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동족 포식 (3)
증표.
아티팩트.
브랜드는 순간 혹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수작이라뇨. 다 살려고 하는 짓이죠.”
“살려고? 살려고 은인들을 죽이겠다고?”
이든이 기겁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죽이긴 누굴 죽여요! 저 인간들을 죽인다고? 덤볐다가 우리가 죄다 모가지 날아가겠네.”
“그럼?”
“훔치자는 거죠.”
“뭐?”
브랜드는 처음으로 혹한 마음이 들었다.
이든은 그의 표정을 읽고 씩 웃었다.
“어차피 우리들, 물건도 죄다 뺏기고 전부 알거지 신세잖습니까? 그냥 이대로 E구획에 풀려 봤자 죽을 게 뻔하잖아요?”
“음.”
브랜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이든의 말의 맞았으니까.
그들이 E구획까지 오면서 모았던 아티팩트와 증표는 전부 리자드킹에게 빼앗긴 상태.
결국 양손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란 뜻이었다.
당장은 칸과 도일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튜토리얼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곧 어딘가에 두고 갈 것이다.
그럼 이런 모습으로 밖으로 나서야 한다는 뜻인데.
숨어 다니면서 튜토리얼의 기간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거나, 최악의 경우 다른 몬스터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니 우리가 독립할 수 있는 정도만 훔치고 달아나자는 겁니다.”
“걸리면? 그래도 죽을 텐데?”
“위험도는 덜하겠죠. 그리고 어차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똑같지 않습니까?”
브랜드는 어느새 이든의 말에 반쯤 홀리고 있었다.
“그럼, 작전은? 그냥 무턱대고 덤빌 수는 없잖나.”
“헤헤. 형님도 참. 제가 그 정도 생각도 못 했겠습니까?”
이든이 방실방실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데리고 온 동료 중에 특성이 ‘쾌수(快手)’인 놈이 있습니다.”
“쾌수? 손이 날래다는 뜻인가?”
“예. 그렇죠. 손으로 하는 짓이 기가 막히거든요.”
브랜드는 이든이 가진 작전이란 게 대충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손이 날랜 특성이 있다면, 거기에 특화된 스킬도 있다는 뜻.
“한쪽이 이목을 끄는 사이에 물건들을 죄다 훔치겠단 뜻이냐?”
“뭐, 비슷해요. 어떠십니까?”
브랜드는 고민에 잠겼다.
일의 위험도와 성공 가능성까지.
확률은 바닥을 길 테지만.
그래도 성공한 뒤에 어쩌면 크게 한탕을 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욕심과 함께.
자신에게 모욕을 줬던 칸 일당과 연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득.
그것만으로도 할 동기는 충분했다.
“좋아. 작전, 자세히 말해 봐.”
브랜드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이든은 히죽 웃으면서 동료들과 함께 설계한 작전들을 쭉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하는 내내.
그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 * *
연우는 한참 뒤에야 명상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래도 육체가 뒷받침 되니까 후유증도 빨리 낫는 것 같군.’
원래대로라면 하르간을 상대했을 때처럼 계속된 스킬 연계는 피하는 게 좋았다.
아직까지 연우가 쌓은 역량으로는 그걸 온전하게 감당할 수준이 되질 못했으니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강화골로 단단해진 육체와 바토리의 흡혈검이 갈취한 정혈 덕분에 회복 속도가 빨랐다는 점이었다.
아마 하르간의 2차 페이즈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무리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하지만 덕분에 한계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으면 어떤 행동을 취할 때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연우는 강화골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확실하게 깨달았고, 그 덕분에 가능한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립해 나갔다.
그렇게 모든 생각이 끝난 뒤.
연우는 칸, 도일을 따라 다시 하르간의 둥지를 찾았다.
히든 퀘스트를 깼으니 보상을 받을 차례였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하르간의 왕관, 푸른 비늘의 칼, 레어의 소유권을 획득했습니다.]
“자, 카인도 돌아왔고. 일단 정산부터 해 볼까?”
칸은 가볍게 박수를 치면서 입맛을 다셨다.
퀘스트를 어렵게 수행하고 난 뒤, 보상을 정리할 때가 가장 설레는 법이었으니까.
“하르간의 왕관은 약속대로 나랑 도일이 가져간다?”
칸은 하르간의 왕관에 손을 대면서 슬쩍 연우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이번 하르간의 둥지 공략에 가장 많은 기여도를 가진 건 바로 연우였다.
자신들이 이곳을 공개했다지만, 그래도 기여도만큼의 몫을 요구한다면 골치가 아파지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연우는 하르간의 왕관에 별반 관심이 없는 투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만 끄덕였으니까.
“가져가.”
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역시 우리 카인! 흐흐. 형이 너 참 좋은 놈인 거 처음부터 알았다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흐흐흐. 부끄러워하기는.”
연우는 능글맞게 웃는 칸의 낯짝을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가, 가볍게 피식 웃었다.
저러고도 미워할 수 없으니. 참 묘한 놈이었다.
“도일아, 챙겨라.”
“응.”
도일은 하르간의 왕관을 꽉 쥐었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푸른 비늘의 칼이랑 레어의 소유권은. 약속했던 대로 카인, 네가 가져라.”
원래 약속했던 내용.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르간의 시체에서 가져온 시미터를 살폈다.
