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두 개의 심장 (3)
내 심장에 박힌 칼은 총 5개였다. 세 개는 군주라고 불리던 놈들의 것이었고, 한 개는 사랑했던 연인의 것이었으며.
남은 하나는, 친구라 믿었던 녀석의 것이었다.
* * *
사실 연우가 단순히 정에 이끌려 아랑단을 처치해야겠다고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칸과 도일에 대한 생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는 했다.
하지만 연우는 이번 기회에 청화도의 전력을 일부 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화도는 몇 번에 걸쳐서 매번 인간 농장을 건설했어. 굳이 그러는 이유가 뭘까?’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 농장은 아주 비효율적인 시설이었다.
단순히 플레이어가 갖고 있는 아티팩트나 증표를 빼앗는 게 목적이라면, 약탈만 꾸준히 벌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번거롭게 관리만 까다로운 농장을 곳곳에 운영하려는 걸까?
그것도 아르티야에게 한 번 전멸하고 나서도 굳이 또?
‘뭔가 있어.’
연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로는 절대 드러나면 안 되는 것. 놈들에게 아주 큰 약점이 될 만한 것.’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고, 운이 좋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연우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청화도를 흔들 수 있는 무기가 된다.’
아르티야를 흔들고, 동생을 다치게 했던 8대 클랜.
특히 그중에서도 청화도는 동생의 심장에다 칼을 박았던 녀석 중 한 명이 있던 곳이었으니.
예상했던 것보다 이르지만.
그중 한 곳과의 전쟁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출 것.
‘아랑단의 전력은 당장 측정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아르티야가 상대했던 스캐빈저 조직을 기준으로 해도 높을 거란 것.’
아르티야는 스캐빈저 조직을 토벌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죽을 위기에 처해야만 했다.
그만큼 스캐빈저 조직은 끈질기고, 강했으며, 숫자가 많았다.
아마 아랑단은 그때보다 훨씬 크면 컸지, 절대 작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청화도에서 아랑단 관리를 위해 플레이어를 적게는 한 명, 많게는 다섯 명까지도 보낸다고 했었지.’
그것도 그냥 그저 그런 플레이어가 아니다.
청화도에서도 제법 실력이 괜찮다고 판단되는 플레이어를 보낸다.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제일 큰 관건이었다.
‘정면에서 무작정 부딪치는 건 멍청한 짓이야. 내가 가진 이점을 살려야 해. 내가 가진 이점, 뭐가 있지?’
연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저들은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위치는 대강 추정할 수 있겠지만, 자취를 감춘다면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아랑단은 목표가 고정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정체가 노출된 걸 알지 못한다.
단 한 번뿐이라 하더라도, 적이 방심한 틈에 기습을 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 외에도 연우는 발이 빨랐다.
순보를 얻어 이동 속도는 튜토리얼 내에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은밀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적의 위치를 정확하게 포착하는 감각도 뚜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우에게는 새로운 무기도 쥐어 져 있었다.
금강체와 마력회로.
이 두 가지만 하더라도 이미 자신의 실력은 튜토리얼의 평균치에서 훨씬 벗어난 상태였으니까.
처음 튜토리얼에서 활약했던 팀 아르티야의 전력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심해서도 안 되겠지만.
‘결국 히트 앤 런뿐인가?’
연우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에 자주 써먹던 방법이었다.
적의 지점을 공략할 때, 치고 빠지는 전술을 반복하면서 적의 전력을 착실하게 깎은 뒤, 허점이 노출되면 단번에 타격을 입혀 궤멸시키는 전술.
연우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게 남은 시간은.’
[88:25:48_63]
‘대략 4일에서 한나절이 조금 모자라는 정도.’
칸과 도일을 구출하는 정도라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래서는 남은 시간 동안 아랑단의 방해를 받을 수 있었다.
‘이왕에 싸우려면 완전히 끝장을 내야 해. 내가 손을 썼다는 걸, 청화도에서도 알 수 없도록. 생존자가 아무도 남지 못하게.’
이건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반드시 뿌리를 뽑아 놔야만 뒤가 안전했다.
더구나 연우는 튜토리얼의 1위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아직도 놓지 않고 있었다.
결국 3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아랑단을 궤멸시키고, 남은 구획도 통과해야만 한다.
연우는 차곡차곡 머릿속을 정리해 나갔다.
얼추 그림이 그려졌다.
‘녀석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게, 쉴 새 없이 치고 빠지면서 휘몰아쳐야 해. 그러다 놈들이 힘이 빠졌을 때, 단번에 들이쳐서 통째로 날려 버려야 한다. 아랑단 본거지, 수뇌부, 가릴 것 없이. 전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이 모든 걸 하루. 단 하루 만에 끝낸다.’
* * *
그날 밤.
연우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갈리어드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갈리어드는 연우를 빤히 쳐다보면서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전쟁을 하려는 건가?”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 역시 한때는 종족을 위해 싸우던 전사였네. 싸움만이 전부인 줄 알았던 멍청이기도 했고. 그런데 자네에게서는.”
갈리어드가 한쪽 입술을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와 비슷한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단 말이지.”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고 지금 자네의 눈빛이며 태도, 준비 상태, 전부 전쟁을 앞둔 자의 것이야. 원래 자네는 처음 날 찾아왔을 때부터 그런 모습이기도 했지만. 마치 세상 자체와 싸우려는 투사 같았달까?”
