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카샤의 뱀 (5)
아카샤의 뱀은 아카샤를 먹고 자란다. 그런데 그 ‘먹는다’는 개념이 재생까지 포함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
연우는 한 줄기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건 다루기에 따라서 원래 목표로 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줄지도 몰랐다.
아카샤의 뱀이 부활에 들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덩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품고 있는 내단의 힘도 더더욱 대단해질 테니까.
그걸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연우의 눈가로 이채가 어렸다.
‘게다가 이건 퀘스트에 위배되지도 않는다.’
퀘스트는 부활 의식을 막으라고만 했지, ‘언제’까지 막으라는 제한 조건은 달지 않았다.
즉, 부활 의식이 끝나기 ‘전’에만 퀘스트를 수행하면 된다는 의미였다.
‘아카샤의 뱀을 한계까지 키웠다가 도중에 끊어 버리면 그만이지.’
더구나 아카샤의 뱀이 머무는 토굴까지 발견했다.
이 안에는 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그리고 퀘스트를 완수하고 났을 때 받게 될 보상은 무엇일까.
‘위험도가 있는 만큼 절대 작은 건 아니겠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마력과 공적치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연우는 웃음을 가까스로 꾹 눌렀다.
‘웃는 건, 퀘스트가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
연우는 재빨리 계획을 구체적으로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아카샤의 뱀이 부활하는 데 주로 쓰이는 재료는 아카샤, 즉, 정기야. 바토리의 흡혈검처럼 타인의 생명력을 갈취하면 할수록 가진 바 힘도 커지겠지. 그렇다면 훨씬 더 많은 먹잇감을 줄 필요가 있다.’
아카샤의 뱀은 갓 부활한 만큼 잔뜩 허기진 상태일 것이다.
녀석이 포만감을 넘어 과식을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먹이를 어디서 조달할 수 있을까?
운디네의 잔?
‘아니. 내가 갖고 있는 걸로는 턱도 없어. 갈리어드가 갖고 있는 운디네의 잔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고.’
갈리어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지웠다. 연우는 아카샤의 뱀을 혼자서 독차지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역시.’
연우는 마지막 남은 제물이 연기와 함께 사라지는 걸 바라봤다.
‘더 많은 제물을 끌어오는 것밖에는 없겠어.’
때마침 토굴 밖에는 아주 많은 몬스터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아카샤의 뱀에게 좋은 먹이가 될 수 있는 것들.
‘오크 부락을 건드린다면 오크 샤먼이 도중에 의식을 그만둘 수 있으니…… 더 외부에서 조달해야겠군. 아니면.’
연우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아예 이참에 판을 훨씬 더 크게 흔들어 볼까?’
각 영역을 지키고 있는 몬스터들을 이쪽으로 끌어올 수 있다면.
불씨를 당겨 E구획 전체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수 있다면.
그래서 동쪽 돌산 일대를 수많은 몬스터들이 뒤엉키는 혼란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면.
아카샤의 뱀도 그만큼 많은 먹이를 먹고 성장하지 않을까?
연우는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순보를 발동하면서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떠난 뒤에도 토굴에서는 부활 의식이 한참 이어졌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카아아!
뱀의 울음소리가 토굴을 흔들어 놓았다.
* * *
[150:43:11_56]
이제 튜토리얼이 끝날 때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튜토리얼 랭킹 6위, 베인은 이제 증표를 그만 모으고 슬슬 F구획으로 넘어갈까 고민하고 있었다.
‘5위 안에 들어야만, 탑에 들어가서라도 섬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섬.
아랑단의 플레이어들이 본거지, 청화도를 가리킬 때 쓰는 은어.
섬은 철저한 실력 위주의 사회였다. 거기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랭커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뛰어난 실적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원래 베인의 성적대로라면 5위 안에는 충분히 들 수 있는 정도였다.
아니, 운이 좋았다면 3위 안도 노릴 만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튜토리얼은 비정상적으로 강한 놈들이 너무 많았다.
판트와 에도라, 칸, 마커스 계의 검사까지.
이들을 따돌리고 5위 안에 들려니 조금씩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베인은 한 가지 명령을 받았다.
“사냥? 나더러?”
“예. 그렇습니다. 1조를 모두 소집해 이동하라는 빌드 님의 지시이십니다.”
베인은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가뜩이나 갈 길이 먼데, 암살? 그것도 10위 안에 들지도 못하는 머저리를?
그것만 하더라도 충분히 자존심이 상할 일이건만.
튜토리얼 내에서 최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1조 전원이 함께 움직이라는 조건이 덧붙었다.
베인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다른 놈들 보내. 나는 지금 순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족할 지경이다. 빌드 님께도 그렇게 전해 드리면 이해해 주실 거다.”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빌드 님의 특별 지시이십니다. 만약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목을 자르라는 명이십니다.”
베인은 인상을 잔뜩 구기면서 말을 꺼낸 전령을 노려봤다. 순간, 차가운 기세가 불었다.
그런데도 전령은 태연했다.
“‘특별’이라고?”
“예. 그러니 반드시 1조가 함께 움직이라는 당부이십니다. 또한, 놈의 목을 들고 오는 분께는 아랑단 자체에서 보유하고 있는 증표를 전부 하사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베인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젖었다.
아랑단의 증표 전부.
족히 수천 개는 될 것을 전부 한 사람에게 몰아준다고?
랭킹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패였다.
