가가 중년인의 가슴팍을 검지로 세게 찔렀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저 친구 역시 당신들을 구해 준 은인이야. 나와 도일의 동료이기도 하고. 그리고 하르간과의 싸움에서 가장 많이 다치기도 했지.”
칸은 더 이상 존대도 쓰지 않았다.
존대는 존대를 들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써야 했다.
은혜도 모르는 이런 머저리들 따위?
알게 뭔가.
“그런데 멍청하게 리자드맨에게 붙잡혔다가, 겨우겨우 살아난 당신 따위가. 뭐? 저 사람을 조심해? 지금 어디에다가 그딴 개소리를 지껄여?”
“……!”
중년인은 모멸감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꽉 쥔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칸은 거기다 대고 다시 비웃음을 날렸다.
“왜? 그 주먹으로 나 치기라도 하게? 쳐 봐. 어서. 뭐해? 왜? 리자드킹은 무서워서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같은 플레이어니까 좀 만만해 보이나 보지? 어서 쳐 보라니까. 빨리.”
칸은 아예 대놓고 볼을 내밀기까지 했다.
중년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다 도와줄 사람을 찾으려는 듯 주변을 돌아봤다.
여태 같이 농장에 갇혀 있으면서 죽어도 같이 죽자면서 의기를 투합했던 사람들.
하지만 그중에 중년인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같이 엮일까 싶어 시선을 옆으로 회피하기만 할 뿐.
중년인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미, 미안합니다.”
“뭐? 잘 안 들리는데?”
칸이 인상을 더 팍 찡그리면서 귀를 중년인의 입가에 바짝 붙였다.
“미안…… 합니다.”
중년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피식.
칸은 코웃음을 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말, 해야 할 대상이 바뀌지 않았나?”
누굴 말하는지는 불에 보듯 뻔했다.
중년인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연우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연우는 여전히 이쪽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저 명상에 잠겨 있기만 할 뿐.
칸은 그런 연우를 가리키면서 어서 가라고 턱짓을 했다.
중년인은 떨리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연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확 허리를 90도로 숙여 사과했다.
“미안, 합니다. 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되게 입을 놀린 것,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연우는 오랫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중년인은 더더욱 숙인 허리를 펴지 못했다.
그러다 연우가 슬쩍 눈을 뜨더니 귀찮은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
중년인은 그때서야 숙인 허리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강자와 약자.
탑에서의 일방적인 관계는 이미 여기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었다.
* * *
중년인, 브랜드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혹시 브랜드가 말이라도 걸까 싶어 허겁지겁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텅 빈 주변.
브랜드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다가 대강 적당한 곳에 앉았다.
‘더러운 것들.’
브랜드는 이를 악물었다.
리자드맨들에게 갇혀 지낼 때에는 그렇게 자신을 필요로 하던 것들이.
필요한 것이 있을 때면 언제나 목숨을 걸고 나서서 리자드맨에게서 얻어다 주고는 했었는데.
이제 와서 상황이 난처해지니 전부 피해 버린다.
더럽고, 비참했다.
또한, 단순히 구해 줬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이따위로 깔아뭉갠 칸과 도일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이런 일을 만든 놈이 가장 증오스러웠다.
“저, 형님.”
그때, 브랜드 옆으로 빼빼 마른 남자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이든. 인간 농장에 있을 때부터 자신을 가장 많이 따라다니던 녀석이었다.
처음 녀석은 네다섯 명 정도 되는 무리를 이끌고 다니다가 인간 농장으로 통째로 끌려 왔었다.
그래서 죽을 뻔한 걸 나서서 살려 뒀더니, 그 뒤부터 형님으로 모시겠다면서 쫄래쫄래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브랜드 역시 녀석이 싹싹하기도 하고 눈치도 빨라서 가까이 됐었는데.
오늘 도움을 청할 때 가장 먼저 시선을 회피했었다.
“뭐냐?”
그러니 좋은 반응이 나올 리가 없었다.
브랜드가 차갑게 쏘아붙이자, 이든은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뭘?”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한 거, 말입니다. 그, 그래도 이해해 주십시오. 아시잖습니까? 저, 저희가 사, 사는 방식을요.”
브랜드는 이든을 잔뜩 노려보다가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든과 동료들은 고위 플레이어들의 뒤만 따라다니면서 구획을 전전하는 하루살이들이었다.
뭐라고 하는 것도 우스울 따름.
대체 저런 실력을 가지고서 어떻게 E구획까지 왔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더 이상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가라.”
“저, 너무 그러지 마시고, 제 말 좀 들어보시죠, 형님.”
브랜드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가뜩이나 울화가 치미는 판국인데 자꾸 속이나 긁어 놓으니.
그래서 발끝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라도 주워서 던져 버릴까 하는 충동이 막 들었을 때.
갑자기 이든이 불쑥 꺼낸 말이 브랜드의 행동을 멈칫거리게 만들었다.
“형님, 혹시 증표나 아티팩트 같은 거 필요하지 않으세요?”
“뭔 헛소……!”
“마침 저기 증표가 아주 많은 보물단지가 있잖습니까. 이참에 확 한몫 땡기시죠?”
이든이 눈짓으로 가리킨 곳.
연우 쪽으로 다가가는 칸과 도일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