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1화 (41/862)

16화. 아카샤의 뱀 (9)

“조금만, 더…… 조금만……!”

몬스터 러쉬가 짓밟고 지나간 자리.

숲도 대지도 허물어지다시피 한 곳 위로. 한 플레이어가 억지로 몸을 이끌면서 움직였다.

베인이었다.

“조금만 더……!”

베인은 한쪽만 남은 팔로 어깨를 부여잡은 채, 억지로 발을 움직였다.

오로지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일념만 가지고서.

그는 고블린 왕의 습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여태 죽은 척하고 있다가 몬스터 러쉬가 끝난 뒤에나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그냥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만큼 몬스터 러쉬가 준 충격은 아주 컸으니까.

날고 긴다던 1조는 흔적조차 없이 증발해 버렸고, 고블린 왕이 뿜어내던 투기는 그를 바짝 얼어붙게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임무를 좇고자 했다.

오로지 단 한 가지 생각 때문에.

‘몬스터들이 가고 있는 방향은 분명히 카인이라는 놈이 있는 쪽이다. 놈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가 알기로, 몬스터 러쉬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이벤트였다.

그렇다는 건, 분명히 뒤에 뭔가가 숨겨져 있다는 뜻.

베인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목표인 ‘카인’이라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유추했다.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빌드가 경계할 정도의 플레이어라면 이런 일에 연루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분명 히든 피스야. 그것도 여태 튜토리얼에서 발견되었던 다른 것들과는 절대 비교도 할 수 없는……!’

카인이 무엇을 꾸미고 있든 간에, 녀석이 히든 피스를 얻고 방심한 틈을 타서 기습해 히든 피스를 빼앗는다.

그런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리고 뒤에 있을 보상까지 합친다면, 판트와 에도라를 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카인!’

베인의 눈동자 위로 탐욕이 일렁거렸다.

* * *

고블린 왕과 오크 왕이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한창 전쟁이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쿠쿠쿠!

어느새부턴가 대지가 미약하게 떨렸다.

고블린 왕과 오크 왕, 둘 모두 타고난 감각으로 땅이 떨린다는 사실은 눈치를 챘다.

하지만 자칫 한눈을 팔다가는 목이 달아날 것 같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커다란 재앙을 부르고 말았다.

콰콰콰-

몬스터들과 오크들이 한창 부딪치던 전장 한가운데가 내려앉는가 싶더니.

콰아앙!

갑자기 뭔가가 위로 솟구쳤다.

어마어마한 몸집을 자랑하는 뱀.

녀석은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리며 세넷 정도 되는 몬스터를 입에 물고 있었다.

10미터에 가까운 덩치가 허공에 수직으로 치솟으니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낳았다.

“저, 저건 뭔가! 이상한 괴물!”

“취, 취익! 신이 왜 이런 장소에!”

몬스터들이 당황해하며 아카샤의 뱀을 올려다보는 순간.

콰직!

아카샤의 뱀은 입에 물고 있던 몬스터들을 한입에 삼켜 버리고, 대가리를 돌리면서 아래쪽을 바라봤다.

눈 아래.

먹잇감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녀석의 눈에 이곳은 만찬회장이나 다름없었다.

카아아!

아카샤의 뱀은 가장 가까이 있던 코볼트 무리에 대가리를 처박았다.

얼마나 빠른지 도저히 육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방금 전까지 가장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코볼트 무리를 이끌던 코볼트 왕이 잡아먹히고 말았다.

“와, 왕!”

“왕이 죽었다! 왕의 복수!”

코볼트 무리는 눈에 불을 켜면서 아카샤의 뱀에 달려들었다.

그들로서는 왕을 죽인 원수를 절대 살려 둘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코볼트 무리의 공격은 너무 허망하게 비늘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도끼는 부러져 허공으로 튀고, 화살은 비늘을 타고 미끄러졌다.

도리어 아카샤의 뱀은 귀찮다는 듯 꼬리를 거세게 흔들어 코볼트 무리를 쳐내 버렸다.

덕분에 코볼트 수십 마리가 피 떡이 되어 날아갔다.

녀석들이 죽으면서 새어 나온 생명력은 모두 아카샤 뱀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 덩치를 키웠다.

어느새 12미터는 될 것 같은 크기. 비대해진 덩치만큼이나 포악성도 더 커지고 말았다.

몬스터들은 종족을 가릴 것 없이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죽은 몬스터에게서도 생명력을 갈취하는 몬스터라니! 이런 게 있다는 말은 전혀 듣지도 못했다.

게다가 아카샤의 뱀이 내뿜는 포식자의 기세는 녀석들의 발을 얼어붙게 만들었으니.

몬스터들은 한평생 먹이 사슬 정점에서 살아왔던 존재.

그런데 새로운 천적과 마주치고 말았다.

당연히 천적이 주는 공포는 그들에게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립된 사고 패턴이 전혀 없었다.

