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아카샤의 뱀 (1)
빌드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2조가, 전멸했다고?”
“예. 그런 듯합니다.”
2조는 아랑단의 뒤에서 활약하며 ‘재료’들을 수급해 주던 곳이었다.
“범인은 또 그놈들이겠군.”
수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대답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빌드는 짜증이 치솟았다.
“충분히 잡을 수 있다기에 기회를 내주었더니 놓쳐? 하! 이로써 괜히 하르간만 빼앗긴 셈이로군.”
수하는 이럴 때 변명을 하면 큰일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바짝 고개를 조아렸다.
2조, 스캐빈저 부대로 하여금 연우 일행을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게 엊그제였다.
아랑단에서 연우와 칸, 도일이 E구획에 입성하자마자, 곧바로 하르간의 둥지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덫을 놓았던 건데.
하지만 녀석들은 도리어 보란 듯이 2조를 치워 버렸다. 미끼며 지원군까지 전부.
게다가 튜토리얼 마지막쯤에 차지하려던 하르간의 왕관마저 빼앗기고 말았으니.
배가 아플 수밖에.
“멍청한 것들. 이런 일에까지 내가 나서야 하는 것이냐?”
“며, 면목이 없습니다.”
겨우 키워 놓았던 2조가 사라진 이상, 더 이상 연우 일행을 놔둬서는 안 된다.
큰 피해를 입힌 놈들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분명 ‘섬’에서 빌드에게 제지를 할 게 분명했으니까.
“1조를 대기시켜라.”
“그, 그들을 말씀이십니까?”
수하의 눈이 양옆으로 찢어졌다.
1조.
아랑단에서 최정예라 불리며, 청화도에서 특별히 키우는 플레이어들로 이뤄진 부대.
개개인이 상위권 주자에 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하가 가장 놀란 건, 그들을 한 번에 집합시킨 게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단순히 세 명을 처리하는 데 쏟아 붓는다고?
전력상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단 셋이서 2조를 모두 해치운 놈들이다. 혈검과 폭시 테일, 그리고 가면을 쓴 놈까지. 전부 우리가 상정했던 것 이상이라고 염두에 둬야겠지.”
빌드는 의자에 상체를 반쯤 기대어 누웠다.
“차라리 잘되었다. 이참에 녀석들에게 제대로 된 실전을 보여 주는 것도 좋을 테지.”
수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그가 봤을 때도 1조는 전부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놈들이었으니까.
자신들이 청화도의 차기 주역이라는 믿음이 너무 강해서, 이따금 빌드의 말도 거스를 때가 많았다.
빌드는 이참에 눈엣가시인 연우 일행을 치우면서 1조의 기세도 꺾어 놓을 셈인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같이 움직인다.”
“……!”
수하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빌드는 아랑단의 간부이기 앞서, 탑에서도 어느 정도 층계를 공략한 플레이어.
아무리 튜토리얼 내에서 날고 긴다고 해도, 탑의 공략자와는 큰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상위권 주자들이 대거 갈려 나가겠군.’
수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일반 플레이어가 튜토리얼에 개입하는 건, 관리자에게 커다란 페널티를 입게 되는 요소다.
그런데 그런 페널티까지 감수하고서라도, 세 사람을 제거하겠다고 나선다.
그만큼 아랑단과 청화도에 있어 큰 걸림돌이 될 거라고 여긴 것이겠지.
“혹…… 그들이 2조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을, 의심하시는 것인지요?”
빌드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위험 요소는 굳이 남겨 둘 필요가 없으니까. 더구나 이렇게까지 부딪친 이상,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은가?”
빌드는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 넌 즉각 1조의 조원들을 모두 집합시키도록. 빠지는 놈은, 즉각 목이 잘려 나갈 거란 경고도 함께.”
“예.”
빌드는 사라지는 수하를 보면서 ‘쯧’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이제 제물을 모두 모으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필 이딴 데서 차질이 생길 줄은.”
카엔 일행과 엮였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쓱 옆으로 치워 버리기만 하면 될 줄 알았건만.
이렇게까지 사고를 치게 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혈검과 폭시 테일, 두 놈의 뒤가 너무 크다. 가면을 쓴 놈, 그것도 분명 어디선가 비밀리에 키워 낸 놈일 가능성이 크고. 배후가 의심스러워.’
빌드는 연우가 개인일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상식으로, 그만한 실력을 보이는 녀석이 아무런 지원도 없이 만들어졌을 거라고는 상상도 안 갔으니까.
특히 튜토리얼의 ‘안’을 솔로 플레이로, 그것도 일점돌파로 통과한 솜씨는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최대한 비밀리에.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게 놈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물론, 놈들의 배후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청화도가 가진 무력은 탑 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아직까지는 다른 클랜이나 랭커의 견제를 살 필요가 없을 뿐이었다.
