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두 개의 심장 (5)
땡땡땡-!
아랑단의 본거지를 따라 비상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단 한 명의 침입자 때문에.
콰콰콰!
마력으로 이뤄진 해일이 몇 번이고 지면을 휩쓸어 건물을 무너뜨린다.
폭발과 함께 불어닥친 후폭풍이 칼바람이 되어 플레이어를 도륙했다. 어디선가 일어난 불길은 본거지를 따라 번지면서 화마가 되었다.
붉은 혓바닥을 탐욕스럽게 내두를 때마다 검은 재가 쏟아지고, 하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마, 막아!”
“제기랄! 대체 어디서 저딴 놈이 나타난 거지?”
아랑단은 어떻게든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
각자 포메이션을 갖추고, 대규모 버프를 걸어 능력치를 향상시키고, 전방위로 포진해 침입자를 압박했다.
하지만 침입자는 너무 강했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마력이 터져 나가고, 발을 구를 때마다 폭발과 함께 지면이 치솟아 전열을 흩뜨려 놓으니.
양 떼를 누비는 늑대, 아니, 사자가 여기 있었다.
“죽어엇!”
목을 갈라 오는 칼이 있었다.
‘고블린의 발.’
침입자, 연우의 주문에 따라 허리춤에 걸어 놨던 5색 보석에 붉은색 빛이 어렸다.
그러자 연우의 다리에도 붉은색 이펙트가 맺히면서 발이 보다 가벼워졌다.
몸을 가볍게 틀어 공격을 능숙하게 피할 수 있었다.
쉭!
동시에 연우는 상대의 팔뚝을 잡아 크게 비틀면서 바짝 간격을 안쪽으로 좁혔다.
‘오크의 손.’
이번엔 5색 보석과 양팔에 푸른색이 맺혔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우드득!
녀석의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퍼퍼퍽!
역수로 쥔 카르슈나의 단검이 머리, 심장, 명치에 순서대로 꽂혔다가 튀어나왔다.
“쿠르륵!”
놈이 피가 뒤섞인 게거품을 쏟으면서 쓰러졌다.
몬스터의 5색 보석을 이용한 전투.
연우는 처음에는 보석을 이용하는 싸움이 조금 번거롭게 느꼈다.
어떤 동작을 취할 때마다 보석에 적용된 기능을 일일이 바꿔 줘야만 했으니까.
한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어떤 돌발 변수가 벌어질지 모르는 난전에서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쓴다?
사실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전투 의지라는 독특한 스킬이 있었다.
연우는 스킬을 통해 깊어진 사고 능력을 이용, 상황에 따라 알맞게 기능을 매번 전환시켰다.
그리고 이런 번거로운 작업이 어느 정도 숙달된 순간부터.
연우의 싸움은 차원이 달라졌다.
힘을 필요로 할 때는 오크의 손을, 기민한 동작을 필요로 할 때는 고블린의 발을 사용했다.
그리고 코볼트의 귀, 놀의 코, 리자드맨의 눈도 적절하게 감각에 영향을 끼치면서 다채로운 공격이 가능해졌다.
당장 여러 개의 아티팩트를 갖고 있다지만, 이만큼 편리한 물건이 없었다.
특히 이런 난전에서는 더더욱.
게다가 어디 그뿐이랴.
[‘고블린 왕의 눈’이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감지해 냅니다.]
목에 매단 크라눔의 눈이 갑자기 데구르르 굴러가더니, 교묘하게 사각 지대를 파고들던 세 개의 기척을 포착해 냈다.
연우는 재빨리 고블린의 발을 사용해서 단숨에 뒤로 멀찍이 떨어졌다.
그가 있던 자리로 아슬아슬하게 세 개의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내심 회심의 일수라고 생각했던 세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 순간.
연우는 다시 오크의 손을 전개, 붉은색 이펙트가 맺힌 카르슈나의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귀속된 망령의 수: 115]
동시에 검은 팔찌에 귀속된 망령의 숫자 카운트가 내려가면서.
우웅-
카르슈나의 단검에 응집되었던 흑의 칼날이 그대로 폭사했다.
“크악!”
“컥!”
단숨에 두 플레이어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한 명은 자기 목을 부여잡으면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망령의 저주가 잔뜩 깃든 흑의 칼날은 웬만한 방어구쯤은 손쉽게 잘라 버리는 예리한 날을 자랑한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몸에 깃든 저주가 상태를 자꾸만 악화시키니.
목을 붙잡고 쓰러졌던 플레이어는 갖가지 스킬을 발동시켰지만, 결국 지혈하지 못하고 눈동자가 뒤집혀 절명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뒤에 있던 플레이어들의 안색은 사색이 되어 주춤 물러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방금 죽은 시신들 위로 둥실 떠오르는 영혼들을 보고, 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귀속.’
영혼들은 그대로 흐려진 수채화처럼 갈가리 찢기면서 검은 팔찌로 흘러 들어왔다.
