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아카샤의 뱀 (8)
남자 아이는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귀여운 인상.
왜 이런 동굴에 있나 싶다.
하지만 정작 연우가 놀란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인형설삼이라니. 하!’
남자 아이는 진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형상을 띤 영약이었다.
[인형설삼]
분류: 영약 혹은 영물
등급: A+
설명: 달의 정기에 수백 년간 노출된 빙정에서만 자란다는 삼. 어린아이의 형상을 띠고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섭취했을 경우, 마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단, 상승하는 마력의 양은 소화시킬 수 있는 양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섭취하는 방법도 아주 까다롭다.
인형(人形), 그냥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을, 설삼(雪蔘), 눈 속에서 자라는 삼.
게다가 인형설삼은 원래 영약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희귀한 것이었다.
‘효력도 좋아서 분명 영약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고 들었는데. 그게 이런 곳에 있을 줄이야.’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아카샤의 뱀이 여기에 터를 잡은 이유도 이해가 가.’
아카샤의 뱀은 아마 인형설삼을 양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크기로 봤을 때, 인형설삼이 묵은 기간은 대략 300년.
연우가 알기로 인형설삼의 효과가 가장 좋을 때가 500년 내외였다. 아카샤의 뱀도 그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겠지.
‘미안하게도, 이제 내 뱃속에 들어가겠지만.’
연우는 허리춤에서 카르슈나의 단검 대신에 대검 세 자루를 천천히 꺼냈다.
인형설삼은 귀한 영약이니만큼 잡는 방법이 아주 까다로웠다.
연우가 천천이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번쩍!
잠들었던 인형설삼이 눈을 뜨고.
팟!
연우가 즉시 손에 쥐고 있던 대검을 던졌다.
키아악! 인형설삼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면서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머리가 단번에 천장까지 닿았다.
영약 중에는 간혹 영약인지 영물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 녀석들이 있었다.
다른 말로는 주인을 가린다고도 하는데…… 처음에는 그렇겠거니 하고 여겼었는데, 막상 경험해 보니 보는 내내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움직이는 내내 아까운 영기(靈氣)만 흘러 대니, 원.
동생도 인형설삼과 비슷한 영약을 먹은 적이 있었다.
다만, 움직인다는 걸 알지 못하고, 미리 잡아 두지 못해 손해를 본 케이스였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활성화된 감각이 인형설삼의 움직임을 빠르게 쫓았다.
‘이런 공동에서 도망쳐 봤자 거기서 거기지.’
연우는 우측 방향으로 손에 쥐고 있던 대검 세 자루를 세게 던졌다.
쉭!
하지만 녀석은 가소롭다는 듯 더 잽싸게 피했다.
때문에 대검 세 자루가 천장에 그대로 꽂혔다.
우르르!
천장에 맺힌 얼음이 살짝 떨렸다. 땅에 착지한 인형설삼이 이제 어떻게 할 거냐며 다시 괴성을 질러 댔다.
귀여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
“미안하지만.”
……?
“너 같은 놈을 한두 번 사냥한 게 아니라서.”
인형설삼이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쩌거걱!
갑자기 얼음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천장이 아래로 무너졌다. 고드름과 얼음 조각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인형설삼이 화들짝 놀라 다시 몸을 날렸다. 무너지는 천장 사이로 민첩하게 빠져나오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드름과 얼음 조각을 뚫고 나오는 순간.
“잡았다.”
……!
이미 대기하고 있던 연우가 차갑게 웃으면서 손을 뻗어 인형설삼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인형설삼이 아등바등거렸다.
차가운 기운이 휘몰아치면서 연우의 손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연우는 개의치 않았다. 얼굴을 가져가 인형설삼의 오른쪽 머리를 씹었다.
와그작!
남자 아이의 머리와 눈이 통째로 뜯겨나간 것 같은 끔찍한 모습. 그래도 연우는 녀석을 묵묵히 먹어치웠다.
딱딱한 얼음을 씹은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이가 시렸다. 손은 이미 동상에 걸렸다. 근육이 부르트고, 뼛속이 울렸다.
그렇게 손에 잡힌 녀석을 발끝까지, 손에 묻은 흔적까지 혓바닥으로 핥으면서 꼼꼼하게 먹은 순간.
쏴아아!
아래쪽 배에서 뭔가가 폭발했다.
처음 회중시계를 열었을 때. 마나가 체내에 자리 잡았을 때와 비슷한 감각. 혹은 육체가 강화골을 이뤘을 때 마력이 움직였던 것과 같은 감각.
하지만 양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히든 피스 ‘인형설삼’을 섭취하셨습니다.]
[영기가 체내에서 폭발합니다. 마력으로 성질 변환이 이뤄집니다.]
대기 중에 떠다니는 마나나 영물이 품고 있는 영기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자신의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흡수하고, 가공하고, 안착을 시켜야만 비로소 마력(魔力)이 된다.
당연히 인형설삼의 영기도 가공하는 단계에서 상당량이 손실될 수밖에 없지만.
‘그것까지 놓칠 수 없지.’