‘아르티야가 사라진 뒤, 강제적으로 성립되었던 탑 내 평화도 이제 점차 뒤틀리고 있다.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최소한 폭발하기 직전까지, 최대한 힘을 많이 비축해 둬야 한다.’
비밀리에. 아무도 모르게끔.
그리고 힘의 비축을 위한 재료를 제공하는 곳이 바로 아랑단이었으니.
2조와 충돌한 연우 일행은 그래서 살려 둘 수가 없는 것이다.
빌드는 어떻게 녀석들을 정리할까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콰콰쾅!
“적습이다!”
“제길!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랑단의 본부가 위아래로 크게 요동쳤다.
입구에서 뭔가 폭발한 게 느껴졌다.
“비, 빌드 님!”
그때 1조를 소집하러 갔던 수하가 다시 문을 벌컥 열면서 다급하게 뛰어왔다.
빌드는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대체?”
“노, 놈들이 왔습니다!”
“놈들이라니?”
“혈검과 폭시 테일이……!”
“뭐?”
빌드가 짜증 섞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하가 다시 뭐라고 하려는데, 갑자기 빌드가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굳이 일을 꾸미거나 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왔으니 말이야.”
바로 그때.
콰아앙!
갑자기 왼쪽 벽이 터져 나가면서 칸과 도일이 나타났다.
여태껏 빌드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일직선으로 통과했는지, 온통 먼지와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빌드-!”
칸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노성을 터뜨렸다.
여태 튜토리얼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녀석에게 분노를 가득 담아서!
우르르-
살기와 투기가 뒤섞여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컥!”
“으악!”
두 사람을 잡기 위해서 뒤쫓아 왔던 단원들은 거친 기세에 튕겨 났다. 튕겨 나지 않은 자들은 피를 잔뜩 쏟으면서 기절했다.
바닥이 위아래로 들썩이고, 짙은 피비린내가 잔뜩 풍겼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붉은 색으로 물든 도룡검을 든 칸의 모습은 마치 마계에서 튀어나온 악귀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탑의 여러 클랜과 랭커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혈검의 ‘진짜’ 모습이었으니.
빌드는 녀석의 살기를 한껏 받으면서 천천히 칼을 뽑았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빌드의 입가에 맺힌 비웃음은 점차 짙어졌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튜토리얼에 있으면서 한참 심심하던 차였는데. 잘되었구나. 어디 한 번 같이 놀아보자, 철사자의 아들이여.”
그 말과 함께.
콰콰콰-
빌드와 칸은 서로를 향해 힘껏 몸을 날렸다.
다시 한 번 더 폭발이 일어났다.
* * *
빌드와 칸이 부딪친 그 시각.
연우는 E구획의 동쪽 지대에 들어서고 있었다.
울창한 숲이 어느덧 끊어지고, 대신에 검은 바위산이 뾰족뾰족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곳.
넓은 갈색 황무지. 오크 부락의 영역이었다.
오크는 흉악하게 일그러진 돼지 얼굴에 탄탄한 근육과 체격을 갖고 있었다.
크기도 2미터에 가까워 리자드맨보다 컸고, 플레이어를 보면 먼저 달려드는 습성이 있어서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물론, 그래 봤자 연우에게는 한줌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퍼억!
연우는 정찰을 돌다 말고 갑자기 공격을 가한 오크 세 마리의 멱을 따고, 남은 한 마리의 팔다리 근맥을 잘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위에 올라타 목에다 단검을 갖다 댔다.
“취, 취익! 이, 인간! 강하다! 사, 살려 다오!”
플레이어나 몬스터나 위기에 빠졌을 때 목숨을 구걸하는 건 똑같군.
연우는 차갑게 웃으면서 물었다.
“내가 널 살려 둔 건, 네가 그래도 이 중에서 가장 똑똑해 보여서였다.”
“마, 맞다! 취익! 나, 부족에서, 제일 똑똑하다! 취익!”
오크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사실은 아무나 찍어서 살려 둔 거지만.
“그럼 하나만 묻지. 이 근방에 혹시 사냥꾼의 모옥 같은 거, 본 적 없나? 아마 높은 돌산이나 나무 끄트머리에 있을 텐데.”
“무, 무슨! 취익.”
“잘 생각해 봐야 할 거다. 살려면. 어차피 너 말고도 주변에 물어볼 오크가 많잖나?”
오크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는 닷새 전에 뭘 먹었는지도 떠올려야 할 판이었다.
목의 살갗을 타고 차가운 칼날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가 줄줄 샜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오크는 공포에 잔뜩 질리다 가까스로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있다! 취익! 난 본 적 없지만! 도, 도, 동료들이 정찰을 돌다가, 바, 바오트리 끝에 이상한 집 걸린 거 봤다고 했다! 하지만 너, 너무 높아서 못 잡았다고 해, 했다!”
