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44화 (44/862)

19화. 두 개의 심장 (2)

하지만 잠시 후.

연우가 기대했던 건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귀속시킬 수 있는 유령에는 한계가 있었다.

[귀속된 망령의 수: 150]

‘일단은 150마리라는 건가? 아니면 이게 한계라는 걸까?’

연우는 아마 전자라고 생각했다.

유령을 계속 잡다 보니 언제부턴가 꽉 찬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 그릇은 아주 넓은 데 반해서, 내부에 칸이 구분되어 있어 아직 수용할 수 있는 데 한계가 있는 느낌.

아마 조금씩 수용 너비가 넓어지거나, 아니면 봉인된 옵션을 해제해야만 수용할 수 있는 정도가 늘어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해도 실망하지는 않았다.

‘이걸로도 충분해.’

폭발의 위력을 키우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연우는 용마안을 천천히 거뒀다.

유령들은 검은 팔찌에 귀속될까 봐 두려운지 어느새 연우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떨어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저들끼리 단단히 뭉쳐서 꼬리처럼 따라 붙어 다녔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죽은 몬스터들의 영혼이 따라다니나?’

연우는 갈리어드가 있는 쪽을 돌아봤지만 그런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유령만 볼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자신에게만 이런 특징이 생긴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유령들이 물리적으로 자신을 방해하거나 저주를 씌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면 그냥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 다음에는.’

연우는 다음 차례로 몬스터 러쉬의 보상을 확인했다.

‘분명 퀘스트창에 제시된 건 총 4개였는데.’

보상 받기를 누르니 차례대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상으로 칭호 ‘괴물사냥꾼’을 획득했습니다.]

[힘이 10만큼 증가했습니다.]

[민첩이 15만큼 증가했습니다.]

[보상으로 ‘고블린 왕의 눈’을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몬스터의 5색 보석’을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칭호 한 개와 아티팩트 두 개.

연우는 재빨리 칭호를 확인했다.

[칭호: 괴물사냥꾼]

수많은 몬스터들을 재앙으로 몰아넣은 플레이어에게 수여되는 칭호. 몬스터들을 사냥할 때 보다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단, 수여자에게 죽은 몬스터들은 죽은 뒤에도 원혼이 되어서 저주를 내린다고 한다.

효과: 힘 +10. 민첩 +15. 몬스터들을 사냥할 때마다 치명적인 공격이 터질 확률이 15%만큼 높아진다. 그리고 몬스터들을 도발하는 힘이 커진다.

‘이거 때문이었군.’

연우는 왜 저렇게 많은 유령들이 여태 따라다녔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칭호에 이런 옵션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뛰어난 효과를 주는 대신에 어쩔 수 없이 받아야만 하는 제약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쓰지 않을 이유는 없었으니 그대로 뒀다.

그 다음에는 아티팩트 두 개를 확인했다.

둘 모두 보석류였다.

하나는 몬스터의 눈이었다. 갓 도려낸 것처럼 시뻘건 핏대가 잔뜩 서서 동공이 연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손바닥만 한 크기에 보는 각도에 따라서 서로 다른 색깔로 반짝이는 신기한 보석이었다.

[고블린 왕의 눈]

분류: 보석. 아뮬렛.

등급: B-

설명: 고블린 왕, 크라눔은 죽으면서까지 자신을 죽인 원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남겼다. 단순히 착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크라눔의 원한에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좋지 않은 일을 당할 수 있지만, 이것을 다룰 수만 있다면 좋은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

* 고블린 왕의 원수

크라눔의 눈은 죽어서도 언제나 원수를 찾아 움직인다. 그리고 원수가 다른 적에게 당하지 않도록 상시로 용맹과 원한을 발산한다.

소유자는 크라눔의 영향을 받아 짙은 패기를 발산하며, 공격력이 10%만큼 상승하게 된다.

그리고 소유자를 지키고자 외부로부터의 저주나 중독 같은 보이지 않는 공격을 주시해 15%만큼 예방한다.

[몬스터의 5색 보석]

분류: 보석

등급: C+

설명: 고블린, 코볼트, 놀, 리자드맨, 오크 등 5종류의 몬스터들의 원한이 뭉치면서 탄생한 보석.

각 몬스터들이 가진 능력을 일부 가져와 사용할 수 있게 된다.

* 고블린의 발

보다 빠른 발을 가지게 된다.

* 코볼트의 귀

보다 작은 소리를 듣게 된다.

* 놀의 코

보다 예민하게 냄새를 맡게 된다.

* 리자드맨의 눈

보다 먼 곳을 보게 된다.

* 오크의 손

보다 강한 힘을 갖게 된다.

‘손에 들어온 게 죄다 이런 것들이라니.’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몬스터 러쉬가 놈들에게 준 충격이 아주 큰 모양이었다.

