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36화 (36/862)

11화. 아카샤의 뱀 (4)

연우는 갈리어드와 헤어진 뒤, 다급하게 아카샤의 뱀이 출몰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분명 일기장 속에서 본 풍경에 따르면 돌산이 숲처럼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야 했지만.

“…….”

연우를 맞은 건, 온통 엉망이 된 폐허였다.

‘대체 이곳을 어떻게 안 거지? 여긴 아르티야 외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을 텐데?’

아카샤의 뱀을 만난 건 정말이지 운에 운이 겹쳤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튜토리얼 기간 중 딱 한 번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그 시기에 장소를 지나고 있었고, 그때 우연히 갈리어드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아르티야가 있을 수 있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카샤의 뱀이 나타나는 시기는 끽해야 요 며칠 3일간뿐.

하지만 여기에 남은 흔적들은 최소 1주 이상은 지나 있었다.

연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판트와 에도라가 상대했다는 아카샤의 뱀이 비슷한 가짜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제길. 기대도 못 가지게 하는군.’

연우는 무너진 돌산 너머에서 거의 찢기다시피 한 아카샤 뱀의 사체를 찾을 수 있었다.

돌산 몇 개를 합친 것만큼 커다란 뱀이 죽어 있는 모습.

비늘 하나하나가 연우만 할 정도였다. 길이는 또 얼마나 긴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분명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을 때의 흉포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단순히 앞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될 정도였으니.

연우는 사체를 꼼꼼하게 살폈다.

혹시 판트와 에도라가 중요한 뭔가를 놓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하지만 이마저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단과 독샘 등, 아카샤의 뱀에서 가장 필요한 부위만 쏙쏙 골라 사라져 있었다.

판트와 에도라가 연우처럼 정확하게 ‘노리고’ 아카샤의 뱀을 사냥했다는 증거였다.

‘대체 이걸 어떻게 잡은 거지?’

결국 연우는 혀를 차면서 사체에서 몇 발자국 뒤로 떨어졌다. 그렇게 해도 여전히 사체를 전부 한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궁금증도 덩달아 커졌다.

아카샤의 뱀은 사냥하기가 아주 까다로웠다.

가진 덩치만큼이나 성질도 힘도 대단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근처에 접근도 하기 힘들었으니까.

특히 독니에 맺힌 맹독은 바위도 녹일 정도였다.

아마 플레이어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잡지 못할 만큼 강할 텐데.

어떻게 둘이서 잡을 수 있었던 걸까?

그만큼 두 사람이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강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걸까?

‘아카샤의 뱀을 불러낸 것도…… 무슨 수를 쓴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아.’

운디네의 잔을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아카샤의 뱀을 꺼낼 수 있었던 걸까?

무슨 주술이라도 부렸나?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다른 방법이라도 있었던 걸까?

연우의 머릿속으로 갖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모두 지난 뒤에 남은 생각은 단 하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연우는 잠시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튜토리얼에 들어온 후로 거의 처음 벗다시피 한 가면이었다.

그만큼 지금 그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렇게 맨얼굴로 바람이라도 쐐야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튜토리얼을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노렸던 히든 피스가 허망하게 사라졌으니까.

일주일 늦게 스타트를 했어도 자신이 있었던 게 바로 아카샤의 뱀 때문이었는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여태 안일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판트와 에도라가 여태 말도 안 되는 공적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게, 비로소 이해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와서 후회를 한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모든 게 부질없게 되었다.

당장 무슨 수라도 써야만 했다.

연우는 재빨리 튜토리얼 랭킹을 허공에다 띄웠다.

[튜토리얼 랭킹]

1위. 에도라(64,571Point)

2위. 판트(58,774Point)

3위. 칸(57,300Point)

……

40위. 비공개(40,980Point) (본인)

……

‘1위와 남은 포인트는 2만여 점. 간격은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어.’

연우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E구획에서 증표를 최대한 많이 끌어모으고, F구획에 남아 있는 히든 피스를 모두 먹어 치운다면. 그래서 G구획에서 단기 승부로 판을 뒤집는다면?’

연우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면서 여러 가지 상황을 상정해 봤다.

하지만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어야만 했다.

‘시간이 너무 빠듯해. 끽해야 달성할 수 있는 순위는 11위. 정말 운이 좋아야 8위. 1위까지는 어림도 없어.’

연우에게는 반드시 1위를 달성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만 복수를 위한 불씨를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었으니까. 1위가 되지 못한다면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게다가 아카샤 뱀의 내단이 있어야만 계승 절차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니.