가면 아래, 연우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찾았다!’
히든 피스, 아카샤의 뱀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줄 안내자이며 도움을 줄 조력자가 있는 곳.
“거기가 어디지?”
오크는 살결을 파고들던 칼날이 도중에 멈췄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바, 바오트리는 여, 여기서 해, 해가 솟는 북쪽에서 밥 두 번 머, 먹을 만큼만 걸으면 된다!”
‘동북쪽. 여기서 반나절 정도 거리인가?’
오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이제 살려 주…… 컥!”
녀석은 말을 길게 잇지 못했다.
칼날이 단숨에 파고들어 경동맥을 끊어 버렸으니까.
“어, 어, 어째서……?”
오크는 꺼져 가는 눈빛으로 힘겹게 물었다. 대답을 해 줬는데도 왜 죽이는 거냐는 원망을 담아.
“묻는다고만 했지. 안 죽인다고 하지는 않았잖아?”
연우의 싸늘한 대답에 오크는 입을 금붕어처럼 벙긋거리다 그대로 절명했다.
연우는 곧바로 도축용 대검을 꺼내 죽은 오크들의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늑골을 발라내기 위해서였다.
오크의 뼈는 아주 단단한 밀도를 자랑한다. 역시 여러 아티팩트의 재료로 제격이었다.
연우는 꼼꼼하게 도축을 하면서 차후 계획을 정리했다.
‘아카샤의 뱀은 특정한 시기, 특정한 조건과 환경에서만 출몰하는 까다로운 녀석이야. 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 볼 수 없어.’
아카샤의 뱀은 동쪽 돌산 지대의 지하 깊숙한 곳을 돌아다니면서 살아가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이름만 뱀일 뿐, 녀석은 절대 단순한 뱀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모든 것을 삼키려 하는 포식자였다.
동생은 몇 번씩이고 일기장에 아카샤의 뱀에 대해서 기록을 해 뒀다.
그만큼 아카샤의 뱀과 마주했을 때 받았던 충격은 아주 컸고.
그때의 경험은 훗날 아르티야가 있게 만들어 준 가장 큰 계기가 되었으니까.
연우는 그런 녀석을 ‘혼자’서 잡을 생각이었다.
크기는 돌산 지대에서 흔히 보이는 돌산을 네다섯 개쯤 합친 것보다 컸고, 길이는 도무지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런 녀석이 튜토리얼에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아카샤의 뱀은 이따금 숨을 쉬기 위해 밖으로 나올 때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굶주린 배도 한꺼번에 채우려고 한다고 했다.
우리는 뭣도 모르고 그런 놈을 잡으려 했었고, 위험에 닥쳤을 때, 그 사람을 만났다.
동생과 아르티야를 위기에서 구해 준 은인이기도 했던 사람.
나의 첫 번째 스승, 갈리어드를.
‘뱀 사냥꾼, 갈리어드.’
연우는 앞으로 만나야 할 사람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그 아저씨가 내가 스승이니 뭐니 하는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는 걸 알았다면, 당장 잡으러 왔겠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없이 자유로우면서도, 한없이 과거에 구속되어 있는 망령 같은 존재.
그렇기에 수십 년 동안 아카샤의 뱀만 쫓는 사냥꾼.
갈리어드는 조금 독특한 내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탑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으며, 수십 년 동안 매번 회차 때마다 리셋되는 튜토리얼에만 머물렀다.
그렇다고 약한가 싶으면, 또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으니.
그 후에 동생이 6위의 랭커가 되고 난 뒤에 돌아봤을 때, 갈리어드는 충분히 랭커에 들 만한 솜씨를 갖고 있는 실력자였다. 그것도 상위권 랭커에.
만약 그런 그가 튜토리얼을 떠나 탑의 공략에 힘썼더라면…… 어쩌면 갈리어드는 동생보다 더 위에 있었을지도 몰랐다.
동생도 그런 솜씨를 튜토리얼에서만 썩히는 걸 너무 아쉬워했다.
소문이 나지 않았을 뿐이지, 갈리어드가 어떤 존재인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몇 번씩이고 티켓을 써서 그를 회유하러 왔지만, 그때마다 갈리어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유를 물어도 그때마다 제대로 대답도 해 주지 않았으니.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건, 갈리어드가 튜토리얼을 떠날 수 없는 어떤 미련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자가 아카샤의 뱀이라는 점이었다.
‘정우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아카샤의 뱀을 만날 수 있었어. 하지만 내게는 그런 준비를 할 겨를이 없으니, 곧바로 갈리어드를 만나 방법을 얻어야 한다.’
동생에게는 소중한 인연이었을지 몰라도, 연우에게는 그다지 큰 관심을 주지 못했다.
얻을 것만 얻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의 기술까지도.’
하얀 가면이 북동쪽으로 향했다.
‘안 된다면, 훔쳐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