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두 개의 심장 (8)
지하 계단 끝.
빌드는 다급하게 철문을 활짝 열었다.
실내는 수백 개의 유리관이 천장, 벽면, 지반을 따라 설치되어 넝쿨처럼 뒤엉킨 이상한 방이었다.
하지만 빌드는 그런 유리관들을 지나, 가장 깊숙한 곳에 놓여 있는 보라색 돌 앞에 섰다.
돌은 수많은 유리관을 통해 뭔가를 쉴 새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붉으면서도 시커먼, 탁한 기운.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희생시켜 만들어 낸 이름 모를 에너지였다.
빌드 등은 지난 몇 년 동안 이 에너지를 ‘정수(精髓)’라고 불렀다. 그리고 어떻게든 더 많이 양산해 내고자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빌드는 유리관을 마구잡이로 뜯었다.
정수가 아깝게 밖으로 줄줄 새면서 금세 증발해 공기를 탁하게 물들였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오로지 보라색 돌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덜덜덜…….
빌드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길로 보라색 돌을 조심스레 들었다.
이것 때문에 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허비했던가.
그동안 동료들이 더 높은 층계를 올라 강해질 때에도, 그는 꾹꾹 참으면서 이것을 만들어 내고자 애썼다.
언젠가 주인에게 바쳐, 그 분이 진정한 ‘왕’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래서 왕의 오른팔이 되고 싶었다. 절대적인 힘과 권력을 손에 넣어 탑 위에 군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빌드는 살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돌이 절실히 필요했다.
희망을 가져다주면서 절망도 함께 가져다주었던 물건.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힘을 가져다줄 물건이기도 했다.
빌드는 입을 쩌억 벌려 돌을 한 입에 삼켰다.
주먹만 한 크기라 먹기가 버거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돌은 몇 번씩 정제한 정수를 고밀도로 농축하고, 또 압축해서 만든 결정체였다.
주인은 이것을 그냥 입에 넣어 삼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양의 마력이 생성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둘 중에 하나라는 말도 덧붙였다.
육체가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폭발하거나, 아니면 극단적으로 변화하거나.
‘완성된’ 돌이라면 폭발할 위험이 전혀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지만.
지금의 빌드는 최대한 돌이 완성품에 가깝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꿀꺽 삼키고, 체내에서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무, 뭐지?”
빌드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돌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넘어가는 건 느껴졌다.
그렇다면 곧바로 어떤 일이라도 벌어져야만 하는데.
하지만 단순히 그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에 빌드는 소리를 질렀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자신이 뭐 놓친 거라도 있었나?
빌드는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어떤 실수를 한 건 아닐까, 혹시 돌을 삼키는 과정에서 빠뜨린 게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같이 가졌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전혀 없었고,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악귀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을 테니까.
빌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손가락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일단 돌을 게워 내고 다시 삼킬 생각이었다.
안 된다면 될 때까지.
돌이 제대로 개화할 때까지.
그래서 몇 번의 헛구역질 끝에 돌을 토해 냈다.
돌은 여전히 요사스럽게 보라색 빛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빌드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면서 돌을 주워 다시 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은 꿈쩍도 않았다. 그래서 또 삼키기 위해 도로 토해 내야만 했다.
그런 식으로 빌드는 몇 번씩 게워 내고 삼키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위액도 같이 바닥에 질질 샜다. 그래도 돌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어째서!”
빌드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어째서어!”
토해 낼 때마다 보라색 돌은 한결같이 요사한 빛을 뿌렸다. 돌 안쪽에 담긴 정수도 계속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돌은 빌드에게 개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꺾이지 않으려는 장미처럼. 가시를 잔뜩 세워 너 따위는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는 듯이 고고하게 굴었다.
그런 점이 빌드를 점점 미치게 만들었다.
지금쯤 악귀가 남은 망석중이들 마저도 모두 해치우고 머리맡까지 다가왔을 거라는 불안감이, 공포심이, 그를 자꾸만 궁지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고.
끼이익.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창고 안쪽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빌드는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
연우가 차갑게 웃고 있었다.
“기껏 도망친다고 친 곳이 고작 이런 곳인가?”
빌드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쩍 벌린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공포심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목을 꽉 조르는 것만 같았다.
“그게 너희들이 만들려고 했다던 ‘돌’인가? 겉보기엔 별 것 없어 보이는데. 뭐가 좀 잘 안 되나 보지?”
연우는 빌드가 꼭 끌어안고 있던 보라색 돌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빌드는 화들짝 놀라면서 돌을 도로 입에 넣어 삼켰다.
하지만 연우는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만든 물건이, 고작 저딴 실패작이라니.’
[보랏빛 돌]
확인 불가. 열람 불가.
돌은 아무런 정보도 확인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미완성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제조 과정에 문제가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하나.
사용도 불가능하다는 뜻.
그런 것을 아무리 미친 듯이 입 속으로 욱여넣어 봤자 나아질 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용마안으로 살펴봤을 때에도, 보라색 돌은 온통 결로 가득했다.
아니, 가득하다 못해 아예 실타래처럼 뒤엉켜서 점처럼 보였을 정도였으니.
보통 저런 물건은 F등급의 쓰레기로 분류되기 마련이었다.
연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리언트가 그렇게 천문학적인 시간과 자금을 들여서 만든 물건이 고작 저딴 것이었으니.
