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종료 (3)
단순한 발 구름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천둥이 친 것처럼 폭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플레이어들은 더 짙어진 패기에 압도되어 움찔 뒤로 물러섰다. 힘이 약한 자들은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였다.
분명히 판트 남매가 갖고 있을 공적치가 가장 많을 테니, 힘을 합쳐서 그들부터 쓰러뜨리자고 의견을 모았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건만.
판트가 발산하는 힘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아니, 어쩌면 원래 그들이 알고 있던 정보는 확실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이 알고 있던 것이, 튜토리얼 이전의 것일 뿐.
판트 남매도 튜토리얼을 통과하면서 성장한 것일지도 몰랐다. 원래 괴물이었던 놈들이, 더 대단한 괴물이 된 것이다.
“뭐하는 거냐? 날 잡으러 온 거 아니었어? 그럼 덤벼.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아니면.”
판트가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사납게 웃었다.
마치 그 모습이 먹이를 고르는 맹수처럼 흉포했다.
“내가 간다.”
콰아앙!
판트가 대지를 거세게 박차면서 포탄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젠장!”
“막아!”
플레이어들은 안색이 질린 상태로도 일사불란하게 포메이션을 갖췄다.
스킬이 잇달아 발동되면서 화려한 이펙트가 그들의 머리 위로 반짝거렸다.
일대에 걸쳐서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강력한 버프가 몇 번씩 중첩되었다.
중갑옷을 입거나 방패를 든 플레이어들은 앞으로 튀어 나가면서 충돌에 대비했다.
그리고 격돌했다.
콰르릉!
판트가 가진 마력은 대단했다.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대기가 찢겨 나가면서 뇌성(雷聲)이 연달아 터져 나오고, 주먹이 작렬한 자리에는 폭풍이 쉴 새 없이 휘몰아치면서 대지를 몇 번씩 들썩이게 만들었다.
마치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이던 플레이어들은 비교적 공세에 잘 버텼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교적’일 뿐.
판트는 몇 번씩이고 플레이어들이 만든 벽을 꿰뚫고, 부수고, 짓밟았다.
발을 구르면 벽이 흔들리고, 주먹을 휘두르면 플레이어가 밖으로 튕겨 나갔다.
콰콰쾅!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판트를 둘러싼 패기도 덩달아 증폭되면서 사방을 압도했다.
플레이어들이 전부 쓰러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판트는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재미난 놀이를 하는 것처럼.
‘강하다. 아카샤의 뱀을 처치했어도 절대 이상하지 않아.’
연우는 처음에 발견했던 아카샤 뱀의 사체를 떠올렸다.
아니, 아마 내단도 같이 섭취했을 테니, 진짜 힘은 저것보다도 훨씬 위일 테지.
‘저런 놈을 잡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들과 차이가 커. 너무.’
스테이지를 지배하고 있는 건 판트였다.
거기서 벗어난 건, 전투지대에서 단 두 사람 밖에 없었다.
플레이어들의 작전을 지휘하듯, 가만히 뒤편에서 팔짱을 낀 채 명령을 내리고 있는 장신의 사내.
허리춤에 크고 작은 세 자루의 검을 패용하고 있는 게 특징이었다.
녀석을 따라 흐르는 기운은 판트의 패기를 가로 지르면서 각 플레이어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특이한 효과를 갖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버프용 마법진도 그가 일으킨 것으로 보였다.
‘군주. 아니, 정확하게는 군주 후보인가?’
군주는 태생적으로 여러 플레이어들을 통솔 및 지휘하고, 나아가서는 군단을 조직할 수 있는 자들을 의미했다.
흔히 뛰어난 랭커들이나, 클랜의 장들이 대부분 군주였으니.
바토리의 흡혈검의 원주인이었던 흡혈왕이나, 팔왕으로 손꼽히는 8대 클랜의 수장들이 이에 해당했다.
판트를 상대로 플레이어들을 지휘하고 있는 저 검사도 그런 특성을 타고난 것 같았다.
‘아직까지 제대로 개화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리고.
남은 다른 한 사람은 판트 뒤에 있는 여자였다.
자신의 키보다도 훨씬 큰 태도(太刀)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고고하게 서 있는 여인.
아름다운 외모였지만, 얼음을 빚은 것처럼 차가운 인상을 자랑했다.
특히 판트와는 반대로 왼쪽 관자놀이를 뚫고 나온 뿔이 날카로운 느낌을 더했으니.
‘에도라.’
판트의 여동생이자, 독보적인 튜토리얼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칸은 에도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었다.
‘판트는 강해. 미친 듯이. 굉장히 높은 산을 마주한 느낌이야. 하지만 에도라는…… 조금 달라. 분명 판트보다는 부드러운데, 깊이를 짐작할 수가 없어. 마치 심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더 두려워. 산은 차라리 고개를 들면 높이는 볼 수 있지만, 심해는 끝도 알 수 없으니까.’
깊이를 알 수 없어서 더 두렵다던 말.
연우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얼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뭔가를 숨기고 있어. 아주 커다랗고, 포악한 뭔가를. 뭐지?’
연우가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면서 에도라를 바라볼 때.
에도라가 판트와 플레이어들의 접전을 지켜보다 말고,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연우와 시선을 마주쳤다.
고요한 눈빛이 연우를 직시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속에 담긴 뭔가가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싱긋!
그때 차갑게 굳어 있던 에도라의 입술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재미나다는 듯이.
‘들켰군.’
연우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에도라에게서 뭔가를 봤듯이, 에도라도 똑같이.
‘나를, 봤어.’
결국 연우도 에도라처럼 따라서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염탐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다가 나서고 싶었는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연우는 품속에서 제법 큰 주머니를 꺼냈다.