남긴 보상들이 죄다 이런 것이라니. 원한이니 원망이니 하는 표현이 빠지지를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런 원한과 원망을 이용한 옵션이 대부분이었으니. 대부분 연우에게 잘 맞는 것들이었다.

고블린 왕의 눈은 사실상 유니크를 제외하면, 튜토리얼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아티팩트였다.

등급 B-.

탑에서 본격적으로 구할 수 있는 아티팩트의 최하 등급이 C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주 높은 수준인 것이다.

게다가 공격력을 높여 주고, 저주와 중독으로부터 소유자를 지켜 준다고 한다.

연우가 미처 감각으로도 파악하지 못한 공격들, 특히 원거리로부터 방비가 되는 것이다.

특히 고블린 왕의 눈이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자체적으로 내뿜는 원한이었다.

‘이건 검은 팔찌와 너무 잘 어울려.’

당연한 말이지만, 원한이나 저주 계통은 암흑 속성을 강화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다.

공격력을 더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5색 보석도 마찬가지.’

일일이 옵션을 해제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감각을 강화시킨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눈, 귀, 코는 감각 강화 스킬을 보조하는 역할을, 손과 발은 순보를 강화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전부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한 것 들 같군.’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실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탑의 시스템은 보상을 정할 때, 되도록 플레이어에게 잘 어울릴 만한 것들을 주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업적이 크면 클수록 그런 경향은 더더욱 커졌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특성을 강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확인이 끝났다.

연우는 보상으로 받은 것들을 챙기고, 모옥으로 다시 움직였다.

* * *

“음? 쇠사슬?”

“예. 뭔가를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는 거면 됩니다.”

갈리어드는 갑작스런 연우의 부탁에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다가, 피식 웃었다.

“보상으로 보석이나 룬 같은 걸 얻었나 보군.”

“비슷합니다.”

“나도 대장장이 기술을 갖고 있으니 원한다면 아티팩트 제작을 도와줄 수 있겠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들이 흔히 보상으로 보석이나 룬을 원하는 이유는 휴대하기 간편하고, 갖고 있는 아티팩트에 결합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몸에 착용하는 번거로움을 줄이면서도 하나를 더 구비하고 다니는 효과를 갖게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결합을 위해서는 야금술 혹은 연금술 스킬을 가진 대장장이를 필요로 한다.

그것도 스킬 숙련도가 높은 대장장이를.

숙련도가 높을수록 제작 과정에서의 손실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으니까.

실력이 낮은 대장장이에게 맡겼다가는 옵션에 손실이 생기거나, 최악에는 보석과 아티팩트가 동시에 파손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갈리어드라는 실력 좋은 자를 만났음에도 당장 보석을 아티팩트에 결합시킬 수 없었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결국에는 쇠사슬 같은 걸 사용해서 목걸이나 팔찌 형태로 만들어 갖고 다니는 임시방편을 써야만 했다.

“그런 것이라면……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게.”

갈리어드는 창고로 들어가더니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를 들고 나왔다.

흔히 볼 수 있는 쇠사슬로 만들어진 목걸이.

다만, 중앙에 뭔가를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도록 가시 같은 것들이 돌출되어 있었다.

“받게.”

연우는 갈리어드가 건네는 쇠목걸이를 받았다.

“그거라면 하나 정도는 고정시킬 수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사례를 하겠다는 말에 갈리어드는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창고에 썩히던 물건이다. 그냥 써. 그리고 내가 너에게 받은 선물에 비하면 그쯤이야.”

연우는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고블린 왕의 눈을 쇠목걸이에 고정시켰다.

딸칵!

신기하게도 크기가 딱 알맞았다.

화아아-

목걸이에 결합되었다는 표식으로 붉은 광채가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연우는 팬던트를 목에다 걸었다.

순간, 중앙에 고정된 눈알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데구르르 굴렀다. 연우를 찾으려는 것 같았다.

갈리어드는 익숙한 눈동자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크라눔의 눈알이로군.”

“예.”

“그놈이 똑똑하고 강한 만큼 원수는 절대 안 잊는 편이긴 하지. 그래도 죽고 나서까지 저러는 건 처음 봐.”

연우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몬스터의 5색 보석은 작은 쇠사슬로 혁대에다 살짝 걸었다.

‘탑에 가면 바로 거기부터 찾아 가야겠어.’

연우는 가방 안에 수북하게 담겨 있는 몬스터의 부위들을 떠올리면서 다시 갈리어드를 돌아봤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떠나려는가?”

“예.”

“F구획으로 바로 넘어가겠군.”

연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기서 얻을 수 있을 건 다 얻었을 테니. 그게 맞겠지.”

갈리어드는 묘한 눈길로 연우를 바라봤다.

순보를 정확하게 꿰뚫어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평범함과는 궤를 달리 하는 놈인 듯했다.

마치 옛날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갈리어드는 귀신의 얼굴처럼 하얗게 빛나는 가면 속의 눈을 보면서 잠시 의문을 가졌다.

