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두 개의 심장 (7)
“쿠르륵!”
연우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플레이어의 목덜미에서 카르슈나의 단검을 거칠게 뽑았다.
녀석은 피가 섞인 게거품을 물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변에는 온통 이성을 잃고 연우에게 덤볐다가 죽은 시체들로 가득했다.
결국 마지막 남아 있던 인력까지 죽으면서, 아랑단은 사실상 완전히 전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전멸은 아니었으니.
아직 한 명이 남아 있었다.
‘빌드.’
연우는 칼날에 묻은 핏물을 가볍게 털어 내면서 녀석이 사라진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확장된 감각 영역 사이로, 녀석이 다급하게 지하 창고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연우는 가볍게 땅을 박찼다.
쐐애액-
* * *
타다닥!
빌드가 찾은 곳은 본거지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였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여러 개의 마법진과 결계가 복잡하게 설치 되어 있어, 아랑단 내에서도 간부 이상 급만 출입이 허가된 비밀 장소.
‘빨리! 빨리 얻어야 해!’
빌드는 망석중이들이 연우를 완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발목을 잡을 정도는 되겠지.
그렇다면 그 안에 최대한 빨리 ‘돌’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사용법은 리언트가 언뜻 지나가면서 했던 말이 있었기 때문에 대충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돌에 너무 정신이 팔린 나머지 눈치 채지 못했다.
이미 연우가 바짝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 * *
‘잘도 이런 곳을 숨겨 두고 있었어.’
연우는 활짝 열린 창고 아래로 깊숙하게 나 있는 나선형 계단을 보고 가볍게 혀를 찼다.
너무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어 만약 빌드를 일부러 풀어 주지 않았다면 절대 찾지 못했을 장소.
그래도 지금이라도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빌드와 일정한 간격을 두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에는 수도 없이 많은 문들이 있었다.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문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문들 너머에 절대 만만치 않은 것들이 있을 거란 것.
그러다 연우는 도중에 다른 문들에 비해 유독 많이 낡아 보이는 철문 앞에 섰다.
‘사람이, 있다.’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두 개.
연우는 아주 잠깐 빌드가 내려간 계단 아래쪽을 봤다.
‘어차피 올라올 길은 여기밖에 없으니까. 놈은 언제든 잡을 수 있어.’
생각이 끝난 연우는 지체 없이 철문을 활짝 열었다.
끼리릭!
마법 장치가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기름칠을 제대로 하지 않아 경첩이 부서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안쪽에는 좁고 기다란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좌우로 쇠창살이 마구 나있는 게 마치 감옥을 연상케 했다.
얼마 전까지 꽤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던 건지, 곳곳에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했다.
핏자국이며 벽면을 따라 난 손톱자국, 몸을 던져 부딪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
우-
유령들도 꽤 많이 배회하고 있었다.
얼추 잡아도 수천 마리.
‘인간 농장인가.’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짐작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규모일 줄은.
게다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봤던 문들을 떠올려 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는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감각을 넓게 퍼뜨려 봤지만, 이렇다 할 생존자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두 기척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 사람들이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그새 모두 어떤 ‘처분’이라도 받은 걸까?
“…….”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짜증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러다 복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다다랐을 때.
연우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쇠사슬로 벽에 단단히 묶여 있던 두 사람, 칸과 도일의 초췌한 모습을.
* * *
휑한 감옥에는 칸과 도일만 남아 있었다.
“니미. 대체 아까 전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칸은 짜증 섞인 얼굴로 고개를 위로 들었다.
적이 쳐들어왔다는 말에 황급히 밖으로 나가던 빌드와 수하들. 그 모습만 보면 뭔가 큰일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도통 짐작할 수 없으니 답답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까 전부터 건물이 요란스럽게 흔들리는 걸 보니 얼마 가지 않아 폭삭 내려앉을 거란 것.
“좀 멋있는 일 좀 해 볼까 했더니, 생매장 신세라니. 어떻게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냐?”
칸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웃음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형. 말은 똑바로 하자.”
그때 여태 축 처져 있던 도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기저기 다쳤어도, 여전히 나른해 보이는 눈빛을 하면서.
“재수가 없는 건 형이고 나는 아니지. 나는 그냥 형 따라다니다가 불똥 튄 거고.”
“어쭈? 그럼 넌 재수가 좋아서 나랑 같이 붙잡혀 있는 거냐?”
“재수 옴 붙었다는 말도 있잖아.”
“오늘 따라 너 좀 많이 개긴다?”
“예전부터 다짐했던 게 있거든. 죽을 거면 그 전에 형한테 한 번 개겨 보는 거.”
“언제는 네가 동생 노릇을 참 잘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두 사람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상태에서도 서로 티격태격하기 바빴다.
그만큼 서로를 각별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지만.
“에휴. 됐다. 그만하자. 계속 싸워서 뭐가 남겠냐. 그보다 카인 녀석은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칸은 문득 하르간을 잡자고 같이 뛰어다니던 친구 아닌 친구를 떠올렸다.
무뚝뚝했어도, 손발은 참 잘 맞았었는데.
“글쎄. 우리가 없어도 잘 나갈 형이니 지금쯤 G구획으로 넘어가고 있지 않을까?”
“그렇겠지?”
도일의 말에 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이 꼴 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거 위치나 말해 줄걸 그랬나? 우리 대신 좀 잘 써 달라고.”
