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9화 (29/862)

4화. 동족 포식 (4)

신비 상인의 등장에 칸과 도일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형, 신비 상인도 알고 있었어요?”

도일이 놀란 얼굴로 연우를 쳐다봤다.

연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이런. 너무하십니다. 저는 저희가 아주 각별한 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지요. 오호호!”

신비 상인은 되도 않는 농담을 아무렇게나 떠들어 대면서 히죽 웃었다.

그럴수록 도일의 표정은 점차 놀란 얼굴이 되었다.

신비 상인은 연우에 대한 호감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었으니까.

사실 신비 상인은 개인적으로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보통 녀석은 각 구획의 대기실이나, 보스룸에서 아주 가끔 출몰하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특별히 정해진 시기 없이, 랜덤으로.

때문에 대개 신비 상인을 기다리기 위해서 기약 없이 대기실에서 죽치고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갑자기 불쑥 나타나고 말았으니.

물론, 신비 상인과 아예 개인적으로 거래를 틀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칸 님과 도일 님도 오랜만입니다. 패스 티켓을 사신 이후로 처음 뵙는 것이던가요?”

신비 상인은 칸과 도일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어. 그러게.”

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B구획의 대기실로 가는 티켓을 사느라 지불했던 능력치를 생각하니 다시 속이 쓰려지는 것 같았다.

신비 상인과 개인적인 교분을 트는 방법은 간단했다.

튜토리얼 랭킹 10위 안에 드는 것.

칸과 면식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도 아니면.

‘신비 상인에게서 직접 인정을 받은 사람이거나.’

그런데 연우가 그런 ‘선택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납득도 갔다.

여태껏 연우가 보였던 일들을 생각한다면, 신비 상인이나 관리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신비 상인은 그렇게 두 사람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연우를 돌아봤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아신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아주 조용히 숨어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만.”

칸과 도일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 상인은 관리자와 마찬가지로 탑에 예속되어 있는 존재다. 당연히 기척을 읽을 수가 없을 텐데.

하지만 연우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모르면 이상하지.”

“끄응. 말씀해 주실 생각이 전혀 없으신 거로군요.”

신비 상인은 앓은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로브 아래, 그의 눈빛은 묘한 빛을 발했다.

아무도 사지 않는 A구획의 리셋 티켓을 샀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었지만.

여러모로 연우는 참 신기한 존재였다.

그래도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웃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따금 모른 척하는 센스도 발휘해 주십시오. 이렇게 너무 흥이 식어 버리잖습니까? 오호호.”

연우가 비딱하게 고개를 외로 꼬았다.

“계속 모르고 있었으면 그냥 이대로 있다가 꿀꺽할 생각 아니었나?”

신비 상인이 씩 웃었다.

“이런. 이런. 이제는 제 속내까지 들키고 말았군요.”

연우는 능글맞게 웃는 신비 상인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탑에서 절대 신뢰해서는 안 될 존재를 꼽으라 한다면, 아마 가장 먼저 신비 상인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외부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소문과 다르게, 사실 신비 상인은 어디서나 플레이어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실수로 두고 가거나, 별 필요 없다고 여겨서 버린 물건들을 몰래 챙기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이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경계해야 할 존재가 바로 신비 상인이었다.

녀석들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다.

오히려 돈이 되는 곳이라면 기쁘게 웃으면서 오물통에라도 들어갈 녀석들이었다.

언제나 플레이어들을 감시하면서 그들이 버린 물건들을 몰래 가져다 다른 필요한 곳에 비싼 값에 팔아 치운다.

만약 여기서 연우가 등지에서 필요한 것들만 갖고 떠났더라면.

아주 조용히 뒤늦게 나타나 둥지 내에 있는 것들을 모두 꿀꺽해 버렸을 테지.

물론 연우는 전혀 그렇게 쉽게 넘길 생각이 없었다.

“증표 150개.”

다짜고짜 내뱉은 말.

흥정이었다.

레어의 소유권과 푸른 비늘의 칼에 대한 가격.