[귀속된 망령의 수: 118]
흑의 칼날로 소비한 망령의 수만큼 다시 채워 넣는다.
이건 급격한 소비를 막기 위해 택한 방식이었다.
물론, 완전한 보충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것만 하더라도 공격력은 계속 유지할 수 있었고, 적들은 연우에게 쉽게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덤비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칼날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으니까.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녀석은 없었다.
뒤로 물러서다가 도망치려는 놈들도 다를 건 없었다.
탁!
“저, 저건 사람이 아니야!”
“젠장!”
연우는 사색이 되어 사라지는 녀석들을 향해 가볍게 왼손의 엄지와 검지를 튕겼다.
퍼어엉!
그러자 녀석들의 관자놀이 옆으로 폭발이 일어나면서 그대로 머리를 날려 버렸다.
흑의 칼날과 열기를 이용한 스킬 연계식.
처음에 검은 팔찌를 얻었을 때 한 번 실험해 봤던 기술이었다.
망령 카운트가 두 개나 아래로 내려갔지만, 죽은 녀석은 다섯.
이만하면 남는 장사였다.
“……!”
결국 아랑단의 플레이어들은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개미지옥에 붙잡히고 말았으니.
두려움에 젖어 몸을 벌벌 떨기만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연우는 더 크게 날뛰었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플레이어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어떻게든 살아 보고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달려드는 녀석들도 죽었다.
악착같이 이를 악물고 숫자로 밀어붙이고자 하는 녀석들도 죽었다.
부딪치는 자들 중에, 연우에게 칼을 맞대는 녀석들 중에 살아남는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는다.’
애초 연우는 아랑단에 쳐들어왔을 때부터 다짐했던 게 있었다.
아랑단 내에 있는 어떤 녀석도 살려 두지 않겠노라고.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가 청화도에 흘러가는 걸 차단하려는 속셈도 있었지만, 애초 청화도는 동생의 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녀석들이었다.
꺼림칙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게 확실해진 이상, 살려 둘 이유는 전혀 없었다.
콰콰콰-
그래서 연우는 악착같이 녀석들에게 따라붙었다.
감각이 시키는 대로 기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돌진해 칼을 휘둘렀다.
외곽에서부터 중심부까지.
연우는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방해 없이 일직선으로 관통할 수 있었다.
그가 지난 경로 위에는 무너진 건물 잔해와 더 크게 치솟는 화마, 그리고 피를 뿌리며 쓰러진 시신뿐.
아랑단은 연우 한 사람을 어떻게 막아 내지도 못하고, 번번이 후퇴만 거듭해야 했다.
쾅! 쾅!
콰앙!
“쿠르륵!”
“프랑! 안 돼!”
“저, 저건 사람이 아니야……!”
“젠장! 대체 왜 이렇게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이러다가 진짜 다 뒈진다고!”
폐허 위에서, 플레이어들은 두려움에 젖어 몸을 덜덜 떨었다.
도망치면 가장 먼저 죽으니, 도망치지도 못하고 연우의 시선을 회피하기만 바빴다.
눈에 띄면 사신의 낫이 목에 드리울 것 같았다.
그런 녀석들을 보면서.
연우는 차갑게 웃었다.
‘힘이, 넘친다.’
연우는 지치기는커녕 점차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입가에 미소도 잔뜩 맺혔다.
정말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연우는 싸우면 싸울수록 점차 몸에 활력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금강체를 이룬 육체는 피로를 몰랐다.
오히려 아직 네가 체험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면서 시위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마력회로도 마찬가지.
쉴 새 없이 제공되는 마력은 금강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다 필요할 때에는 마력의 출력을 급격하게 줄이기도 하고, 확 늘리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과부화가 걸리거나 제동이 걸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무런 무리 없이 엑셀과 브레이크 페달을 밟을 수 있는 스포츠카처럼.
터보 엔진이라도 탑재한 것처럼.
연우는 쉴 새 없이 적진을 누비고, 부수고, 짓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검은 팔찌, 몬스터의 5색 보석, 고블린 왕의 눈 같은 여러 아티팩트들까지 보조 장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니.
휘휘휘!
연우를 따라 바람이 감겼다. 과열된 대기가 일렁이면서 아지랑 이가 되었다.
애초 강해졌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해진 정도는 예상치를 훨씬 웃돌고 있었다.
‘이런 힘이라면.’
이만큼 강해진 실력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쿵!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덕분에 연우는 처음에 계획했던 작전을 크게 수정할 수 있었다.
‘굳이 히트 앤 런을 고수할 필요가 없어. 계속 이대로. 단번에. 정면에서부터 치고 나가서 녀석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먹어치운다.’
눈가를 따라 강렬한 안광이 치솟았다.
순간, 녀석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네다섯 발자국 이상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탐욕에 젖은 포식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으으으……!”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그중 어느 누구도 도저히 연우에게 달려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음 한 명이 본거지에 쳐들어 왔다고 했을 때에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했었는데.
