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종료 (2)
“뭐?”
뜻밖의 말.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칸은 뭘 그리 놀라냐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네가 신나게 깽판 치고 있을 때, 도일이랑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해 봤거든. 어차피 이런 몰골로는 G구획으로 못 가. 가 봤자, 순위도 유지 못하고 밑에 있는 놈들한테 잡아먹힐 게 뻔하고.”
도일이 말을 받았다.
“그래서 저희는 그러기 전에 깨끗하게 이번 회차는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려고요. 사실 1, 2위가 아니면 의미가 없기도 하고 말이죠.”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튜토리얼을 1위로 지나친 자에게는 상당한 보상이 주어진다.
자신이 악착같이 공적치를 모으려고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칸과 도일도 그걸 노렸던 것 같았다.
다만,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회차를 포기하고, 재도전을 할 수 있나?”
“응? 모르셨어요? 원래 튜토리얼은 몇 번에 걸쳐서 도전을 하는 플레이어도 꽤 많아요. 탑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때까지요.”
“…….”
아주 당연한 상식이 아니냐는 눈빛.
연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생은 여기에 대해서 별다른 언급을 해 놓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연우는 여태 튜토리얼이 생애에 단 한 번만 도전할 수 있는 줄로만 알았다.
‘이 자식이, 진짜.’
결국 연우는 그동안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숱하게 해 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피식.
‘그래도. 재미는 있었지.’
그렇다고 해서 후회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튜토리얼이 열리는 건 시기가 매번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었다.
탑이 원할 때에 열린다.
그러니 다음이라고 해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빌드도 잡을 수 있었고. 괜찮은 놈들도 만났고.’
가면 아래, 연우의 눈가가 살짝 호선을 그렸다.
“그래서 나더러 이걸 갖고 가라는 건가?”
“어차피 그냥 버리는 것보단 누가 쓰는 게 좋잖아? 게다가.”
칸이 대답하면서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너라면 왠지 판트와 에도라, 그 재수 없는 것들 낯짝에다 주먹이라도 꽂아 줄 것 같아서 말이야. 흐흐흐!”
도일이 옆에서 가볍게 혀를 찼다.
“형. 그거 알아?”
“뭘?”
“지금 되게 추해 보여.”
“닥쳐, 새까.”
“자기가 못할 거 같으니까 카인 형한테 떠넘길 생각이나 하고. 하여간 인성 하고는.”
“시끄러, 인마. 이렇게라도 해야 내 배알이 안 꼴릴 것 같은데 어떡하라고?”
연우는 티격태격대는 두 사람을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몇 번이고 보고 들었던 이름.
튜토리얼 랭킹을 확인할 때마다 항상 상위를 장식하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G구획에서 반드시 꺾어야 할 자들.’
단둘이서 아카샤의 뱀을 잡은 실력자들이기도 했다.
“그 둘은, 어떤 사람들이지?”
“그것들?”
칸은 뭐라고 말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괴물들.”
언제나 장난치기 바빴던 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지했다.
“내가 몇 번이고 넘어 보려고 애썼지만, 그럴 수 없었던 괴물 새끼들이었어. 그것들은.”
이를 바득바득 가는 칸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은 ‘열등감’이었다.
연우는 판트와 에도라라는 두 사람이 어떤 존재일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자신이 알기로도 칸은 분명히 실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튜토리얼에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그런 칸이 열등감을 느끼고, 괴물이라고 표현할 정도라면.
대체 어떤 실력을 갖고 있을까?
칸은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그러니까 그거 갖고 확 1위 해 버려. 그럼 우리는 너한테 우승을 양보한 게 되고. 서로서로 얼마나 그림이 좋냐? 캬!”
연우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칸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챙겼다.
“좋아. 너희들의 몫까지, 열심히 해 보지.”
“그래그래. 바로 이런 거거든. 경쟁에서 싹 트는 남자들의 의리. 우정. 스포츠맨십. 크으! 내가 그렇게 바라던 그림이 바로 이런 거란 말이지!”
“……지랄한다.”
칸은 옆에서 이죽거리는 도일에게 중지를 펴 보인 다음, 연우를 보면서 말했다.
“아무튼 끝까지 잘해 봐라, 브로(Bro).”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하르간의 왕관을 꺼내 머리에 썼다.
가면에다 왕관까지 쓴 우스꽝스러운 모습.