칸과 도일이 재미나다는 표정으로 신비 상인을 돌아봤다.

하지만 신비 상인은 팔짱을 끼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런, 이런. 제게 흥정을 거시려는 모양이십니다만. 증표 150 개면 최상위 주…….”

“160개.”

“……자들도 그만큼 못…….”

“180개.”

“……받을 만큼 많은…….”

“200개.”

신비 상인의 말이 길어질수록 연우는 자꾸 개수를 위로 올렸다.

“250개.”

“……그 개수로 지금 판매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말?”

“300개. 빨리 콜을 외치는 게 좋을 거야. 늦으면 늦을수록 개수는 계속 올라갈 테니까.”

그러면서 연우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둥지는 통째로 날아갈 거다. 둥지가 품고 있을 마정석과 함께 통째로.”

“그런 마정석쯤이야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

“순도 70이 넘는 마정석이 쉽게 구할 수 있는 거라니. 미처 몰랐군. 그럼 어쩔 수 없지. 전부 날려 버리는 수밖에.”

“……!”

여유 가득하던 신비 상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노리고 있던 걸 정확하게 꿰뚫리고 말았으니까.

그럴수록 연우의 미소는 짙어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상대가 뭘 노리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당할 이유가 없지.’

나중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왜 그렇게 하르간의 둥지 퀘스트는 보상이 적었을까? 그리고 왜 굳이 레어의 소유권을 보상으로 내걸었던 걸까?

탑은 성취한 업적만큼 보상을 정확하게 내주는 곳.

하지만 둥지는 그렇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런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러다 순도 높은 마정석을 채굴할 수 있는 장소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다만, 그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조금 아쉽기만 할 뿐, 속이 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유를 알았어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마정석은 마력을 전달하고 저장하는 기본 매체였다. 지구로 치면 전도체와 같은 역할을 했다.

순도가 높을수록 마력 전달 효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비싼 값을 자랑했고, 70이 넘는 건 보통 아주 비싸게 거래되었다.

신비 상인이 하르간의 둥지를 탐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그만큼 비싼 마정석이 있다면 내가 가질 수도 있겠지만. 순도가 높은 마정석일수록 채굴 방법도 아주 까다로워져.’

동생이 마정석의 비밀을 알고 난 뒤에 별 아쉬워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럴 바에는 그 시간에 증표를 조금이라도 더 모으는 게 이득이지.’

이를테면, 둥지 내에 있는 마정석은 계륵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필요한 사람에게 비싸게 팔아 치우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필요로 하는 상인이 떠억 하니 눈앞에 있었고.

신비 상인도 그제야 연우가 쳐 놓은 덫에 완전히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래서야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으니까.

“으으음! 그래도 증표 300개는 마정석 값으로는 너무 비싼…….”

“400개.”

“아, 알겠습니다! 그만하시죠! 그 금액에 맞춰서 셈을 치러 드릴 테니까 더 올리지 마십시오! 저 그러다 진짜 파산한다고요!”

신비 상인은 결국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연우도 그제야 미소를 폈다.

“좋아. 405개에 낙찰하지. 5개는 쓸데없이 내 시간을 잡아먹은 값.”

“……정말이지 저보다 더 지독하신 분은 처음 봅니다.”

신비 상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허공에다 손을 활짝 펼쳤다.

우웅-

그러자 허공에 푸른색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메시지창이 저절로 떠올랐다.

[거래를 통해 ‘푸른 비늘의 칼’과 ‘하르간 레어의 소유권’을 판매, 증표 401개를 획득했습니다.]

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시미터와 주변을 둘러싼 하르간의 둥지가 통째로 사라지는 걸 확인했다.

대신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증표 698개]

처음에는 100개도 안 되던 증표가 단순히 퀘스트를 깨고 둥지를 파는 것만으로 700개 가까이로 늘어났다.

연우의 미소가 짙어질 무렵.

칸과 도일은 이제 입을 쩍 벌리다 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살다 살다 신비 상인에게 삥을 뜯는 플레이어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으니.