결국 그런 점이.

콰콰콰!

재앙을 낳고 말았다.

“피, 피해라!”

“신이 엄벌을 내린다! 취익! 모두 엄벌을 피해라, 취이익!”

몬스터들은 아카샤의 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전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용감한 몇몇 종족들은 밀집 대형을 갖추면서 저항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선택을 내리더라도, 결과는 단 하나였다.

먹잇감.

도망치면 바로 낚아채 삼킨다. 저항하면 압도적인 덩치로 찍어 눌러 삼킨다.

이러나저러나 아카샤 뱀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희생자가 많아질수록 아카샤의 뱀도 비례해서 계속 무럭무럭 자라났다.

덕분에 더 압도적으로 몬스터들을 쓸어 낼 수 있었다.

아비규환이 닥쳤다.

지옥도가 펼쳐졌다.

어떻게 전장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수만 마리가 한데 뒤엉켜 있다 보니 도망치기도 쉽지 않았다.

“제길!”

고블린 왕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오크 왕을 세게 뒤로 밀어내면서 몸을 아카샤의 뱀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크라눔! 어디 가나, 취익! 전사의 승부, 겨뤄야 한다!”

“닥쳐라, 파락! 나는 그깟 명예보다 종족의 안위, 더 중요하다!”

고블린 왕은 뒤를 노릴 거면 노리라는 듯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오크 왕은 인상을 구기면서 고블린 왕을 노려봤다.

자신과 고블린 왕은 각각 숲의 동쪽과 서쪽을 지키던 최고 전사들.

당연히 승부를 겨룰 날만 애타게 꼽았고, 지금이 그때라고 여겼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승부나 명예보다 종족의 안위가 중요하다는 말.

비록 적이었지만,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결국 오크 왕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모든 오크, 신을 진정시켜라! 취이익!”

신을 공격하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신은 죽어도 부활할 수 있으니, 일단 죽이자는 명령부터 내렸다.

결국 두 왕의 주도 아래, 모든 몬스터들이 연합했다. 다시 전의를 불태우면서 다 같이 아카샤의 뱀을 노렸다

하지만 이미 아카샤의 뱀은 어느새 원래의 덩치를 거의 되찾은 상태였다.

녀석을 돌산만 한 머리통을 크게 부풀렸다.

감히 자신에게 덤비는 미물들이다. 징벌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아가리를 쩍 벌리면서, 독액으로 가득한 브레스(Breath)를 사방으로 뿌렸다.

전열에 있던 몬스터들이 대거 쓸려 나갔다.

시신은 찾아볼 수도 없이 녹아 버렸고, 위로 튄 독액에 감염된 몬스터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때 고블린 왕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죽어라아아앗!”

고블린 왕은 두 개의 핼버드를 높이 들었다가 힘차게 아카샤 뱀의 머리통을 향해 세게 내리찍었다.

크아아!

아카샤의 뱀이 고통에 울부짖으면서 떨어지라고 발버둥 쳤지만, 고블린 왕은 더 깊게 핼버드를 쑤셔 넣었다.

그사이 밑에서는 오크 왕이 칼을 거세게 고쳐 쥐면서 몸집에다 깊숙하게 박아 넣었다.

촤아아악!

피가 튀었다.

아카샤의 뱀이 입을 벌렸다. 독액이 섞인 브레스가 다시 쏟아지며 두 왕을 노렸다.

* * *

‘난장판이군.’

연우는 엉망이 되다시피 한 전장을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E구획 내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을 도발한 만큼, 효과가 아주 클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지만.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효과가 큰데?’

벌써 몬스터 숫자는 처음에 비해 10% 밖에 남지 않은 상태.

덕분에 아카샤의 뱀은 원래 갖춰야 할 모습보다 1.5배가량 커져 있었다.

태산처럼 우람하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크다.

저런 무지막지한 걸 어떻게 잡아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나마 두 왕이 선봉에 서서 아카샤의 뱀을 몰아붙이고, 남은 몬스터들이 자잘한 공격을 퍼부어 착실하게 체력을 깎아 내고는 있다지만.

글쎄?

‘저것도 얼마 가지 못하겠지.’

딱 봐도 보였다.

강하기로는 타라간과 비슷하다는 고블린 왕과 오크 왕, 둘 모두 너무 지쳐 있는 것이.

종족들이 보고 있어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체력은 절대 무한하지 않다.

고블린 왕은 이미 한쪽 팔이 날아가고 없고, 오른쪽 얼굴은 독액으로 녹아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저런 눈으로 제대로 앞이나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오크 왕은 상태가 더 심각했다.

꼬리로 얻어맞기라도 했는지, 전신에 타박상이 가득했다. 군데군데 울혈이 맺힌 게 늑골이며 척추까지 죄다 박살 난 게 틀림없었다.

왕이라는 이유로 버티고는 있지만,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리고.

