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2화 (32/862)

7화. 동족 포식 (7)

“쯔, 쯔바이!”

그들은 서열에 따라서 순번을 매긴다.

두 번째인 쯔바이가 이렇게 맥 없이 당했다는 것은……!

“피어!”

“노인!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물러서, 이 멍청이들아! 그러다 죽……!”

아인스는 동료들의 잘려 나간 머리통을 보고 충격에 잠긴 스캐빈저들을 향해 경고를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한 박자 늦은 뒤였다.

쉭!

아인스 옆으로. 칼날이 하늘에서부터 뚝 떨어졌다.

첸(10)이 갑자기 자기 목을 부여잡더니.

꾸르륵.

그대로 입 밖으로 게거품을 쏟으면서 쓰러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연우가 하얀 가면을 쓴 채 차갑 게 웃고 있었다.

촤아악!

“컥!”

“젠장!”

연우는 몸을 크게 돌리면서 녀석들 사이로 대검을 한껏 뿌렸다.

놈들이 저마다 목젖을 틀어쥔 채 피를 뿌리면서 나자빠진다. 스캐빈저들은 정신을 퍼뜩 차리면서 연우를 잡으려고 나섰다.

하지만.

쾅!

여태껏 기회를 엿보고 있던 칸과 도일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가뜩이나 전열이 엉킨 상황에서 두 사람의 공세까지 더해지자, 스캐빈저들은 그대로 휩쓸려 튕겨 나고 말았다.

“막아! 막으란 말이다아!”

아인스는 놀란 나머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하지만 이미 포위망이 혼전으로 뒤바뀐 순간, 그들에게 승산은 거의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연우는 마치 양 떼 사이를 누비는 늑대처럼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사방에서 칼날이 날아왔지만, 예민한 감각을 속일 정도는 아니었다.

연우는 마치 곳곳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능숙하게 공격을 피해 내면서 단검을 역수로 쥐어 상대의 근맥을 끊고, 대검을 던져 목을 꿰뚫어 버렸다.

칸과 도일도 마찬가지.

도일은 옆으로 빠지면서 화염충을 잇달아 폭발시켜 혼전을 더 큰 혼전으로 만들어 버리고, 칸은 왜 혈검이라 불리는지를 보여 주려는 듯 칼을 휘두를 때마다 핏물이 위로 튀었다.

마치 그 모습이 도시를 뒤덮는 해일처럼 느껴졌으니.

결국 스캐빈저들은 사냥을 하려다가 되레 사냥을 당하는 입장으로 전락했다.

“이 개 같은 것들이……!”

아인스는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고자 발버둥 쳤다.

하지만 어느새 면전까지 치달은 칸을 보고 기겁해하며 검을 앞으로 돌렸다.

칸은 녀석이 보인 빈틈을 놓치지 않았고.

스걱!

전력을 다해 휘두른 일격에 아인스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튀었다.

* * *

스캐빈저는 처음 정체를 드러냈을 때의 충격과 다르게 허망할 만큼 빠르게 몰락했다.

기대했던 응원군이 죄다 목이 잘린 채로 나타나고, 그들을 이끌던 아인스도 너무 쉽게 목을 내 주고 말았다.

그러니 사기가 삽시간에 곤두박질을 칠 수밖에.

결국 스캐빈저들은 절대 승산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하나둘씩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 시작했다.

“하, 항복하겠어! 그러니까 제, 제발 요, 용서해 줘!”

“우리는 아인스가 하라는 대로 어쩔 수 없이 끌려왔을 뿐이야. 진짜야. 믿어 달라고!”

“마, 맞아! 우리도 살기 위해서는 가담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어! 하, 하지만 사람을 죽인 적은 없으니까, 부디 목숨만은……!”

그들은 칸과 도일이 가진 인정에 기대고자 했다.

별다른 인연이 없었어도 노예들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했던 모습.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다면 최소한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하르간과 다른 게 뭐지?”

칸은 무릎까지 꿇은 녀석들을 보면서 차갑게 물었다.

“무, 뭐?”

“너희가 동족 포식을 했던 하르간과 다른 점이 뭐냐고 묻는 거다, 이 개새끼들아.”