칸과 도일이 그게 뭐냐며 옆에서 낄낄 웃어 대자, 연우도 따라서 같이 웃고 말았다.
꼴은 웃길지 몰라도, 지금은 다른 때보다 훨씬 마음이 든든했다.
그리고.
한참 웃은 뒤에,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 시간은 겨우 이틀.
남은 구획은 하나.
마지막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달려야 했다.
타이머는 이 시간에도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28:43:11_90]
* * *
[20:02:33_76]
하르간의 왕관을 필요로 하는 히든 피스는 지하 가장 깊숙한 곳, 가시 두더지‘들’의 둥지에 숨어 있었다.
연우는 칸과 도일이 가르쳐 준 대로 내려가면서 가시 두더지들을 일일이 퇴치하고, 마지막 방에서 보스 몬스터와 부딪쳤다.
[15:55:41_82]
녀석은 강했다.
아카샤의 뱀과 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공략법인 하르간의 왕관이 없었다면 둥지에 파묻히거나, 보스 몬스터에게 먹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연우는 긴 싸움 끝에 겨우 녀석을 쓰러뜨렸고.
쿵!
마침내 커다란 바위에 꽂혀 있던 검을 뽑을 수 있었다.
비그리드(Vigrid).
칸과 도일이 판트 남매를 넘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최후의 패.
그리고.
연우는 검을 등에 걸며 마지막 구획으로 통하는 경계선을 통과했다.
[12:01:38_26]
튜토리얼이 끝나기 딱 한나절을 앞둔 시점이었다.
* * *
“오효효효. 아무리 봐도 이분은 정말이지 대단한 욕심꾸러기 같아요. 아카샤의 뱀에, 아랑단까지 먹어 치우더니, 이제는 비그리드까지 손에 넣으셨단 말이지요?”
이블케는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스크린을 보는 내내 크게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다.
일주일이나 늦게 튜토리얼을 참가한 주제에 ‘기다렸다는 듯이’ 히든 피스를 독식하고, 결국에는 아랑단까지 날려 버린 플레이어.
정말 보면 볼수록 신기한 존재였다.
어떻게 이런 녀석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리고 연우가 마지막 G구획에 입장한 이때.
남은 시간도 불과 12시간밖에 되지 않은 이 시점에서 또 어떤 볼거리를 제공할지.
이블케는 기다리는 즐거움이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자고로 이런 아주 재미 난 것들은, 나만 알고 있을 때서야 비로소 가장 크게 빛을 발하는 법이지요.”
이블케는 허공을 가볍게 두들기면서 연우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을 빠른 속도로 ‘1급’에 지정하기 시작했다.
관리자들 중에서도 웬만한 최고위직이 아니면 절대 열람할 수 없는 보안 등급.
최근에 관리자들 중에서 자신의 직분을 내팽개치고, 일개 플레이어들과 사사로이 거래를 트는 자들이 있다고 했다.
이런 건 단단히 봉인을 해 둬야만 뒤탈이 없었다.
이블케는 그렇게 모든 열람권을 차단한 뒤.
다시 양손을 깍지 끼면서 턱을 괬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스크린에서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F구획을 솔로 플레이로 통과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체력과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튜토리얼의 마지막 구획, G구획에 입장했습니다.]
화아악!
빛무리가 가시면서 바뀐 광경이 드러났다. 연우는 하늘 한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어느 대리석 바닥 위에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는 하늘로 이어지는 계단이 끝도 없이 놓여 있어, 마치 이곳으로 오라는 듯 유혹을 해 댔다.
그리고 계단 너머.
구름 위에 떠 있는 드넓은 무대 위에서는 강렬한 기파가 수도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쾅! 콰쾅!
분명 그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강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곳이 바로 G구획의 마지막 스테이지.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연우는 눈을 빛내면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G구획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당신은 여태 6개의 구획을 성공적으로 통과하면서 자신이 탑에서 필요로 하는 도전자임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탑은 여전히 도전자들에게 더 많은 공적치와 자격 증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다른 도전자를 꺾어 공적치를 강탈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많은 도전자를 상대해 최대한 많은 공적치를 쌓고, 자격을 증명하십시오.
높은 공적치를 쌓을수록, 높은 순위를 기록할수록 더 높은 보상이 지급됩니다.]
G구획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메시지의 내용처럼 G구획까지 왔다는 것은 이미 자신을 충분히 증명했다는 뜻.