‘대체, 이 아이는 어떤 과거를 지닌 걸까?’

운디네의 신수로 몸을 치료해 줄 때에 잠시 가면을 벗기려고 했지만, 떨어지질 않았었지.

아티팩트의 옵션인 것 같았다.

하지만 갈리어드는 굳이 왜 그런 가면을 쓰고 다니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자면 계속 튜토리얼만 반복했던 자신이 가장 이상할 테니까.

탑으로 들어서고자 하는 자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연들은 커다란 한이 되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 사연이 없어서야, 굳이 잘 살고 있던 자신들의 세상을 떠나 힘들기만 한 탑에 오르고자 할 리가 없으니까.

다만, 갈리어드처럼 한을 풀어 버린 플레이어들의 경우에는 조금 이야기가 달라졌다.

원동력이 사라진 셈이니 이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튜토리얼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이제 탑에 오르고 싶은 욕심은 없었고, 그렇다고 고향으로 되돌아가자니 반겨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돌아갈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여태 그랬던 것처럼 무의미하게 튜토리얼에만 머물 수는 없는 노릇.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쉬면서 천천히 생각을 풀어 봐야 할 것 같았다.

“아, 참. 그리고. 가기 전에 이거 갖고 가라.”

“……?”

연우는 갈리어드가 뭘 주려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머리 쪽으로 날아오는 칼을 보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낚아챘다.

1미터 남짓한 길이에 손가락 두 뼘 정도 되는 좁은 검신. 손잡이 끝에 독특한 매듭 법으로 묶인 녹색 수실이 인상적이었다.

“이게 뭡니까?”

“네가 마지막에 상대하려고 했던 놈. 제법 좋은 무기인 것 같아 챙겨 뒀다. 쓸 거면 쓰고, 버릴 거면 챙겨 놨다가 나중에 신비 상인에게 팔아라.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테니.”

연우는 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고, 날이 단단했다.

그가 보기에도 확실히 좋은 검이었다.

하지만 연우가 주로 쓰는 건 대검이나 단검 같이 한 손에 쥘 수 있고, 날이 짧은 것들.

그에게는 별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갈리어드의 말마따나 나중에 신비 상인에게 비싸게 팔 수 있을 것 같아 챙겨 둘까 했다.

그때 갈리어드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너, 아랑단과는 어쩌다 척을 지게 된 거냐? 놈들 본거지가 F구획에 있을 테니 앞으로 꽤 귀찮게 굴 텐데.”

연우가 무슨 소린가 싶어 그를 돌아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음? 아랑단과 척을 진 게 아니었어?”

그런데 갈리어드가 더 이상해하는 눈치였다.

“그 칼에 달린 녹색 수실, 아랑단을 상징하는 것이잖나.”

“……!”

순간, 연우의 눈동자가 커졌다.

‘단순한 스캐빈저 조직이 아니라, 아랑단이었다고? 청화도의?’

연우는 그제야 머릿속으로 여태 찢어져 있던 조각들이 한데 맞춰지는 것 같았다.

동생이 처치했던 스캐빈저 조직.

별안간 등장한 아랑단.

점조직으로 구성된 인간 농장.

갑자기 떠난 칸과 도일.

스캐빈저 조직 뒤에 아랑단이 있었고, 녀석들이 튜토리얼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여태 다른 플레이어들의 눈을 가린 것이라면.

칸과 도일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놈들을 잡으러 간 것이었다면.

“…….”

연우는 분명 칸과 도일이 일부러 자신을 밀어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는 길이 달랐기에 서로 갈라졌고,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위기에 있을지는 몰랐다. 칸과 도일이라면 충분히 녀석들을 물리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상대가 아랑단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얼마나 많은 플레이어들이 속해 있는지 모르고, 또 얼마나 많은 강자들이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배후에는 탑내 8대 클랜에 속한다는 청화도가 있었으니.

과연 두 사람만으로 놈들을 당해 낼 수 있을까?

아르티야에게 한 번 당한 적이 있으니 경계를 훨씬 더 철저히 할 게 분명한데도?

아마 칸과 도일이 아랑단을 해치웠다면, 진작 E구획에 소문이 파다히 퍼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 그런 말이 없다는 건, 두 사람의 싸움이 놈들에게 꺾였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생각했다.

B구획에서부터 E구획까지 함께 오면서, 자신에게 칸과 도일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가까운 존재인가, 먼 존재인가.

이 일에 얽히고 싶은가, 얽히고 싶지 않은가.

하지만.

칸의 자신만만한 웃음소리와 도일의 흐리멍덩하지만 이지적인 눈빛.

그런 걸 두고, 굳이 계산을 섞을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형은 나에게 영웅이었어. 부디 내가 다쳤다고 해서 그 모습까지 잃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동생이 일기장 마지막에 남겼던 말도 있었다.

결국.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빌어먹을 것들.”

칸과 도일에게 하는 말인지, 아랑단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동생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연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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