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 더 깊어졌어. 그걸 못 알아본다면 내 눈을 파내야겠지.”
그러면서 갈리어드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도와줄까?”
확실히 갈리어드가 나서 준다면 아주 순조로워질 것이다.
그는 이미 랭커와도 비슷한 실력으로 꼽히는 사람. 혼자 나서서 아랑단을 궤멸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갈리어드의 눈빛이 흥미진진해하는 기색을 폈다.
“어째서?”
“이건 제 전쟁입니다.”
칸과 도일만 구하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동생을 다치게 했던 원수 중 하나, 청화도를 흔드는 게 제일 큰 목적이었다.
그런 것을 남에게 맡긴다고?
연우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전쟁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해내야만 한다.
그건 게이트를 통과하기 전부터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이었다.
“어려울 텐데.”
“원래부터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긴. 그도 그렇군.”
갈리어드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싸움은 자신이 해내야만 하는 법이었으니.
“그럼 건투를 빌지.”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팩을 어깨에 걸었다.
허리띠에 대검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걸 확인하고, 모옥을 나섰다.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놈의 행방은?”
빌드가 질문에 수하가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찾을 수 없습니다. 워낙에 E구획이 쑥대밭이 된 터라…….”
“녀석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군.”
빌드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눌러 담아야만 했다.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몬스터 러쉬가 휩쓸고 지나간 뒤.
아랑단은 아예 7할에 가까운 규모가 박살나다시피 했다.
앞으로 청화도의 중요한 루키가 될 녀석들이었던 1조는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았고, 아르티야와의 전투 이후로 어렵게 일궈 놨던 스캐빈저 조직망은 아예 결단이 났다.
다른 아랑단의 조직원들도 모조리 휩쓸려 나가면서, 튜토리얼 곳곳에 설치했던 아랑단의 점조직들도 통째로 증발하고 말았으니.
F구획에 숨겨진 본거지나, 튜토리얼 ‘안쪽’에 있는 것들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아예 아랑단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 년에 걸쳐 빌드가 사활을 걸면서 쌓았던 것들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건 빌드에게 있어 사형 선고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반드시 어떻게든 아랑단을 재건해야 한다……! 섬에서 먼저 눈치를 채기 전에.’
빌드는 긴장감으로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억지로 눌러야만 했다.
원래 빌드는 아랑단에서의 성과를 기반으로 청화도의 수뇌부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실제로 최근에 ‘모시는 분’에게서 공석이 된 연화각과 천무전의 주인을 새로 뽑을 거란 말을 듣기도 했다.
빌드가 거기에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다는 말까지도 함께.
그리고 모시는 분께서는 반드시 ‘그것’을 완성하라는 신신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그것을 완성한다면 단번에 상위 서열로 치고 올라갈 수 있다면서.
사실상 청화도를 다스린다는 다섯 무신(武神) 중 한 명을, 빌드의 손으로 세워 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태가 이 지경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빌드가 바라는 것과 다르게, 이제 시간은 3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상 아랑단을 재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
당연히 튜토리얼이 끝나면 섬에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될 테고, 빌드는 관리 미숙으로 징벌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을 완성하는 것.
‘가능할까?’
빌드는 긴장감으로 바싹 메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혓바닥으로 축였다.
그것을 완성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난 몇 년에 걸쳐, 막대한 자금을 들이면서까지 스캐빈저 조직과 인간 농장을 운영했어도, 겨우 6할 정도 완성 된 게 전부일까.
그런데 남은 4할을 단 3일 만에 완성시킨다고?
폭주를 하거나 망가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빌드는 쫓기는 심정만큼이나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그것을 여태 완성시키지 못한 건, 그만큼 공정 작업이 까다로운 것도 있었지만, 재료로 썼던 플레이어나 몬스터들이 형편없는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빌드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현재 있는 최상위 주자들을 모두 그쪽으로 밀어넣어 버린다면……!’
여태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던 건, 대부분 최상위 주자들의 배후에는 다른 클랜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만드는 작업은 섬에서도 몰라야 하는 일.
비밀로 해야 했기 때문에 여태 건드려도 별 탈이 없는 놈들만 골라 써 댔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빌드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제물로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 이번 사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게 분명한 카인이라는 놈이었다.
녀석은 어떻게든 갈아 마시고 싶었으니까.
“녀석의 이동 경로로 봐서는, 지금쯤 F구획에 들어서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게 고작입니다.”
“그렇다면 F구획 전체를 샅샅이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놈을 내 앞에 데리고 와. 얼른!”
수하는 이 망망대해 같은 구획에서 어떻게 한 놈을 찾을 수 있겠냐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길을 내뿜는 빌드의 눈빛을 보고 있으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안 된다는 말이 나와서는 바로 목부터 날아가겠지.
“아, 알겠습니다.”
결국 수하는 고개를 숙이면서 자리를 떠났다.
빌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일어났다.
“일단, 남아 있는 재료부터 전부 밀어 넣어야겠어.”
빌드는 본거지 내에 있는 인간 농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에 거기에 집어넣었던 혈검과 폭시 테일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