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두 개의 심장 (4)
[E구획을 솔로 플레이로 통과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체력과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F구획에 입장했습니다.]
연우는 망막을 가득 메우는 메시지를 보면서 F구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천 개 가까이 쌓인 증표는 아직 수중에 남아 있었다. 증표가 공적치로 전환되는 건 튜토리얼이 끝나서 정산을 마치거나, F구획을 통과했을 때였다.
‘역시 여기는 E구획에 비해서 너무 황량해.’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다양한 환경을 조성한 E구획에 비해서 F구획은 황량한 들판만 가득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숲도 없고, 몬스터도 없고, 플레이어도 없었다. 이렇다 할 지표가 될 게 없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때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F구획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당신은 현재 주변에 보이는 건 황량한 들판이 전부인 장소에 무작위로 떨어졌습니다.
여기서는 위치, 방향, 길,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식량과 식수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서 생존하고, 길을 찾으십시오.]
연우는 메시지를 보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생존이라. 역시 아예 대놓고 E구획보다 더 골치 아픈 걸 던져 주는군.’
처음 F구획에 들어왔을 때, 나와 동료들이 내뱉은 말은 딱 한 마디였다.
“씨발.”
정말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 수 있는 건지. E구획은 골치 아픈 것들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구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른 플레이어와 거래를 하거나 해서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F구획은 전혀 그런 게 불가능했다. 구획의 너비는 E구획보다도 훨씬 넓으면서 아무것도 없다.
몬스터도 없고, 나무도, 숲도, 물도 없었다. 그러니 식량과 식수를 구할 곳도 없었고…….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F구획까지 통과하는 플레이어도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이 안에서 다른 플레이어를 만나 거래를 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런 허허벌판에 갑자기 뚝 떨어진다면 무슨 기분이 들까?
아마 정신이 멍할 것이다. 그리고 정처 없이 움직이다가 객사해 버리겠지.
아무리 플레이어라고 해도 식량과 식수 없이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차라리 괜히 힘을 빼지 말고, 동굴 같이 몸을 뉘일 수 있는 장소를 찾아 튜토리얼의 시간이 끝나는 걸 기다리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특징들이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랑단이나 스캐빈저 조직처럼 외부로부터 몸을 숨기길 원하는 놈들에게는 최적의 장소지.’
플레이어들에겐 정처 없이 떠도는 게 전부인 구획이지만, 배후가 탄탄한 아랑단이라면 기가 막히게 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들은 알까?
외부로 절대 노출되지 않을 거라는 그 자신감이, 오히려 그들의 목줄을 틀어쥘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계나 방비는 전혀 하지 않을 테니까.’
연우는 차갑게 웃으면서 감각을 최대로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F구획 내에서 길을 찾는 건 분명히 어려웠다.
하지만 탑은 절대로 해결이 불가능한 시련을 내리지 않았고, 아무리 어려운 난이도라고 해도 해결책이 반드시 존재했다.
연우는 자세를 낮추면서 지면에다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으면서 모든 감각을 지면 아래로 쏟아 부었다.
허리춤에 매달아 놨던 몬스터 5색 보석도 같이 빛을 발했다.
[‘코볼트의 귀’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지면 아래는 위쪽과 다르지 않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느껴지는 거라고는 바위, 바위, 흙, 흙, 모래…….
그러다 단단한 암반 아래를 따라 어렴풋이 ‘졸졸졸’ 지하수가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미약해서 그냥 물이 고인 정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적은 양.
거기다 가만히 감각을 집중하고 있던 순간.
쿠쿠쿠…….
역시나 아주 미약하지만 주변이 잘게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수 쪽으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두더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앞다리로는 굴을 파고, 뒷다리로 빠르게 이동하는 몬스터. 다만, 가죽은 딱딱한 바늘로 이뤄져 있었다.
크기는 대략 2미터.
‘가시 두더지.’
F구획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 녀석.
여기서 식량과 식수를 구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녀석을 잡아 가죽을 벗겨 살은 식량으로, 피를 식수로 써야 했다.
아니면 지하수가 있는 곳에 자주 나타나는 습성이 있으니 그 주변에 있는 지하수를 퍼 올려도 괜찮았다.
하지만 사실상 말만 그럴 듯할 뿐, 가시 두더지를 잡는 건 절대 쉽지 않았다.
‘워낙에 깊숙한 곳에서 살고 있으니까. 사냥해서 끄집어 올리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가시 두더지는 앞을 못 보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지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사는 터전도 주로 15미터 아래 깊숙한 지하다 보니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시 두더지를 찾는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녀석은 중요한 식량원이 되어 줄 뿐만 아니라.
‘길의 안내자이기도 하니까.’
가시 두더지는 주로 F구획의 출구 쪽에서 무리를 이루고 산다.
즉, 가시 두더지가 자주 출몰하는 장소일수록 출구에 가깝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랑단의 본거지가 숨겨져 있겠지.’
아랑단도 매번 청화도에서 지원을 받는 게 아닌 이상에야, 식량과 식수를 자급 조달할 수 있는 장소여야만 하겠지.
연우는 천천히 수맥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하는 가시 두더지의 뒤를 밟았다.
* * *
빌드는 감옥의 문에 설치된 패드에다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러자 지문이 자동으로 인식되면서 문이 철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좌우로 열렸다.
안쪽에는 벽에 고정된 쇠사슬과 형구에 단단히 묶여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칸과 도일.
“있었나? 혈검, 폭시 테일?”
