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두 개의 심장 (6)
리언트.
동생이 한때 가장 믿었던 친구였지만, 그런 기대를 저버리고 심장에다 칼을 꽂았던 자.
그리고 녀석은 대가로 청화도에 들어가 간부가 되었다.
하지만 리언트는 청화도의 우두머리인 무신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언제나 불만을 가졌었다.
그런 녀석이 다른 뭔가를 꾸미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가리기 위한 위장막이 아랑단이라면.
모든 게 얼추 맞아떨어졌다.
“하하! 하하하!”
연우는 손으로 가면을 덮으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가에는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힐 정도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원수의 흔적을 찾게 된 셈이었으니.
설마 아랑단이 리언트가 만든 조직이었을 줄이야.
숨겨진 보물이라도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유를 모르는 빌드의 인상은 더 크게 일그러졌다.
감히 자신을 앞에 두고도 두려워하기는커녕 웃는다는 사실 때문에.
“네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콰콰콰!
빌드가 내뿜는 기세를 따라 대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일대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피를 왈칵 쏟으면서 쓰러졌다. 몇몇은 그만해 달라는 애원에 찬 눈빛으로 빌드를 올려다봤다.
연우는 갑자기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그치더니, 가면에서 손을 내렸다.
그리고 허공에다 카르슈나의 단검을 세게 그었다.
촤아악!
그 순간, 사위를 압박하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잘려 사라졌다.
결을 가른 것이다.
“……!”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빌드의 눈은 잔뜩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얀 가면 아래, 연우는 눈가로 두 개의 도깨비불을 피우면서.
아주 차갑게 웃었다.
“쓸데없는 폼은 그만 잡고. 덤빌 거면 바로 덤벼.”
뜻하지 않게 여기서 리언트의 꼬리를 잡았다.
빌드는 리언트가 자랑하는 여러 팔 중에 하나.
녀석을 잡아 족친다면.
일기장이 끊어진 뒤에 탑 내에서 벌어진 여러 일들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우야. 이게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첫 번째 선물이 될 것 같다.’
빌드를 보는 연우의 눈빛이 좌우로 길게 찢어졌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허기에 굶주린 맹수의 것처럼.
그런 눈빛을 읽은 걸까?
빌드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태껏 자신에게 저런 눈빛을 보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원래는 자신이 가져야 하는 눈빛이었다.
“그랑.”
“예.”
빌드와 함께 왔던 9명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너는 즉시 섬으로 타전을 보내라. 아랑단으로 이상한 놈이 찾아왔다고.”
“예!”
명령을 받은 플레이어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던 순간.
쾅!
갑자기 녀석의 머리 옆에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그는 그대로 머리가 수박처럼 박살나 쓰러졌다.
“……!”
“……!”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공격.
빌드와 남은 여덟 플레이어들이 눈을 크게 부릅뜨면서 연우를 돌아봤다.
연우는 쓰러진 녀석을 향해 뻗었던 왼손을 거두면서 차갑게 이죽거렸다.
“말했을 텐데?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덤빌 거면 덤비라고.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빌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근거리면 근거리, 원거리면 원거리. 다채로운 공격이 가능한 적.
가장 까다로운 상대였다.
결국 빌드는 연우에 대한 위험 수위를 최대로 끌어 올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칸과 도일의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 이만큼 날뛰었다는 건 그만큼 믿는 구석이 어느 정도 있었단 뜻이겠지.”
판트와 에도라. 외뿔부족 남매이며 이번 튜토리얼 회차에서 최고로 손꼽히던 녀석들.
웬만한 탑의 플레이어들조차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녀석들과 동급으로 여겨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뜻.
스르릉!
빌드는 등에 교차시켜서 걸어 뒀던 두 자루의 칼을 뽑았다.
스산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렇다면 네가 믿는 그 알량한 솜씨가 얼마나 쓸모없는 건지 깨닫게 해 주마.”
빌드는 마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면서 으스러져라 건물 지붕을 거세게 박찼다.
콰아앙!
딛고 있던 건물이 충격에 그대로 내려앉았다.
빌드는 빠른 속도로 쇄도하면서 연우에게로 칼을 휘둘렀다. 칼을 따라 바람도 같이 딸려오면서 날을 바짝 세웠다.
그가 평소 즐겨 사용하던 스킬, ‘칼바람’이었다.
차앙!
연우는 카르슈나의 단검을 위로 비스듬히 쳐올리면서 두 칼을 빗겨 냈다.
동시에 몸을 회전시켜 빌드 쪽으로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왼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가 대검을 빠른 속도로 뽑아 올렸다.