“무슨…… 컥!”

칸은 가차 없이 놈들의 목에다 검을 꽂아 넣었다.

스캐빈저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누구를 건드렸는지를 깨달았다.

여태 만만하게 생각했었지만, 상대는 혈검이었다.

탑에서도 손꼽히는 랭커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후광을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칭호까지 거머쥔 검사.

그런 사람이 한낱 인정에 휘말릴 리가 없는 것이다.

“하르간은 그래도 최소한 자기 마누라랑 애새끼가 죽는 걸 보고 눈물이라도 흘렸지. 너희들은, 같은 인간을 팔아넘기면서도 웃었을 거 아니냐고! 게다가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까지 농락하고, 죽여?”

결국 스캐빈저들은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하나둘씩 달아나기 시작했다.

빈손으로 늪지대에 들어가면 리자드맨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위험이 컸지만, 이미 그들에게 그런 생각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도주도 쉽지는 않았다.

연우가 지원군들을 제거했을 때처럼 어느새 어둠 속에서 그들을 일일이 사냥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처절한 비명 소리가 숲을 따라 한참 동안 이어지고.

짙은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감돌 때쯤에 스캐빈저들도 모두 사라졌다.

탁!

연우는 마지막 남은 스캐빈저를 처치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거기엔 이미 칸과 도일이 깊은 시름에 젖은 채로 앉아 있었다.

여태껏 리자드킹에게 붙잡혀 있던 사람들을 구출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노예들은 모두 죽고 없었고, 정작 일을 꾸민 놈들만 남아 있었던 셈이었으니.

충격이 컸을 것이다.

연우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이런 비슷한 일을 비일비재하게 겪었던 자신과 다르게 칸과 도일은 처음으로 겪은 일이다.

같은 인간에 대한 회의감도 들 것이고, 이딴 일을 저지른 놈들에 대한 분노도 있을 것이다.

감정이 복잡하겠지.

이럴 때는 별다른 위로가 통하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일어서기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뒤에 보통 보이는 모습은 두 가지지. 미치거나, 단념하거나.’

연우는 카르슈나의 단검에 묻은 핏물을 헝겊으로 대충 닦고 허리춤에 꽂았다.

그사이.

칸이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넌,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익숙하니까.”

“대체 네가 살아온 삶은…… 어떤 건지 짐작도 가질 않는군. 너희 세상 사람들은 다 너 같나?”

연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랬다면 그쪽 세상이 미쳐 돌아갔겠지.”

“하아.”

칸은 잔뜩 피로한 듯, 검지와 엄지로 눈덩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리면서 진지한 눈빛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도 되냐.”

연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어떤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여태 피해자인 척 나섰던 이 미친 새끼들도 충격이었지만…… 사실 우리 둘은 너도 조금 무섭다.”

“…….”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는 건지. 처음부터 이들을 의심했었단 뜻이잖아.”

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넌, 애초 처음부터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거야. 그렇지?”

그리고 그건 우리 둘에게도 마찬가지일 테고.

칸은 뒷말을 삭였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연우에게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다.

‘헤어질 때인가.’

연우는 지금이 이 두 사람과의 작별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애초 탑 내 사람은 플레이어라면 아무도 믿지 않는 자신과.

신뢰를 기반으로 팀을 이루고자 하는 칸과 도일.

이 셋의 관계는 좋게 마무리되기가 아주 어려웠던 것이다.

특히 연우에게 마음을 열고자 했던 칸과 도일로서는, 연우가 자신들을 그저 거래의 대상으로만 여겼다는 사실을 알고 상처를 입었겠지.

연우는 혀 뒤끝이 조금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라고 해서 두 사람을 완전히 타인으로만 여겼던 건 아니었으니까.

웃음이 많은 칸과 정이 많은 도일. 두 사람이 가진 인간적인 매력은 아주 컸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이들의 주관이 있었고, 자신에게는 자신의 주관이 있었다.

맞지 않는다면 헤어지는 수밖에.

“그럼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연우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몸을 반대로 돌렸다.

도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나섰지만, 칸이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그렇게.

작별은 갑자기 이뤄졌다.