[푸른 비늘의 칼]
분류: 양손 무기
등급: D+
설명: 하르간(리자드킹)이 애용했던 시미터. 자체적인 화 속성을 띠고 있으며 강렬한 내구도를 자랑해 모든 걸 부순다.
다만, 무게가 엄청나기 때문에 웬만한 근력으로는 드는 것조차 버겁다.
* 리자드킹의 위엄
무기를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패기를 발산한다. 일정 확률로 상대를 공황 상태로 만든다.
공황 상태의 지속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대가 받는 피해도 비례해서 증가한다.
워낙에 덩치가 큰 놈이 사용해서 그럴까.
시미터의 크기는 거의 연우에 육박했다.
때문에 연우는 물건을 드는 것만 해도 상당히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분명 내용 면만 살핀다면 푸른 비늘의 칼은 하르간의 왕관만큼 뛰어난 아티팩트였다.
튜토리얼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 중 상위에 해당했으니까.
하지만 주로 짧은 대검을 사용하는 연우에게는 영 맞지 않았다.
게다가 레어의 소유권도 마찬가지.
[하르간의 둥지 소유권]
레어 내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과 자원에 대한 권한을 획득한다.
* 둥지 내 물건 목록
1. 붉은 오크의 투구
2. 함성의 도끼
3. 단단한 수정×31
……
연우는 쭉 나열된 목록을 꼼꼼하게 살폈다.
하르간이 열풍을 쏟아 내면서 대다수의 물건이 망가졌다지만, 그래도 창고에 상당수의 물건들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중에는 탐날 만한 것들도 꽤 많았지만, 칸과 도일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연우에게 넘겨줬다.
물론 목록에는 노예로 붙잡혔던 이들이 쓰던 물건들도 있었다.
도의상이라면 돌려줘야 맞겠지만, 세 사람은 돌려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탑과 튜토리얼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아무리 기존 소유자가 있는 물건이라도, 전리품은 전리품 주인의 것이란 점이었다.
하지만 연우 역시 이것들이 별 필요 없긴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깟 아티팩트들은 당장은 쓸모 있을지 몰라도, 탑에 가면 지천에 널린 것들이야.’
그나마 한 가지 정도는 챙길 만했다.
[카르슈나의 단검]
분류: 한 손 무기
등급: D-
설명: 어느 이름 모를 수행자가 평생에 걸쳐 즐겨 사용하던 단검. 원래는 평범하게 구할 수 있는 재질로 만들어졌으나, 수행자의 정념이 깃들면서 단단해졌다.
* 수행자의 의지
무기에 대한 숙련도가 오를수록 공격 속도와 공격력이 증가한다.
연우는 ‘카르슈나의 단검’을 터치해 가볍게 손에 쥐어 보았다.
무게나 크기가 기존에 쓰던 대검들과 비슷했기 때문에 제법 손에 잘 익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날이 직선이지 않고 살짝 굽었다는 건데.’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았다.
‘마침 가지고 있는 대검들도 거의 날이 상했으니. 남은 튜토리얼에서 쓸 만한 정도는 되겠어.’
수행자의 의지라는 추가 옵션도 꽤 마음에 들었다.
연우는 카르슈나의 단검을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꽂고, 남은 목록을 살폈다. 하지만 이 외에 연우가 쓸 만한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둥지 내에 있는 자원도 마찬가지.
‘아티팩트 제작에 필요한 광물이 많을지는 몰라도, 따로 전부 챙길 수 없다면 가방만 무거워질 뿐이지. 차라리 몬스터들을 도축해서 얻은 재료들이 훨씬 비싸.’
다만, 하르간이 모아 놓았던 증표는 미리 챙겨 둔 상태였다. 그렇게 모인 양이 200개가 훨씬 넘었다.
결국 연우는 별다른 소득 없이 메시지를 꺼야 했다.
‘뭐, 어차피 예상했던 거니까.’
하지만 연우는 별달리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도 기대했던 게 있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사실 연우는 처음부터 별반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동생도 일기장에다 말하지 않았던가.
위험도나 난이도에 비해서 하르간의 둥지 퀘스트가 주는 보상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그런데도 연우가 이 퀘스트 제안을 수락했던 건, 부족한 공적치를 채우고 증표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별 쓸모없는 잡템이라도 많이 모여 있으면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
그때, 도일이 조심스럽게 연우를 불렀다.
“왜 그러세요, 카인 형? 마음에 드는 게 없으세요?”
그는 연우가 별다른 소득도 없이 돌아갈까 봐 조금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참 이럴 때는 어느 정도는 뻔뻔해져도 될 텐데.
이렇게 보면 도일은 참 여렸다.
어떻게 저런 심성으로 야수가 우글대는 탑에 오를 생각을 한 건지.
하지만 그게 도일의 매력이기도 했다.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 만한 건 없다만. 그래도 손해는 보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예?”
도일이 무슨 소린가 싶어 연우를 바라볼 때.
연우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다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거기 계속 숨어 있으면 목이 아프지 않나?”
도일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칸도 살짝 굳은 얼굴이 되어 같은 쪽을 봤다.
그 순간.
“이런이런. 원래 숨바꼭질에서는 술래에게 들키면 안 되는 법인데. 벌써 눈치채셨었나요? 깜짝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말이죠.”
허공에 포탈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로브를 푹 뒤집어쓴 채 익살맞게 웃는 사내.
신비 상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