쐐애액-
역수로 쥔 대검이 궤적을 그려 빌드의 목젖으로 날아들었다.
빌드는 허리를 뒤로 꺾으면서 아슬아슬하게 대검을 피했다. 그리고 두 칼을 크게 휘둘러 연우의 하체를 쓸어 갔다.
칼바람은 연속적으로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더 많은 바람이 중첩되어 위력도 강화되는 특징을 자랑했다.
지면 위로 짐승의 발톱이 훑고 지나간 것 같은 고랑이 깊게 남았다.
촤악!
하지만 연우는 지면을 가볍게 박차 피해 냈으니.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몸을 뒤틀어 카르슈나의 단검을 녀석의 정수리 위로 세게 내리쳤다.
빌드도 휘두르던 그대로 칼을 수직으로 쳐올렸다.
단검과 두 칼이 다시 한 번 격돌했다.
콰아앙!
충격파가 두 사람을 뒤흔들었다.
지면이 아래로 움푹 내려앉고, 먼지 구름이 좌우로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주변이 먼지 구름으로 가득 찼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밀려나지 않는 팽팽한 접전.
싸움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꽉 쥔 주먹에서는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 나왔다.
연우 역시 여태껏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던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진짜 ‘싸움’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목이 떨어질 수 있고, 사소한 실수가 큰 패배로 귀결되는 싸움.
호흡이 가빠졌다.
근육이 과열되었다. 긴장감으로 허리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뇌 내에서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어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처음 아프리카에 섰을 때 받았던 느낌. 사지를 마구 날뛰고 다녔을 때 받았던 느낌을 다시 맛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연우에게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로 다가왔다.
마치 여태껏 심연 깊숙한 곳에 가둬 뒀던 맹수가 쇠사슬을 끊고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발톱과 이빨을 잔뜩 드리운 채 산 위를 질주하는 것 같은 희열로 다가왔다.
그래서 연우는 더욱 바짝 빌드에게 달려들었다.
달라붙고, 또 달라붙으면서, 자신이 다치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지치지 않고 칼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쉬쉬쉭-
차차차창!
때문에 처음에는 현란한 춤사위를 보이던 빌드의 두 칼도 언제부턴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연우의 속도를 겨우겨우 따라잡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빌드에게 너무 큰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낱 튜토리얼에 참가한 플레이어에 불과할 텐데.
이제야 겨우 ‘능력’을 얻기 시작한 피라미에 불과할 텐데!
‘어떻게 나를 이렇게 몰아붙일 수 있는 거지? 어떻게!’
만만치 않은 놈일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최소 판트와 에도라, 두 사람의 급은 될 거란 상정은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빌드는 엄연히 탑을 공략하고 있는 플레이어였다.
비록 최근에 공략에 한계를 느껴 중단하고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꽤 높은 층계를 노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빌드를 압도하고 있었으니.
아니, 정확하게 ‘압도’는 아니었다.
냉정하게 관찰했을 때, 아직 연우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자신이 가진 기량을 전부 소화해 내지는 못한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칫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위기에 오히려 목을 더 바짝 붙이고, 팔뚝이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가는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무시하고 오히려 더 맹공을 퍼부었다.
방어는 모두 도외시하고, 빌드를 연신 압박하고만 있었으니.
때문에 연우는 온몸이 상처로 도배되다시피 하면서도,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도, 속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즐겁다는 듯이 차갑게 웃었다.
“그렇군. 너, 싸움을 전혀 할 줄 몰라.”
“무슨……!”
“그래도 전에는 제법 싸울 줄 아는 것 같더니. 그새 고만고만한 승냥이들 사이에 있으면서 발톱이 많이 사라졌나 보지?”
빌드는 자신을 아는 것 같은 말투에 소리치고 싶었다. 대체 네 정체가 뭐냐고.
하지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려는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가면 아래에 보이는 두 눈. 냉소에 가득한 두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경악과 공포에 젖은 자신의 모습이.
“……!”
콰아앙!
빌드는 왼 칼의 면을 방패처럼 바짝 세워 연우의 일격을 겨우겨우 막아 냈다.
충격으로 칼이 미친 듯이 울렸다. 날은 완전히 상했고, 검면에는 균열까지 퍼졌다. 손잡이를 쥔 손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아니, 손이 이렇게 떨리는 건, 혹시 충격이 아니라 공포 때문은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이 빌드가, 한낱 튜토리얼의 플레이어 따위에게 공포를 느낀다고?’
하지만 빌드는 어디선가 스멀스멀 올라와 심장을 꽉 조여 대는 이 어두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연우가 휘두르는 칼은 마치 포탄 같았다.