칸은 도일과 함께 마지막에 얻고 싶었던 히든 피스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판트 남매를 잡기 위해 얻고자 했던 무기.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지금이라도 말해 줘도 괜찮다만.”
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칸과 도일은 ‘설마?’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위로 들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 끝에서.
야광주의 조명이 겨우 닿는 바닥을 따라 하얀 가면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연우였다.
“너……!”
“카인 형!”
칸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연우를 보며 소리쳤다.
도일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걱!
끼잉-
연우는 단검으로 결을 따라 쇠창살을 가볍게 잘라 내면서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군.”
그는 칸과 도일을 위아래로 훑으면서 피식 웃었다.
칸의 표정이 조금 복잡해졌다.
반가움, 의아함, 미안함, 고마움. 그러다 고개를 옆으로 픽 돌렸다.
헤어질 때는 참 모질게 대했었는데.
괜히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가 싫었다.
도일이 대신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연우는 카르슈나의 단검을 휘둘러 두 사람을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을 끊었다.
깡!
깡!
이어서 두 사람의 손목에 매달려 있던 마력 구속구도 결을 따라 자르면서 대답했다.
“스캐빈저들이 자꾸 귀찮게 해서. 알고 보니 정체가 아랑단이더군.”
그냥 지나가던 길에 들렀다는 투.
도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배시시 웃었다. 어떻게 여길 찾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칸은 여태껏 자신들을 괴롭히던 구속구가 쉽게 떨어져 나가는 걸 가만히 보다가, 연우를 보면서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고맙다. 정말.”
“정말 고맙다 싶으면 아까 전에 말한 히든 피스라는 걸 줘도 된다만.”
“니미. 하여간 손해 보는 장사는 죽어도 안 하려고 하지.”
저러니 신비 상인을 등쳐먹는 것도 가능한 거겠지.
칸은 그렇게 투덜거리다 곧 피식 웃어 버렸다.
이게 연우 나름대로 자신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꺼낸 농담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워낙에 무뚝뚝한 녀석이니 살가운 말을 죽어도 못하는 거겠지.
칸은 몸을 옥죄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자 마력을 유동시켰다.
몸 여기저기가 비명을 질러 댔다.
이런 몸으로 과연 제대로 탈출이나 할 수 있을까.
그동안 몸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 막막해졌다.
연우가 무슨 일을 꾸몄는지는 몰라도, 이런 몸으로 나갔다는 짐짝밖에 되지 않았다.
도일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칸은 연우에게 자신들은 그냥 두고 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잊지 않고 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우니, 뒷일은 알아서 할 테니, 더 무리하지 말고 가라고.
하지만.
연우는 그런 칸의 생각을 읽었는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아랑단은 전부 죽었으니 신경 쓸 것 없다.”
칸과 도일이 화들짝 놀랐다.
“아랑단이 전멸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몬스터 러쉬와 연우의 활약에 대해서 모르는 두 사람으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칸은 가만히 눈살을 좁히다가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연우가 저런 태도를 보이면 절대 쉽게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으니까.
다만, 도일은 싱긋 웃고 있었다.
“형이 놈들을 전부 잡은 거로군요.”
“어쩌다 보니.”
연우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칸이 발끈했다.
“야! 도일이 묻는 건 대답해 주면서, 왜 내가 묻는 건 무시하는 건데?”
연우는 그런 칸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 대답하기 귀찮다는 뜻.
“으으.”
칸은 그런 연우가 얄미운지 주먹을 꽉 쥐면서 부르르 떨었다. 이럴 때는 힘이 없는 게 죄였다.
그러다 연우가 내뱉은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직 빌드란 놈은 살아 있지만.”
“뭐? 빌드가?”
칸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도일도 얼굴이 딱딱해졌다.
“설마……? 녀석이 이 아래로 내려간 건 아니겠지?”
연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뭔가를 숨겨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이 아래에 뭐가 있나?”
“나도 정확하게는 잘 몰라. 하지만 이 새끼들, 대체 뭘 꾸미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플레이어들을 제물 삼아서 뭔가를 만들고 있는 건 확실해.”
“뭔가를 만들고 있다고?”
제물로 쓰일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큰 값을 지닌 건 인간의 피륙과 영혼이었다. 그리고 연금술에서 가장 고위로 치는 게 바로 인체를 이용한 연성이었다.
하지만 탑에서도 그런 행위는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단순히 비인륜적인 금기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탑이 마계에 의해 침식이 될지도 모를 정도로.
그런데도 영혼과 피륙을 수백 수천이나 들여서 만드는 물건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결국 골 때리는 짓만 일삼는군.’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차면서 카르슈나의 단검을 다시 뽑았다.
어차피 빌드는 독 안에 든 쥐였다.
칸과 도일도 구했으니, 마저 쫓아가서 멱만 따 오면 그만.
그리고 그들이 여태 대체 뭘 만들려고 했는지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칸과 도일에게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려던 그때.
우- 우-
연우의 눈에 여기까지 쫓아온 유령들이 보였다.
녀석들은 계속 연우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마치 빌드를 잡는 데 자신들도 낄 수 있게 해달라는 듯.
연우는 방해만 할 것 같은 녀석들을 내쫓으려다가, 순간 머릿속으로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너희들도 거들고 싶다는 거겠지?”
우우-
유령들이 그렇다는 듯 울음소리를 냈다. 연우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렇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들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