여러 가지로 계획이 헝클어지는 셈이었다.

이래서는 계획을 전면 재수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당장 연우에게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튜토리얼이 끝날 마지막 시간까지 최선을 다해 달리는 수밖에는.

결국 연우는 조금이라도 더 많이 공적치를 쌓아 보자는 생각에 장소를 벗어나고자 했다.

바로 그때.

“……뭐지, 저건?”

연우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도중에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미처 제대로 살피지 못한 반대쪽.

사체의 머리를 따라 여러 개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외부에서 두개골에 강한 충격을 준 흔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판트와 에도라가 아카샤의 뱀을 사냥하면서 낸 상처였나 싶었지만.

‘아니. 이건 분명 죽고 난 뒤에 난 상처다. 그것도 얼마 되지 않은.’

판트와 에도라 외에 연우보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였다.

‘뭔가 있어.’

연우는 직감적으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데에 관심을 둘 바에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공적치를 쌓기 위해 장소를 옮겨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 보자.’

연우는 자신의 직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전장에서는 이런 동물적인 감각이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 줄 때가 많았으니까.

팟!

연우는 땅을 박차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몸놀림.

순보를 얻은 뒤에 생긴 변화였다.

더 날렵해지고, 재빨라졌다.

[육체를 자유롭게 다루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순보’의 스킬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1.2%]

탁!

연우는 두어 번 도중에 사체의 머리를 차면서 끄트머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두개골의 정수리 부근.

덩치 큰 장정 여럿이서 커다란 도끼로 내려친 흔적이 있었다.

‘두개골에서 뭔가를 꺼내려고 했어. 뭐지? 뇌?’

연우가 알기로 아카샤의 뱀에서 가장 쓸모가 있는 건, 내단과 독샘뿐.

나머지는 크기만 컸지, 가공하기도 힘들어서 별 쓸모가 없었다.

그런데 뇌를 가져가려고 했다?

어째서?

연우는 아카샤 뱀의 두개골에 남은 발자국 크기를 보고, 뇌를 가져간 집단이 어딘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오크들이야.’

연우는 불현듯 동생이 일기장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E구획의 여러 몬스터들은 각자 환경에 맞게 서로 다른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동쪽 지역에 머무는 오크 부락은 오래전부터 돌산 지대의 주인이었던 아카샤의 뱀을 신으로 숭상하기도 했다.

E구획에는 여러 몬스터들이 무리를 이루며 살고 있다.

북쪽 늪지대에는 리자드맨이, 서쪽 밀림에는 고블린과 코볼트 무리가, 동쪽 돌산 지대에는 오크들이. 남쪽에는 주로 오우거나 트롤 같은 독립 개체들이 머물렀다.

하지만 동쪽의 돌산 지대는 오크들이 대거 머문다고 해서, 그들이 터전의 주인인 건 아니었다.

지하 깊숙한 곳, 아카샤의 뱀이 살고 있었으니까.

이따금 아카샤의 뱀이 밖으로 나와서 부락을 습격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경외하는 뜻에서 신으로 모시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크들이 뒤늦게 아카샤의 뱀이 죽은 걸 알아차리고, 뭔가를 하기 위해서 뇌를 끄집어 낸 것 같았다.

‘대체 뭘 하려는 걸까? 단순히 제사를 지내는 거라면, 여기서 하거나 자기들 부락으로 갖고 가도 될 텐데?’

녀석들의 흔적은 다른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크 부락이 있는 곳과는 정반대 방향.

‘뭔가 있어. 뭔가가!’

연우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녀석들의 흔적을 따라 몸을 세게 날렸다.

쐐애액-

오크들은 아카샤의 뱀을 지나, 폐허에서도 한참 안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황무지는 점차 까매지고, 더 크고 험준한 돌산도 많이 나타났다.

E구획을 꼼꼼하게 다녔던 동생도 미처 가지 못했던 장소.

이대로 E구획의 끄트머리에 다다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움직였을 때.

연우는 어느덧 끝도 없을 정도로 높게 선 어느 절벽을 만날 수 있었다.

‘대절벽. 여기가 E구획의 동쪽 끝이야. 그렇다면?’

연우는 용마안을 활짝 열어 절벽을 쓱 훑었다.

오크들의 흔적은 절벽 아래쪽, 여러 바위와 나무 따위로 교묘하게 가려진 어느 작은 토굴에 다 다라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거지?’