탑에서도 통할 만한 실력을 갖고 있단 뜻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나서는 신이 되고자 하는 수련자라고 할 수 없었다.
신이 되고자 한다면,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며, 탐욕과 야망이 많아서 정체(停滯)를 몰라야만 한다.
그래서 G구획에서는 결투를 통해 상대가 가진 공적치를 가져오는 게 가능했다.
E구획과 F구획이 증표 쟁탈전 때문에 내용이 비슷했다지만, 여기서는 보다 더 노골적으로 플레이어들 간의 대립을 요구했다.
최상위 주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당연히 그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조성될 수밖에 없었다.
G구획은 간단하게 배틀 로얄이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독식할 수 있는 시스템.
때문에 플레이어들 간의 순위 경쟁이 치열했고, 하위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든 상위 플레이어들을 끄집어 내리기 위해 연합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혼란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플레이어를 상대하고 힘이 빠지거나, 기습이라도 받아 공적치를 잃으면 큰일이었으니까.
때문에 이곳은 플레이어들 간의 눈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아수라장이었다.
동생은 G구획을 딱 두 개로 줄여서 표현했다.
배틀 로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수라장.’
최상위 플레이어들 간의 난잡한 혼전이 벌어지는 장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순위 변동이 수도 없이 일어나, 마지막 역전을 꾀할 수 있는 곳.’
탁!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드넓은 스테이지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스테이지에 있던 플레이어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쏠렸다.
“뭐야, 저놈은?”
“혈검이나 폭시 테일일 줄 알았는데. 뭔 이상한 놈이 나타나?”
“혈검과 폭시 테일이 리타이어했다는 말도 있던데. 진짠가?”
“그거야 나중에 알게 될 일이고. 튜토리얼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슬렁슬렁 나타난 걸 보니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스테이지 위에 서 있는 플레이어는 대략 70여 명.
그중 50여 명이 한창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고, 남은 20여 명은 부상을 입거나 기권을 하면서 외곽에 있는 안전지대에 몰려 있었다.
난데없는 연우의 등장에 관심을 보인 건, 그런 안전지대에 있는 플레이어들이었다.
G구획의 스테이지는 크게 두 개로 분류되었다.
휴식을 취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외곽의 안전지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로 간에 공적치를 빼앗을 수 있는 내곽의 전투 지대.
어차피 안전지대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대게 자신의 순위에 만족해하거나, 탑에 입성할 자격을 얻는 것에 의의를 두는 자들.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연우는 그들이 뭐라고 떠들건 말건 간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에 스테이지 중앙에 위치한 전투 지대의 상황을 살폈다.
쿵!
“오. 날 앞에 두고도 딴 곳을 볼 여유가 있다는 건가? 이거 여태 못 알아봐서 되게 황송한데? 으하하핫!”
전투 지대는 특이하게도 50명가량 되는 플레이어들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에워싼 형태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여자는 가장 후방에 서서 가만히 팔짱만 끼고 있을 뿐.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듯이 앞으로 나서면서 다른 플레이어들을 압박하고 있는 상태였다.
단지 기세만으로.
고오오!
“괴물 같은……!”
“제길! 저딴 게 튜토리얼에 있다고? 말이 돼?”
분명히 둘러싼 플레이어들 쪽의 머릿수가 월등하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기의 폭풍에 겨우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이를 악물고, 하체에 힘을 주며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 힘을 썼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스테이지를 연신 울려 댔다.
보랏빛 머리칼에 금색 눈. 아랫 입술을 살짝 비집고 나온 송곳니. 2미터는 넘을 것 같은 건장한 체구.
흔히 플레이어들이 아무리 기동성을 중요시한다고 해도 경장갑 정도는 입는 데 반해, 남자는 품이 넓어 움직이기 불편할 것 같은 고대 도복 같은 신비로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오른쪽 관자놀이를 뚫고 꼿꼿하게 선 뿔이었으니.
‘외뿔부족.’
탑에 존재하는 여러 이종족 중에서도 ‘무의 화신’이라 불린다는 존재들.
남자는 패기를 발산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스테이지를 발아래에 두고 있었다.
연우는 그런 녀석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판트.’
튜토리얼 랭킹 2위.
칸과 도일이 그토록 넘어 보려고 애썼지만, 끝내 넘을 수가 없었던 벽.
그가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렸다.
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