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화. 종료 (1)
아랑단의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 위.
연우는 고요한 눈길로 아랑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츠츠츠-
무너진 폐허 사이사이로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퍼진다. 마치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죽은 시체 위로도. 내려앉은 지면 위로도. 부서진 건물 잔해 사이로도.
사귀들이 볼일을 끝내고 다시 근원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연우는 그쪽으로 손을 뻗으면서 열기 스킬을 발동, 자그마한 불씨를 당겼다.
그리고.
콰아앙! 쾅! 콰쾅!
불씨는 안개를 따라 퍼져 나가면서 불의 해일이 되었다. 아랑단의 본거지를 뒤덮었다.
불기둥이 치솟고, 땅거죽이 뒤집혔다.
마치 이 땅 위에 아랑단과 관련 된 모든 걸 날려 버리려는 것 같았다.
콰르르-
폭발은 한참 동안 이어진 뒤에야 겨우 사그라졌다.
하지만 그러고도 여전히 곳곳에 저주 받은 불길이 남아 불씨를 틔웠으니.
새카맣게 그을린 대지와 흉험한 폐허만 남아, 원래 이곳에 튜토리얼을 지배하던 아랑단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었다.
-고…… 마워.
-덕분에…… 이제 쉴 수…….
어디선가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콰아아-
연우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재와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밤하늘.
달이 오늘따라 더 밝았다.
* * *
연우는 다시 폐허를 찾았다.
혹시 자신이 빠뜨리거나 흔적을 남긴 게 있나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연우는 내려앉은 건물 잔해 사이로 시커멓게 타 버린 채 죽은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했던 건지, 엉금엉금 기어서 밖으로 나오려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형체는 알아볼 수 없어도, 빌드라는 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죽고 싶다더니. 마지막엔 오히려 살고 있었나?”
연우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 사람은 상황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는 간사한 존재들이었다.
연우는 감각 영역을 최대한으로 확장시켜 폐허를 샅샅이 훑었다.
혹시 빠뜨린 생존자가 있나 싶어서 꼼꼼하게 살폈다.
다행히 기척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불 폭풍 때문인지 쥐새끼 하나 찾기 힘들었다.
‘하긴. 그런 폭발 속에서 살아남는 게 이상할 정도니.’
아랑단은 이것으로 완전히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우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때.
“음?”
파스스.
연우는 뭔가 흐트러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은 빌드의 사체가 마침 불어 오는 바람에 잘게 부서져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보라색 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돌은 여전히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지하에서 봤을 때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날아간 게 아니었나?”
연우는 참 끈질긴 돌이다 싶었다.
이왕이면 폭발과 함께 날아가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컸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찾아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돌은 아무래도 실패작 주제에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연우는 일단 자신이 수거했다 나중에 방법이 생기거든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백수천의 영혼과 피륙이 담겨 있는 돌.
어쩌면 실패작이 아닌 미완성품이라, 다른 방법을 찾으면 완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순간 자신이 가질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갈구하고 적의 약점을 틀어쥐고 싶어도, 그런 꺼림칙한 걸 손에 쥐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한 정우에게 부끄러운 형은 되지 말아야 할 테니까.’
그래서 돌을 줍기 위해 손을 뻗는 그 순간.
화아악!
눈이 부실 정도로, 보라색 돌이 환한 빛무리를 터뜨리고.
츠츠츠.
흐물흐물 녹으면서 연우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
연우는 흠칫 놀라 손을 거두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라색 액체는 모공을 타고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혈관을 따라 꾸역꾸역 심장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개미 떼가 몸속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기분.
연우는 어떻게든 액체를 밖으로 밀어내고 싶었지만, 마력회로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연우는 보라색 액체가 체내에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 가만히 몸을 부르르 떨고 있어야만 했다.
액체는 심장 바로 옆 부분에 놔리를 틀었다.
다시 하나로 뭉쳤다.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압축되면서 구슬만 한 크기가 되었다.
파아아-
연우는 구슬이 완성된 뒤에야 겨우 보이지 않는 속박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잔뜩 굳은 얼굴로 심장 옆에 자리 잡은 ‘돌’을 면밀히 살폈다.
‘뭐지, 이건?’
두근.
두근.
심장 옆에 또 다른 심장이 하나 더 생긴 느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자꾸 이질감이 느껴져 마력을 유동시켜 돌을 어떻게든 밀어 보려 했지만 꿈쩍도 않았다.
도리어 마력은 돌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면서 보호를 하려하고 있었다.
마치 원래 있던 마력회로의 부품인 것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작 돌은 가만히 앉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데.