지친 건 아카샤의 뱀도 마찬가지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을 먹었으니까. 과식은 몸에 좋지 않은 법이지.’

아카샤의 뱀은 부활 의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몸으로 수만 마리나 되는 몬스터들을 잡아먹었고, 원래의 덩치보다 훨씬 커지고 말았다.

과연 육체가 버틸 수나 있을까?

아카샤의 뱀이 제아무리 절반은 영체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나머지 절반은 엄연히 물질세계에 기반을 둔다.

즉, 먹은 영양분을 충분히 소화하고 적응할 만한 기간이 필요하다는 뜻.

하지만 아카샤의 뱀은 그런 과정도 없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생명력을 섭취했다. 탈이 나지 않으면 이상했다.

그런데도 놈은 본능이 앞선 나머지 계속 몬스터들을 잡아먹는다. 거기다 두 왕이 착실하게 체력까지 깎아 놓았으니.

결국 몬스터 진영과 아카샤의 뱀, 어느 것 하나 할 것 없이 모두 연우의 손바닥 위에 놀아난 셈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이제 마지막을 장식할 때라고 여겼다.

우우웅-

마력회로를 가동시켜, 마력을 발 쪽으로 끄집어 내렸다.

[‘마력회로’의 스킬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0.7%]

[‘순보’의 스킬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12.4%]

쾅!

쐐애액-

지반이 그대로 내려앉는다 싶더니 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아카샤 뱀의 정수리 위.

오크들이 뇌를 끄집어내고, 고블린 왕도 핼버드를 박은 적이 있던 자리로 올라타면서.

“삼켜라.”

왼손을 활짝 펼쳐 상처에다 갖다 댔다.

톱니 이빨이 훤히 드러나 놈의 머리통에 박혔다.

카아아아!

아카샤의 뱀은 머리가 통째로 뽑히는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꼬리가 마구잡이로 몬스터들을 쓸어 내고,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몬스터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뒤로 물러서기 바빴다.

하지만 연우는 악착같이 달라붙어 톱니 이빨을 더 깊게 쑤셔 넣었다.

‘바토리의 흡혈검이 있다고 해도 이놈을 완전히 잡지 못해. 그렇다면 먼저 목숨부터 끊어 놓는다!’

다행히 연우는 아카샤 뱀의 가장 큰 약점을 알고 있었다.

뇌.

녀석의 영혼이 자리 잡아, 가만히 두면 부활도 가능한 곳.

크아아!

톱니 이빨을 따라 뇌수가 송두리째 빨려 들어왔다. 연우는 녀석의 뇌가 완전히 쪼그라들 때까지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바토리의 흡혈검’의 스킬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6.4%]

[‘바토리의 흡혈검’의 스킬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8.2%]

……

[힘이 3만큼 올랐습니다.]

[체력이 2만큼 올랐습니다.]

[마력이 5만큼 올랐습니다.]

……

녀석의 덩치가 덩치다 보니 망막을 채우는 메시지도 끝없이 자꾸 위로 올라갔다.

그러다 어느샌가 ‘굵직한’ 뭔가가 흡수되는 느낌을 받았다.

영혼.

혹은 정수.

아카샤 뱀의 근원이 되는 어떤 것이었다.

녀석의 눈에서 이지가 사라진 것도 바로 그때였다.

쿵!

거대한 머리가 힘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보스 몬스터, ‘아카샤의 뱀’을 처치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히든 퀘스트(부활 의식)을 달성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만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서든 퀘스트(몬스터 러쉬)를 달성…….]

……

아카샤의 뱀은 난이도가 난이도인 만큼 여태 얻었던 공적치 중에서 가장 큰 공적치를 제공했다.

순위를 몇 단계나 단번에 뒤집어 버릴 수 있을 만큼.

게다가 아카샤의 뱀이 부활하면서 생성되었던 서든 퀘스트도 같이 해결한 것으로 처리되었으니.

단번에 두 가지 일을 해결해 버린 셈이었다.

더구나 아카샤의 뱀은 연우가 튜토리얼에 들어오기 전부터 계속 노렸던 목표.

도중에 우여곡절도 몇 번씩 있었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했다는 기쁨이 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카르슈나의 단검을 꺼냈다.

기쁨은 튜토리얼이 끝난 뒤에 만끽해도 충분했으니까. 퀘스트 보상으로 주어진 것도 그 뒤에 확인할 생각이었다.

스걱!

목덜미 아래쪽을 깊게 가르자, 사람 머리만 한 크기를 가진 황금색 구슬이 나타났다.

아카샤 뱀의 내단.

원래 내단은 주먹만 한 크기였지만, 지금 내단은 녀석이 과식을 하면서 커진 상태였다.

싱긋!

연우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먹어라.”

여전히 먹을 걸 내놓으라며 소리를 질러 대는 톱니 이빨을 안 쪽으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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