빌드는 축 늘어진 그들을 보면서 비릿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칸이 고개를 들어 빌드를 노려봤다. 오랜 고문 때문에 얼굴이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러다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왜? 아직도 우리에게 할 말이 남아 있나? 아직도 꼰대들한테 협박할 거리가 부족해?”
빌드는 처음에 칸과 도일을 제압하고도 쉽게 그들을 제거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뒤에 있는 배후들이 탑에서도 너무 쟁쟁한 랭커들이었으니까.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전쟁이 벌어진 뒤, 그들을 청화도로 끌어 올 수 있는 좋은 패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놔뒀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하루 앞길도 못 볼 것 같은 이때.
빌드는 당장 자기 살길을 찾는 게 더 급했다.
“아니. 너희들에게 한 가지를 말해 주기 위해서다.”
“뭐냐?”
빌드의 두 눈이 시커멓게 가라앉았다.
“너희들은 곧 ‘돌’의 재료가 될 것이다. 그걸 말해 주러 왔다.”
“돌?”
순간, 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미친 새끼들……!”
칸은 ‘돌’이 정확하게 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그게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랑단과 스캐빈저에게 붙잡힌 플레이어들을 희생시켜서 만든 물질.
쓰레기 같은 실험의 주산물이자, 결과물이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것.
“원래 너희들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정수를 녹이려 했지만…… 빌어먹게도, 우리 쪽이 급해져서 말이다. 너희들로서는 다행인 줄 알아라. 하루라도 빨리 그 고통을 끊어 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빌드는 한 발 물러서면서 뒤따라온 수하들에게 턱짓을 했다.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칸은 자신과 도일에게 다가오는 놈들을 보면서 이를 악다물었다.
자신이 죽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한 만용과 객기를 부리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도일도 같은 신세가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오직 형인 자신만 믿고서 집을 뛰쳐나왔던 착한 아이인데.
몹쓸 길로 인도한 것 같아서.
마음 같아서는 녀석만이라도 어떻게든 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힘이 없었다.
무기력했다.
‘이번에도 난 그때와 같은……!’
아픈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놈들이 다가왔다.
“…….”
칸이 이를 악물었다.
* * *
‘찾았다.’
연우는 가시 두더지를 한창 쫓으면서 몇 번 주변을 뒤진 끝에 원하던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F구획의 황무지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곳.
하지만.
‘용마안.’
새로운 눈으로 살핀 순간, 전혀 다른 광경이 노출되었다.
수없이 많은 결들이 하늘을 따라 실타래처럼 뭉쳤다가 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넓은 평야 위로 세워진 수십 채의 건물 군이 보였다.
은폐용 광역 마법진을 설치해 건물 군을 전부 감춘 것이다.
용마안을 속일 수는 없었지만.
연우는 마법진의 구성을 살피다가 결과 결 사이의 틈으로 조용히 파고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침입자가 발생할 시에 알람이 울리도록 되어 있었지만.
연우는 결을 통과한 데다가, 워낙에 기척을 최대한으로 죽였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을 수 있었다.
무슨 비상 상황이라도 터진 걸까.
아랑단의 본거지는 어수선했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바쁘게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제기랄, 하필이면 이때……!”
“어서 뛰어. 튜토리얼이 얼마 남지 않았어. 섬에서 감찰이라도 보낸다면 우린 죄다 죽은 목숨이야. 피해가 너무 크다고.”
“빌어먹을!”
연우는 플레이어들을 피해 건물 모퉁이에 숨어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대충 상황을 유추했다.
‘몬스터 러쉬 때문이로군.’
확실히 아랑단의 전력 대부분과 정보망은 E구획에 주로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몬스터 러쉬로 E구획이 쑥대밭이 되면서 같이 날아가 버린 모양이었다.
‘뜻하지 않은 수확이야.’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랑단과 전쟁을 벌이기로 한 이상, 적의 혼란은 그에게 큰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연우는 차갑게 웃으면서 은신을 풀어 마침 지나가던 두 플레이어 들 앞을 가로막았다.
“무,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너 어디 소속이……!”
두 사람은 설마 침입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연우에게 소리를 치려다가 도중에 멈춰야만 했다.
연우가 마력이 잔뜩 응집된 카르슈나의 단검을 거세게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쐐액-
칼날에 맺힌 마력이 폭발하면서.
콰아앙!
거친 해일처럼 앞에 있는 모든 걸 쓸어버렸다.
두 플레이어도.
심지어 건물까지도.
우르르!
* * *
쿠쿠쿠!
갑자기 미약하게나마 건물이 떨렸다.
“뭐지?”
빌드는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쏟아졌다.
이곳은 웬만한 지진에도 끄떡없도록 설계되어 있을 텐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칸과 도일을 챙기려던 플레이어들이 빌드를 돌아봤다.
빌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래서 옆에 있는 수하에게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려는데.
쾅!
그 전에 먼저 다른 수하가 다급하게 뛰어와 문을 열고 있었다.
“빌드 님! 크, 큰일입니다! 지금 밖에 침입자가 나타났습니다!”
“뭐?”
빌드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랑단이 만들어진 이후로, 침입자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랑단에 그냥 불만을 가지고 있거나, 시비를 걸고 싶거나, 혹은 뭔가 냄새를 맡았거나.
이유는 가지각색이었지만, 침입자는 몇 회차에 걸쳐 꼭 한 팀씩은 있어 왔다.
칸과 도일도 그런 녀석들 중에 하나였고.
하지만 그런 녀석들은 전부 가릴 것 없이 ‘돌’의 재료가 되었다.
그러니 조금 강한 녀석이 찾아왔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왜 하필 이런 시기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빌드의 심장을 꽉 조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수하를 돌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어디냐? 놈이 있는 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