연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 심리적 압박을 쉽게 받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꺼림칙한 힘이 체내에 자리 잡았으니. 영 찝찝하기만 했다.
게다가 이건 어떤 작용이나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의념을 집중해서 돌을 자세하게 살폈다.
다행히 정보는 이전보다 많이 열람할 수 있었다.
[???한 ???의 돌]
분류: ???
등급: ???
설명: ???
* ???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봉인)
**이 아티팩트는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게 비밀에 붙여 있습니다. 재질이며, 등급, 옵션 등 아무런 정보도 열람하실 수 없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아티팩트입니다. 아티팩트를 완성해 주십시오. 그래야만 봉인된 정보를 열람할 자격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알아낼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인가?’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이 돌은 단순한 실패작이나 불량품이 아닌 미완성품이라는 것. 그리고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별다른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완성 전까지는 심장 옆에 자리만 잡고 있을 뿐,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
연우는 결국 미련을 떨치고 머리를 털었다.
여기에 집중해 봤자 당장 더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돌을 완성시킬 마음도 없었다.
‘찝찝하지만 계속 놔두는 수밖에.’
나중에 빼낼 방법이 생기면 그때 가서 제거하면 될 일.
당장 몸에 어떤 영향만 미치지 않는다면 괜찮았다.
‘이제 전부 끝났나.’
연우는 폐허가 된 주변을 한 번 더 살피다가 가볍게 땅을 박찼다.
이제 여기서 볼일은 전부 끝났다.
튜토리얼에서 겪었던 하루 중에서 가장 길고 치열했던 하루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 * *
연우는 가면을 다시 쓰고 폐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찾았다.
칸과 도일을 따로 피신시켜 뒀던 장소였다.
“이제 끝났으니 나와.”
바위 숲 사이로 칸과 도일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씨익.
칸이 그를 보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역시 너는 스케일이 달라.”
“무슨 소리지?”
“참 거창하게도 깽판 쳐 놨다고. 우리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너는 얘네들이랑 무슨 척을 졌기에 이딴 꼴로 만드냐?”
연우는 대답 없이 가볍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알아서 생각하라는 의미.
처음 구해 줬을 때와 똑같은 태도. 칸은 가볍게 투덜거렸다.
“하여간 또 저놈의 신비주의.”
그때, 도일이 물었다.
“형, 그럼 빌드는?”
“죽었다.”
“잘됐네요. 그건.”
도일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웃는 입가와 다르게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놈은 자신의 손으로 해치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사실이 내심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딴 일을 저지른 청화도에 대한 분노가 가슴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도일은 하르간의 둥지 때처럼 무작정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 깊숙한 곳에다 차분히 가라앉혔다.
연우가 했던 충고도 있었고, 이번 일로 확실히 크게 깨달은 것도 있었다.
힘이 없는 용기는, 단순한 만용에 불과하다는 것.
이 분노를 터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을 가져야만 했다.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절대 꿀리지 않을 힘을.
그런 도일의 생각이 전해진 걸까.
칸은 가만히 그런 도일을 살펴보다가, 들으라는 듯이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아아, 빌어먹을 새끼들도 다 뒈졌고.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니미. 이제는 몸이 말썽이네. 조금만 걸어도 속이 울렁대니 원.”
도일이 상념에서 깨어나 칸을 돌아봤다.
사실 그동안 부상을 입고 제대로 치료도 못하고, 끼니도 제대로 못 먹었기 때문에 몸이 한계에 봉착한 상태였다.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도일아.”
“으, 응?”
“우리 아무래도 여기까진 거 같지?”
도일은 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으으. 여기까지 굴러다닌 게 아까워 죽겠네.”
게다가 아랑단이 전멸하면서 긴장감도 확 풀렸으니. 피로도 한데 몰려오는 것 같았다.
칸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뭔가를 다짐한 듯 홱 하고 연우를 돌아봤다.
“카인, 넌 이제 어디로 갈 거냐? 당연히 G구획으로 갈 거지?”
연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그럼 이거 받아라.”
“……?”
연우는 얼결에 칸이 던지는 주머니를 받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열어 보다 살짝 눈이 커졌다.
안쪽에는 하르간의 왕관과 증표가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나와 도일이 그동안 쓸 거 안 쓸 거 바득바득 아껴 가면서 모은 것들이야.”
도일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가 눈살을 좁혔다.
“대가를 갚으려는 거라면 필요 없으니 도로 갖고 가. 이딴 거 챙기려고 온 게 아니니까.”
연우는 보상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뜯어낼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칸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런 거 아냐.”
“그럼?”
“우리는 이만 리타이어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