또한, 이건 빌드가 앞으로 뒤를 봐주겠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단, 2조를 전멸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니 최대한 조심하라는 첨언도 하셨습니다. 방심한 자는 묵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같이.”
베인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2조는 1조에 비해 손색이 있기는 해도, 성정이 전부 들개 같아 한꺼번에 상대하기 힘든 놈들이었다.
베인도 2조를 전부 상대하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 정도는 해야 했는데.
‘이해가 되는군. 왜 1조를 전부 동원하라고 하셨는지.’
빌드는 무엇이든지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는 걸 선호했다.
‘잠깐. 2조를 처치했다는 건, 사냥감이 놈들의 증표도 모두 갖고 있단 뜻이지 않나?’
아랑단의 증표와 2조의 증표가 전부 더해진다면.
‘5위 안에 드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니다.’
베인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들거렸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좋아. 즉시 장소로 이동하겠다고 말씀드려라.”
전령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베인은 지체할 것 없이 곧장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증표를 빼앗길 것처럼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E구획 곳곳에서 그와 비슷한 생각과 처지를 가진 플레이어 15명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곧 그들에게 닥칠 재앙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 * *
연우가 처음 이동한 곳은 돌산 지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북쪽 리자드맨 구역과 맞닿는 경계선 부근.
연우는 리자드맨 정찰병의 뒤를 은밀하게 밟으면서 녀석들의 부락을 찾았다.
[‘순보’의 스킬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7.1%]
순보는 연우에게 너무 잘 맞는 스킬이었다. 그가 머릿속으로 구상했던 다채로운 동작들을 전부 풀어낼 수 있었으니.
그만큼 순보의 숙련도는 가파른 속도로 상승했다.
덕분에 연우는 리자드맨의 이목을 피해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 대막사에 숨어들 수 있었다.
안쪽에는 족장으로 보이는 덩치 큰 리자드맨이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 왕, 죽은 것, 알려져서는 안 된다. 특히, 오크들, 알게 되면 바로 덤빈다. 단단히, 주의해라.”
“알겠다!”
“알겠다!”
리자드맨 워리어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사불란하게 대막사를 빠져나갔다.
“골치, 아프다.”
덩치 큰 리자드맨은 자리에 앉더니 차가운 어투로 중얼거렸다.
‘하르간이 죽은 것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나 보군.’
연우는 고심에 잠긴 리자드맨의 타이틀을 재빨리 확인했다.
[리자드맨 21족장 크라락]
아무래도 그런대로 적절한 타이밍에 찾아온 것 같았다.
현재 리자드맨은 그들을 총괄할 만한 왕이 죽고 없는 상황. 거기다 제일가는 전사였던 타라간도 죽고 말았으니.
녀석들로서는 구심점이 증발해 버린 셈이다.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에 타 종족과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영역이 그대로 밀려 버리고 말 테니까.
어떻게든 경계를 철저하게 하고, 입단속을 해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더 잘되었어.’
하지만 연우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애초 그가 바라던 것이, 각 몬스터들의 혼란이었으니까. 이때를 잘 이용하면 이간질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팟!
그래서 연우는 지체하지 않고 크라락에게 달려들었다.
“헛! 자객이…… 컥!”
크라락이 뒤늦게 연우의 기척을 읽고 옆에 놔뒀던 시미터로 손을 뻗었지만.
퍼억!
이미 그전에 카르슈나의 단검이 녀석의 미간에 꽂히고 말았다.
크라락이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리자드맨을 대표하는 25개 부족장 중 한 명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허망한 최후.
연우는 크라락의 시체 옆에다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잡았던 오크 시체를 같이 던져 뒀다.
그리고 주변 집기도 두어 개 정도 적당하게 부숴 놨다.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크라락이 암살을 시도한 오크 자객을 상대로 싸우다 같이 죽은 줄로만 알 것이다.
‘그리고 피해는 더 크면 클수록 효과도 좋지.’
연우는 손을 활짝 펼쳐 열화 스킬을 발동시켰다.
화르륵!
손바닥 위로 불꽃이 치솟았다.
아직 스킬 숙련도가 부족해 크기는 작지만, 그래도 불을 지피기엔 충분했다.
연우는 시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다 불꽃을 던졌다.
스킬로 만들어진 불길답게 쉽게 꺼지지 않고, 단숨에 옆으로 번지면서 대막사를 덮기 시작했다.
“불! 불이다아!”
“족장! 크라락 족장, 이상하다!”
곧 리자드맨 21부족은 혼란에 잠기고 말았다.
연우는 그걸 보면서 유유히 빠져나와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밤새 방문할 곳이 많았다.
* * *
늪지대를 따라 혼란이 가득 퍼졌다.
가뜩이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왕과 왕비가 죽어 바짝 긴장해 있던 상황이었건만.
족장이나 그에 준하는 전사들이 자꾸 죽어 나가니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같이 오크 자객이 있거나, 관련이 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알았을 때.
분노와 위기감이 극에 달했다.
“오크가 우리 왕과 왕비를 죽였다! 오크가 우리 영역 침범하려 한다! 오크들이 곧 쳐들어온다!”
누군가가 외친 한 마디는 리자드맨들을 모두 준동시켰다.
“놈들이 오기 전에 싸운다! 전쟁이다! 복수한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북쪽 늪지대가 흔들렸다.
리자드맨 수천 마리로 이뤄진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쪽 돌산 지대를 향해.
그사이.
연우는 서쪽 밀림 지대로 이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