신비 상인은 거래를 종료하는 내내 ‘손해가 막심하다’느니, ‘남는 게 없다’느니, ‘사기를 맞았다’느니, 혼잣말을 자꾸 중얼거렸다.

“아, 참 그리고.”

신비 상인은 연우가 다시 말을 걸자 살짝 경계하는 기색을 떴다.

“또, 또 뭘 뜯어내시려고요?”

“누가 들으면 내가 양아치 짓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그보다 사고 싶은 게 있는데.”

드디어 건수를 잡았다.

신비 상인이 싱글벙글 웃었다.

“으흐흐. 어떤 걸 원하시는지요?”

연우는 손으로 가면을 가리켰다.

“망가져서. 똑같은 걸로.”

신비 상인은 ‘쳇’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런 것이라면야 많습니다만. 아 참, 가격은 힘 스탯 4정도는 받아야…….”

“물론, 덤으로.”

“그런 거래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거래 취소하지.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

신비 상인은 금방이라도 길길이 날뛰면서 욕지거리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고작 싸구려 가면 하나에 큰 거래를 무효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결국 신비 상인은 끝까지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허공을 짚었다.

[‘하얀 귀신의 얼굴’을 획득했습니다.]

연우는 손에 들린 가면을 가볍게 매만졌다. 자신이 쓰던 것과는 비슷한 디자인이면서도 조금 달랐다. 딱딱한 합금이 아닌 처음 만져 보는 재질이었다.

“매번 가면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 같아 좋은 걸로 특.별.히. 마련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양아치 짓 하시면 정말 안 놀아 드릴 겁니다. 아셨지요?”

연우는 묘한 표정을 띠면서 아티팩트를 확인했다.

[하얀 귀신의 얼굴]

분류: 투구

등급: E+

설명: 여러 귀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면. 쓰는 것만으로도 기괴함을 잔뜩 풍기며, 기척을 일부 차단시킨다.

한 번 착용하면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상처를 입어도 죽은 망령을 붙잡아 복구시킨다.

옵션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가면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얼굴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고, 상처를 입지도 않는다는 대목이 마음에 들었다.

연우는 신비 상인과 칸, 도일이 볼 수 없도록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 기존에 쓰던 가면을 벗었다.

그동안 그렇게 거칠게 뛰어다녔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망가지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제는 작별이었다.

연우는 기존의 가면을 가볍게 부숴 바닥에다 버리고, 대신에 하얀 귀신의 얼굴을 뒤집어썼다.

피부에 착 감기는 느낌이 묘했다.

정말 설명대로 잘 벗겨지지 않을까 싶어 손으로 매만져 봤다.

다행히 가면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도통 떨어지질 않았다.

“고맙게 잘 쓰지.”

“정말 고마운 걸 알기나 하시는 건지. 에휴!”

신비 상인은 챙겨 왔던 보따리를 도로 묶으면서 어깨에 이었다.

하지만.

한숨을 내쉬는 것과 다르게 그의 입가에서는 왠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신비 상인은 포탈을 열어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발을 안쪽으로 내밀던 중에, 뭔가를 떠올리고 슬쩍 다시 연우를 돌아봤다.

“아 참, 그리고 말입니다.”

“뭐지?”

“마정석을 파시는데 똥배짱을 부리셨잖습니까? 혹시 ‘저쪽’의 상황을 알고 계셔서 그러신 건가요?”

로브 아래, 신비 상인의 시선이 예리하게 빛났다.

하지만 연우는 무덤덤하게 답했다.

“저쪽? 그게 무슨 말이지?”

“으으음. 아닙니다. 아무것도. 제가 착각했나 보군요.”

신비 상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그렇게 푸른색 포탈이 닫히는 동안.

연우는 여전히 담담한 눈빛을 뗬다.

새로운 가면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더더욱 알아 보기 어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도.

‘이걸로 확실해졌다. 탑 내 각 클랜과 랭커 사이의 군비 경쟁이 아주 치열해진 거야.’

연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