벌써 80명이 훨씬 넘는 동료들이 쓰러져 있었다.
시체조차 온전하게 남기지 못하고 죽은 녀석들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이제는 제 발로 지옥의 구렁텅이로 걸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연우가 다시 한 걸음 성큼 다가갔다.
“더 오지 않는다면.”
플레이어들은 연우가 내뿜는 투기를 당해 내지 못하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물러났다.
“이번에는 내가 가지.”
연우가 차갑게 웃으면서 튕겨나갈 듯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플레이어들의 안색이 더욱 시퍼렇게 질렸다.
쾅!
연우는 대지를 박차며 놈들에게 쇄도했다.
쐐애액-
그때였다.
“멈춰라!”
갑자기 하늘을 따라 메아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연우는 앞으로 달리다 말고 도중에 멈춰서 고개를 위로 들었다.
맞은편 건물 위로 열 개의 궤적이 날아오더니 툭 떨어졌다.
타다닥!
하나 같이 강렬한 인상을 가진 자들이었다.
여태 연우가 상대했던 플레이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세를 발산하는 자들.
특히 가장 선두에 있는 자는 여기 있는 모든 아랑단을 합쳐도 당해 내지 못할 만큼 험한 기세를 뿌려 대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상. 등에 ‘X’자로 걸친 두 개의 칼. 들끓는 기세.
빌드였다.
그리고 그를 따라온 9명은 빌드를 따라 청화도에서 파견된 탑의 플레이어들이었다.
“아아, 드디어 빌드 님이!”
“사, 살았어!”
아랑단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망이 어렸다.
하지만 쑥대밭이 된 본거지를 보는 빌드의 시선에는 오로지 분노만 가득 담겨 있었다.
“가면, 이번에도 너였나? 쥐새끼처럼 숨어 여태 보이지 않아 어딜 갔나 했더니. 감히 주제도 모르고 여기를 와?”
곳곳에 죽은 시체며 무너진 건물 잔해들.
그나마 겨우 남았던 아랑단의 마지막 전력이 거의 망가져 있었다.
남은 생존자는 불과 서른 남짓.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백여 명이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팔십여 명이 죽어 나간 것이다.
이게 전부 단 한 사람이 벌인 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랑단의 모든 것을 망쳐 놓은 주범이 눈앞에 있었다.
화아악!
빌드를 따라 강렬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분노만큼이나 뜨겁고 강렬한 기운이었다.
사위를 압박하던 연우의 투기도 거짓말처럼 물로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아래.
연우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빌드를 보고 있었다.
‘뭐지?’
상대는 청화도에서 튜토리얼로 파견된 플레이어가 분명했다.
여태 외곽에서부터 자잘한 피라미들만 줄기차게 상대했던 것도, 녀석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였으니.
원하던 대로 드디어 대어를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연우는 마음 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빌드를 보는 순간, 이상한 데자뷰를 느꼈다.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간질간질거렸다.
녀석의 기질(氣質)이 너무 익숙했다.
‘이런 기질이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런 사람을 내가 본 적이 있다고?’
그 순간.
머릿속으로 갑자기 일기장에 적혀 있던 어떤 문구가 다시 스쳐 지나갔다.
내 심장에 박힌 칼은 총 5개였다. 세 개는 군주라고 불리던 놈들의 것이었고, 한 개는 사랑했던 연인의 것이었으며.
남은 하나는, 친구라 믿었던 녀석의 것이었다.
동생이 가장 절친한 친구라 믿었으며 유일하게 등을 맡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가 있었다.
그 녀석이 ‘형제들’이라며 데리고 다녔던 여러 명의 플레이어들이 있었고.
그중 한 명의 얼굴이 어렴풋이 연우의 눈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심장에 칼을 박으면서 쓰러지던 동생에게 비웃음을 던졌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름도 함께.
‘빌드!’
연우의 눈동자 위로 불꽃이 튀었다.
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지?
탑을 오르기 시작한 플레이어들은 웬만해서는 절대 튜토리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99개나 되는 층을 오르는 것만 해도 골치가 아픈 데다가, 한 달 동안 숱하게 고생만 했던 장소를 다시 찾고 싶을까.
그리고 연우가 알기로 빌드도 청화도 내에서 한창 공략에 집중하는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녀석이 어째서 튜토리얼에, 그것도 아랑단에 있는 걸까?
그 순간, 연우의 머릿속에서 여태 던져 뒀던 온갖 의문들이 퍼즐처럼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아랑단. 스캐빈저. 청화도. 인간 농장. 끝까지 의문이었던 저들의 ‘진짜’ 목적.
빌드.
그리고 빌드의 뒤에 있을 녀석까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시나리오는 유추할 수 있었다.
‘여기는 단순히 청화도의 숨겨진 조직이 아니었어.’
연우의 눈이 불을 뿜었다.
‘리언트. 녀석이 청화도까지 속여서 만든 비밀 아지트였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