저런 건 갖고 있어도 약점 따위도 되지 못했다. 그냥 없애 버리는 편이 오히려 속 편했다.
그래서 연우는 빌드가 다 먹길 기다렸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다 먹었나?”
“으으……! 으으!”
빌드는 질질 짜기 시작했다. 여전히 돌은 아무런 작동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희망은 산산조각 나다 못해 아예 으스러졌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오지 말라며 속으로 외쳐 댔지만, 연우는 싸늘한 눈을 하면서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 체!”
악귀의 그림자가 목젖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쩍 벌린 입에서는 단내 섞인 목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대체 왜!”
말문이 한 번 터지자 속사포로 속내가 쏟아져 나왔다. 빌드는 악에 바친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왜! 나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거냐? 우리가 대체 너에게 뭘 했다고! 우리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너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까지, 왜 여기까지 간섭을 하는 거냔 말이다!”
빌드는 정말이지 연우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만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모든 게 순조롭게 풀렸을 테니까.
주인은 온전한 돌을 손에 넣었을 테고, 자신은 원하던 대로 권력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원하던 대로 탑으로 넘어가 승승장구했을 것이다.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타인의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자기 일만 하면 되었을 텐데.
왜 이런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빌드는 자신이 연우를 몇 번씩이고 잡으려 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사람은 자신이 당한 일만 떠올릴 뿐.
자신이 저지른 일은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때.
피식-
“왜 괴롭히느냐라.”
가면 사이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냐고 물었지? 무슨 원수를 졌냐고.”
연우는 천천히 가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거면 답이 되나?”
연우는 가면을 완전히 벗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얼굴.
순간, 빌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제는 공포심을 넘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전신을 지배했다.
여기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으니!
연우는 정우의 얼굴로, 정우의 눈으로, 정우의 목소리로 빌드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아마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너희들이 보고 싶었는지.”
“……!”
빌드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아예 나오질 않았다. 도망치려 해도 어느새 막다른 곳에 내몰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연우는 카르슈나의 단검을 역수로 쥐면서 다가갔다.
칼날은 그의 미소만큼이나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 * *
아아아악!
곧 지하 계단을 따라 거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죽…… 여 줘.”
여태껏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빌드의 입에서 처음으로 죽여 달라는 말이 나왔다.
녀석은 이미 더 이상 ‘사람’이라고 말하기 힘든 상태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그저 남은 건 떠들 수 있는 입과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뇌뿐.
그만큼 빌드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시간. 차라리 죽어서 편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연우는 녀석의 몸에다 많은 것을 물었다.
빌드의 정신은 분명 피폐해져 있었다. 죽은 자가 돌아왔다는 충격에 실어증이 걸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육체는 달랐다.
왼팔이 잘리면서 피를 많이 쏟은 것 외에는 아직 성한 곳이 많았다.
그런 곳을 들쑤셔서 질문을 계속 하다 보면, 피폐해진 정신도 되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덕분에 연우는 녀석을 통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정우가 죽고 아르티야가 해체된 이후.
8대 클랜의 연합의 목적이 사라진 이후.
탑은 큰 변화를 맞았다.
세력 판도가 여러모로 바뀌었고, 옛 아르티야의 멤버는 각지에서 제 살 길을 도모했다. 각자가 원하던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런 일을 겪고도 녀석들은 늘 살던 삶을 계속 이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삶은 도중에 가로막혔는데 말이다.
‘그래. 처음부터 그랬던 거겠지. 정우와 다르게, 너희들에게는 이런 게 너무 당연한 일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그래도 누군가 하나쯤은 조금 미안한 감정이라도 가졌을까 싶었지만.
어차피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우는 오히려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마음 놓고 날뛰어도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제…… 발.”
그때 빌드가 다시 겨우 내뱉은 말이 연우의 상념을 깨웠다.
피식.
연우는 자신이 깔고 앉은 고기 덩어리를 보며 물었다.
“죽고 싶나?”
“제…… 발.”
“그런데 어쩌지? 난 청개구리라서, 부탁을 들으면 정반대로 들어 주고 싶은데 말이야.”
“제…… 발!”
“게다가 나 말고도 너를 애타게 찾는 친구들이 많더군.”
연우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츠츠츠-
허공을 따라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더니, 그사이로 하나둘씩 하얀 유령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무려 수천.
원래 창고 속 인간 농장에 묶여 있었지만, 모두 연우가 검은 팔찌를 통해 강화시킨 유령들이었다.
검은 팔찌는 귀속시킨 망령을 소비해 암흑 속성의 마력을 발산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마력을 유령에게 불어 넣으면 한 단계 위로 강화시킬 수가 있었으니.
이게 바로 사귀(邪鬼)의 탄생이었다.
억울하게 돌의 재료가 되어야만 했던 망자들은 어떻게든 빌드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꺼이 연우의 종복이 되기를 자처했고, 덕분에 사귀가 되어 빌드 앞에 오롯이 나타날 수 있었다.
빌드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제발 죽여 달라는 애원. 원하던 대로 아는 걸 전부 말했으니 편히 보내 달라는 간청이었다.
하지만 그의 처절한 절규는 여러 사귀들이 내뱉는 귀곡성에 완전히 파묻히고 말았다.
끼익, 철컹!
연우는 들어왔던 그대로 철문을 도로 닫았다. 아마 앞으로 영원히 이 문이 열릴 일은 없을 터였다.
그리고 다시 나선형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