* * *

“형!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도일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연우가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칸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정 표현을 잘 드러내지 않는 도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쓸쓸히 사라지는 연우의 뒷모습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를 보고 말았으니까.

그런데.

“앉아.”

“말해! 이게 무슨 짓이냐고!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카인 형이 그동안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

“앉으라고.”

나지막한 칸의 목소리.

도일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게 최선이었다.”

“무슨……!”

“너, 못 본 거냐?”

“뭘?”

칸은 말없이 턱짓으로 죽은 스캐빈저가 떨어뜨린 칼을 가리켰다.

그냥 신비 상인에서 힘 스탯 2개를 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칼.

도일은 뭘 말하는 거냐고 말하려다가, 뒤늦게 칼 끝에 걸린 수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녹색과 하얀 실이 독특한 매듭법으로 묶인 수실.

도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설마, 저거?”

“그래. 아랑단의 표식이지.”

“……!”

도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그동안 이상하긴 했지. 왜 아랑단 놈들이, 아니, 청화도 놈들이 별 득도 되지 않을 튜토리얼 질서 유지니 뭐니 하는 헛짓 거리를 해 댔었는지.”

“…….”

“제들 딴에는 신규 유입을 위한 것이라 둘러댔지만, 사실 아는 놈들이 봤을 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잖아?”

아랑단의 배후, 청화도는 탑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클랜이다.

무사도(武士道)를 중시하고, 검과 협의 정신을 숭상시하는 자들.

당연히 따로 뉴비들을 관리하지 않아도 지원자는 넘쳐났고, 그들 중에서 입맛에 맞는 이들만 골라 가입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청화도가 아랑단을 만들어 튜토리얼을 관리한다고 했을 때.

수많은 클랜과 랭커들이 그들의 저의를 의심했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내버려 뒀었던 것인데.

사실은 스캐빈저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위장막이었다면?

“튜토리얼은 탑에서 쉽게 보기 힘든 여러 시스템이 복잡하게 얽혀 있지. 녀석들이 정확하게 뭘 노리는지는 알 수 없어도, 어떤 시스템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칸은 말을 잠시 끊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는 것이다.

“앞뒤가 전부 맞게 되는 거지. 안 그래?”

도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청화도가 갑자기 아랑단을 만들겠다고 나섰던 것도, 아르티야가 튜토리얼 내에 있던 스캐빈저들을 모조리 청소했던 뒤였었네.”

“더 확실한 관리 체계가 필요했던 거겠지.”

도일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그제야 왜 칸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연우를 내쫓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연우를 이 뒤에 있을 위기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형. 그럼.”

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아무래도, 빌드, 그 개새끼 면상을 봐야 직성이 좀 풀릴 것 같다. 너는 먼저 ‘비그리드’가 있는 곳으로 가.”

비그리드.

칸과 도일로 하여금 하르간의 왕관을 필요케 했던 히든 피스.

그들이 튜토리얼에서 최종적으로 바라는 검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점수를 쌓아 나가는 에도라, 판트 남매를 이기고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패이기도 했지만.

“무슨 헛소리야, 형?”

도일은 씩 웃으면서 패를 걷어 찼다.

“나도 그 새끼들 얼굴을 좀 봐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죽겠는데.”

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휴. 내가 봤을 땐 네가 제일 천치다. 아무리 똑똑한 척하면 뭐 하냐. 결국 선택하는 건 머저리들이나 하는 짓인데.”

“형이 할 소리는 아니거든?”

언제나 그렇듯, 두 사람은 그렇게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그리고.

같이 일어나 연우가 사라진 방향과는 정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랑단이 주둔해 있다는 서쪽 지대였다.

* * *

연우는 동쪽으로 걷다 말고, 잠시 멈춰 서 서쪽으로 돌아봤다.

“……멍청한 놈들.”

연우는 어렴풋이 뒤늦게나마 두 사람이 어디로 갈지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작별 인사 뒤에 어떤 생각이 담겨 있는지도.

하지만 연우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동쪽으로 가야만 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절대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만약 헤어지기 직전에, 녀석들이 같이 가자고 했다면.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더라면.

그때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결국 연우는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한 채,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히든 피스.

아카샤의 뱀이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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