연우는 지체하지 않고 토굴에 발길을 들였다.

그 순간.

[‘아카샤의 뱀 굴’에 최초로 입장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1,000만큼 획득했습니다.]

‘뭐?’

연우는 난데없이 떠오른 메시지에 두 눈을 부릅떴다.

뱀 굴?

그것도 아카샤의 뱀이 머무는?

두근!

두근!

연우는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아카샤의 뱀이 똬리를 튼 굴은 여태껏 갈리어드도 찾지 못했던 장소였다. 그건 동생도 마찬가지였으니.

때문에 갈리어드는 매번 아카샤의 뱀을 만나기 위해서 정해진 시간만을 고집해야 했다.

하지만 굴을 찾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카샤의 뱀이 낳은 새끼나 알, 혹은 짝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오크들이 이렇게 정성스럽게 뇌를 들고 이동했다는 건, 숨겨진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못하더라도 아카샤의 뱀에 준하는 뭔가가 있겠지.

연우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토굴을 따라 안쪽으로 이동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오크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연우는 드넓은 공터를 따라, 수십에 달하는 오크들이 오와 열을 맞춰 줄 서 있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뭐지, 이건?’

둥! 둥! 두웅……!

녀석들은 북소리에 맞춰서 하나같이 경건한 자세로 절을 올리고 있었다.

마치 엄숙한 종교 제례 의식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

가장 끝에 놓인 제단에는 제물로 죽은 오크와 리자드맨 따위의 시체가 한가득 쌓여 있었고, 그보다 더 위에는 아카샤 뱀의 뇌가 담긴 쟁반이 있었다.

‘이것들, 제정신이 아니야.’

연우는 휘몰아치는 광기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다가, 몸을 최대한 바짝 낮췄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켰다가는 토굴에 영영 갇힐 것만 같았다.

그때.

쿵! 오크 샤먼이 갑자기 방울 달린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광기 젖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외쳤다.

“취이이익! 간악한 인간들에게 살해당한 우리의 신이시여! 분노를 담아 부활하시옵소서! 우리 전사의 영혼을 가져가시고, 위대한 존재로 재생해 저들을 벌하시옵소서!”

오크 샤먼은 그 말과 함께 양옆에 마련된 청동 화로에서 횃불을 꺼내 제물로 놓인 시체에다 불을 지폈다.

화르륵!

미리 기름을 뿌려 뒀던지, 거친 불길이 일어나면서 제물을 모두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괴이 현상이 벌어졌다.

츠츠츠-

보통 시체가 타면 탄내를 풍기면서 새카만 재가 되기 마련이건만.

제물들은 반대로 불길에 휩싸인 순간, 새하얀 연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기는 허공에 가득 뭉쳤다가 쟁반에 담긴 아카샤 뱀의 뇌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물을 머금는 스펀지처럼.

뇌는 빠른 속도로 연기를 흡수했다.

그럴수록 가득 쌓였던 제물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뇌도 살아 있는 것처럼 크게 꿈틀거렸다.

그 순간.

제물이 모두 사라질 때쯤, 뇌의 한쪽 면이 찢어지면서 무언가가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카아아!

“……!”

그것을 봤을 때, 연우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건 뱀이었다.

원래 연우가 알고 있던 아카샤의 뱀보다는 턱없이 작지만, 그래도 족히 3미터는 넘을 것 같은 크기를 가진 뱀.

아카샤의 새끼 뱀.

녀석이 배고프다면서 소리를 질러 댔다.

카아아아!

그때, 연우 앞으로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 / 부활 의식]

내용: 아카샤의 뱀은 원래 절반은 물질로, 절반은 영체(靈體)로 이뤄진 존재입니다. 때문에 정기(아카샤)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부활할 수 있습니다.

오크들은 현재 고대 때부터 내려오던 의식으로 죽은 아카샤의 뱀을 부활시키고자 합니다. 아카샤의 뱀이 더 커지기 전에 부활 의식을 막고, 뱀을 처치하십시오.

보상: ???

연우는 크게 눈을 떴다.

오크들의 부활 의식을 막으라는 퀘스트.

하지만 연우의 눈에는 다른 내용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한 문구만 들어왔다.

아카샤의 뱀이 부활할 수 있다는 문구.

순간, 머릿속으로 좋은 생각이 스쳤다.

연우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아카샤의 뱀을, 기존보다 훨씬 크게 키워서 내단을 빼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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