연우는 외부로 확장했던 모든 감각을 거둬 체내로 집중시켰다.
마력이 빠른 속도로 순환하고 있었다.
[미숙한 용체의 특성이 적용됩니다.]
[인형설삼이 보유하고 있던 영기 중 92%가 마력으로 치환됩니다. 육체가 마력을 고스란히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마력이 5만큼 올랐습니다.]
[마력이 7만큼 올랐습니다.]
……
[육체의 성장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릇이 단단해졌습니다. 중단되었던 계승 작업이 다시 재기됩니다. 22…… 24, 27%…….]
[현재 작업량: 42.9%]
[상태가 ‘미숙한 용체’에서 ‘반룡체(半龍體)’로 변경되었습니다.]
여태껏 연우에게 가장 부족했던 마력 계수가 빠른 속도로 차오르고, 계승 작업도 거의 절반 가까이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계승 작업의 절반을 이뤘습니다. 어느 정도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마력이 일정한 순환로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효율적인 관리 및 발동이 가능해졌습니다.]
[스킬 ‘마력회로’가 생성되었습니다.]
연우는 ‘마력이 체내를 돌아다닌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뜻대로 제어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전에는 손톱이나 발톱처럼 다루기 힘든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손가락이나 발가락처럼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자기 할 일만 마치고 나면 바로 사라졌던 것과 다르게, 지금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활발하게 체내를 돌고 있었다.
원래 이곳이 자신의 집이었던 것처럼.
[마력회로]
등급: C
숙련도: 0.0%
설명: 용은 태곳적부터 마나의 축복을 받은 종족. 그런 용에게서 축복을 받은 자에게는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양도 많아지며, 제어 범위도 넓어져 많은 일들이 가능해진다. 때에 따라서는 마나 스트림을 다루는 것도 가능해진다고 한다.
‘됐다!’
연우는 마력회로 스킬의 내용을 살펴보고 쾌재를 외쳤다.
튜토리얼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줄곧 다루고 싶어 했지만, 도저히 다뤄지지 않았던 스탯, 마력.
그래서 마력에 대한 공부를 해 보기도 했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았었는데.
드디어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단초를 얻은 것이다.
‘역시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비밀은 더 많은 마력을 쌓아서, 계승 작업 속도를 올리는 것이었어.’
연우는 드디어 마력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눈을 반짝거렸다.
당장 마력이 쓰이는 분야는 스킬 발동밖에는 없었지만, 앞으로는 많은 일들이 가능해질 수 있었다.
마력을 무기에 실어 타격력을 높인다거나, 발에 마력을 감아 이동 속도를 올린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사용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마력회로의 숙련도가 아직 낮기 때문에 원활한 제어는 힘들었다.
하지만 연우는 감각 강화가 있는 한 이마저도 순보처럼 금세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력을 움직이는 것도, 결국에는 감각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
연우는 체내를 한 차례 살피고, 다시 눈을 떴다.
번쩍!
인형설삼이 처음 눈을 떴을 때처럼 연우의 눈가에도 비슷한 광망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입가에 잔뜩 미소가 걸렸다.
단단하고 넓은 그릇에 내용물이 찬 느낌.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아직도 부족해.’
하지만 내용물을 어느 정도 담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연우는 더더욱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담은 양은 아직도 한참 부족했다.
더 많이.
자신이 가진 그릇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컸다.
연우는 혓바닥으로 가볍게 마른 입술을 축였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아카샤 뱀의 내단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 * *
연우는 뱀 굴을 나서기 직전, 혹시 뭔가 빠진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인형설삼이 있던 자리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이건?”
그건 작은 팬던트였다.
손때가 많이 묻어 있어 상당히 낡아 보이는 팬던트.
아티팩트로는 보이지 않았다.
[추억이 담긴 목걸이]
종류: 펜던트
등급: F-
설명: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목걸이다. 애타게 찾는 주인에게 되돌려주면 좋을 듯하다.
‘주인?’
연우는 설명창을 보다가 도중에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펜던트를 자세히 매만졌다. 녹이 슬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중간에 이음새가 있었다.
녹을 제거하고 이음새를 활짝 열었다.
그러자 안쪽에 숨어 있던 사진이 드러났다.
부모와 딸이 화목하게 웃고 있는 사진.
특히 아버지 쪽의 얼굴이 익숙했다.
갈리어드.
“찾고 있다는 게, 이거였구나.”
연우는 작게 침음을 흘렸다.
갈리어드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카샤의 뱀을 쫓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직접 사냥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사냥꾼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을 내리면서 보상으로 자신의 기술을 내줬었는데.
만약 이유가 가족의 추억이 담긴 물품이라면 이해가 갔다.
‘일기장에는 분명…… 가족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니까.’
연우는 펜던트를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돌아가는 길이니 돌려주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몸을 뱀 굴 입구 쪽으로 돌렸다.
마력회로를 따라 마력이 힘차게 돌아다니고, 육체에는 활력이 넘쳤다.
컨디션이 다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이제 사냥하러 가 볼까?”
연우는 하얀 가면을 똑바로 썼나 다시 한 번 매만지면서.
팟!
밖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