하나하나가 바위를 가볍게 부술 수 있는 위력이었고, 동체 시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이제 빌드의 눈에 연우는 맹수로만 비쳐졌다.
그를 계속 몰아붙이다 끝내 낭떠러지에 서게 만든 맹수.
쐐애액-
다시 연우가 움직였다. 낭떠러지에 선 빌드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듯, 마력을 최대한으로 출력시켰다.
지이잉-
마력회로가 미친 듯이 회전했다.
인형설삼과 아카샤 뱀의 내단이 혼재된 마력이 카르슈나의 단검에 한가득 실렸고.
쾅! 콰앙!
빌드의 몸이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자꾸 뒤로 밀려나다가.
콰아앙!
“컥!”
결국 마지막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하고 뒤로 크게 튕겨 났다.
왼 칼이 부서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속에는 빌드의 잘려 나간 왼팔도 섞여 있었다.
“우웨에엑!”
빌드는 바닥 위를 한참 나뒹굴다가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피가 철철 쏟아지는 왼쪽 어깨를 손으로 겨우겨우 막으면서. 상체를 숙여 피를 계속 토해 냈다.
늑골이 여러 개 나간 듯 숨이 턱턱 막혔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고, 눈가에 핏대가 잔뜩 섰다. 오른팔이 부르르 떨렸다.
특히 잘린 왼쪽 어깨에서 울리는 고통이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뚜벅.
뚜벅.
연우가 천천히 빌드에게로 다가갔다.
빌드에게는 그 발자국 소리가 천둥보다 더 크게 들렸다.
“빌드 님을 보호해!”
“멈춰!”
그때, 차마 연우와 빌드의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던 플레이어들이 와락 달려들었다.
하지만.
촤아악!
연우는 망령을 잔뜩 소비해 만든 흑의 칼날을 사선으로 세게 그었다.
검은 궤적이 허공을 가로 질렀다.
여덟 명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허공에서 상하체가 분리된 채로 후드득 쏟아졌다.
살점과 핏물이 난무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잠겼다. 아무도 연우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니, 이제는 그 정도도 아예 넘어서고 있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나머지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빌드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이제 그의 눈에 연우는 맹수가 아닌 악귀로만 비쳐졌다. 악귀가 웃으면서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마, 막아! 저 새끼를 당장 막으란 말이야!”
빌드는 어떻게든 연우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악에 바친 채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자.
덜덜덜…….
여태 떨고만 있던 아랑단의 눈동자가 일제히 뒤집혔다.
이지가 사라지고, 흰자위가 잔뜩 드러났다. 흰자위를 따라 광기가 감돌았다.
화아아!
‘망석중이 다루기.’
스킬로 특별히 제작한 단말(端末)을 사용, 단말을 미리 심어 둔 대상들을 순식간에 백치로 만들어 꼭두각시 인형으로 다룰 수 있는 고급 스킬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리언트가 가진 고유 스킬이기도 했다.
하지만 빌드는 리언트에게 예속(隸屬)되면서 고유 스킬의 일부를 빌려 올 수 있었고, 위기 시에 사용할 생각으로 오래 전부터 아랑단에 가입하는 플레이어가 있으면 몰래 단말을 심어 뒀었다.
그래도 여태껏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는데.
빌드는 처음으로 이 스킬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빌드의 경우 스킬의 주인인 리언트와는 다르게 한 번 발동시키고 나면, 망석중이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당장 그에게는 이것저것을 가릴 겨를이 없었다.
일단은 연우의 발목부터 잡아 둬야만 했다.
“크헝!”
“으허허헝!”
수십 명의 아랑단이 일제히 연우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이미 이지 따윈 모두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죽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사이.
빌드는 겨우 일어나 반대로 뛰기 시작했다.
당장 이 빌어먹을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무기를 가지러 가기 위해서.
비장의 한 수를 손에 넣기 위해서.
‘돌! 돌이 필요해! 돌이면 놈을 죽일 수 있을 거야!’
원래대로라면 무신이 되려는 주인에게 진상해야 할 힘이었지만.
빌드는 당장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그가 바로 그 힘을 필요로 했다.
주인에게 뭐라고 변명할지는, 일단 저 빌어먹을 악귀를 쓰러뜨리고 나서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촤촤촤!
연우는 좀비 떼처럼 달려드는 망석중이들을 빠르게 도륙하면서, 도망치는 빌드의 뒤를 눈으로 쫓았다.
녀석이 가는 곳에.
리언트가 철저하게 숨기려고 했던 ‘비밀’이 묻혀 있을 터였다.
‘아니면 칸과 도일이 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