증표가 한가득 든 주머니.
안전지대에 있던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저절로 이쪽으로 쏠렸다.
그들의 눈가를 따라 탐욕이 어렸다.
저걸 전부 빼앗을 수 있다면 순위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안전지대에서는 공격이 허락되지 않았다.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테이지에서 강제 추방이 될 수도 있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 바닥에 버려진 물건이라도, 주인이 따로 있다면 함부로 손을 대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가만히 연우가 뭘 하려는 건지 지켜보려는데.
연우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집더니 안에 있던 증표들을 바닥에다 쏟기 시작했다.
후두둑!
“뭐야, 저거? 저걸 왜 쏟아?”
“판트한테 쫄아서 리타이어라도 하려는 건가?”
“씨발. 저 아까운 걸, 버리려거든 날 주던가.”
플레이어들의 눈에는 영락없이 미친 짓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쏟아지는 증표의 양이 계속 늘어날수록, 바닥에 차이는 양이 점차 많아질수록, 그들도 더는 비웃을 수 없었다.
“미, 미친! 대체 몇 개를 버리는 거야!”
“몇 개지? 처, 천 개? 이천 개 아, 아닌가?”
스테이지가 떠들썩해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연우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던 플레이어들도 이쪽으로 시선을 모으기 시작했다.
판트도 즐겁게 싸우다 말고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여태 연우를 지켜보던 에도라의 눈동자에도 이채가 어렸다.
그렇게 3천 개가 넘는 증표가 모두 바닥에 떨어졌을 때.
발끝에 구르는 증표가 환한 빛을 발할 때.
연우가 중얼거렸다.
“합산.”
화아아!
수천 개나 되는 증표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빛무리가 연우를 따라 감돌면서 금색 수정으로 합쳐졌다.
동시에 허공에 커다란 메시지가 떠올랐다.
[E구획과 F구획에서 모은 증표가 모두 공적치로 환산, 기존 공적치에 합산됩니다.]
[튜토리얼 랭킹이 갱신되었습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랭킹이 발표되는 순간, G구획을 따라 소리 없는 비명이 쏟아졌다.
잔잔하던 에도라의 눈동자에도 격동이 일어날 정도로.
[튜토리얼 랭킹]
1위. 비공개(109,984Point)
2위. 에도라(68,230Point)
……
이번 회차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랭킹 1위가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연우를 보는 사람들은 경악에 차 소리를 질렀다.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게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연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공적치를 상징하는 금색 수정을 전부 허리춤에 걸고, 등에 매달고 있던 칼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위로 뽑았다.
스르릉!
칼의 쇳소리가 맑게 울렸다.
길이는 대략 70센티미터 내외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칼.
겉보기에는 투박해 보였다.
하지만 칼이 점차 밖으로 뽑혀 나올수록, 검면에 백은 가루로 새겨진 이상한 글자가 신비롭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날을 따라 감돌던 청색 기운도 같이 새어 나와 연우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화아아-
백색 광채와 청색 기운이 뒤섞이면서 강렬한 회오리바람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칼을 모두 뽑아 아래로 늘어뜨렸을 때.
콰콰콰!
회오리바람은 끝없이 확장되어 안전지대 전체를 뒤덮었다.
“무, 뭐야, 이건?”
“대체 저 아티팩트는 뭐지?”
플레이어들은 혹시 회오리바람에 휩쓸릴까 싶어 연우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경악과 불신, 의심으로 가득 찬 시선이 쏟아졌다.
튜토리얼 내에 이런 아티팩트가 있다는 말은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연우는 태풍의 중심에서 담담하게 웃기만 하고 있었다.
[비그리드]
분류: ???
등급: ???
설명: 지금은 잊힌 머나먼 은의 시대, 위대했던 영웅이라면 누구나 탐내던 성검이 있었다. 하지만 성검은 여러 영웅들의 손을 전전한 나머지 그들의 피를 너무 많이 머금게 되었고, 끝내 주인을 해친다는 악명과 함께 마검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리고 세상 어딘가 깊숙한 곳에 단단히 봉인되어 있다가,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3번이나 뒤바뀔 정도로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성검은 마검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을 거쳐 마검의 저주를 완전히 씻어 내야만 한다.
* 검의 축복
비그리드에 깃든 영웅들의 짙은 원한은 성검이 내리는 축복을 저주로 뒤바꾼다.
마주한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혹은 강하면 강할수록 칼날에 맺히는 귀기(鬼氣)도 비례해서 증폭한다. 치명적인 공격을 입힐 확률도 같이 증가한다.
* 축복 전염
적에게 마지막 타격을 입힐 시, 가까운 주변에 있던 모든 대상에게 동시에 저주를 내린다.
저주를 받은 대상자들은 ‘감염’ 상태가 되어 방어력과 이동 속도가 대폭 하락한다.
* ???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봉인)
* ???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봉인)
**이 아티팩트는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주인에게 완전히 귀속됩니다. 타인으로의 거래나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기능 중 대부분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일정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춰야만 해제할 수 있습니다.
비그리드(Vigrid)란 원래 영웅이나 초월자 같은 신적인 존재들이 부딪치는 전장을 의미한다.
칸과 도일이 얻으려고 했던 히든 피스는 바로 그런 이름을 자처할 정도로 뛰어난 무기였다.
은의 시대, 탑이 세워지기도 훨씬 이전인 영웅들의 시대에 활약을 펼친 성검.
비록 마검으로 변질되어 대다수의 기능이 봉인되었다지만, 남은 기능들만 하더라도 하나하나가 눈에 띌 정도로 아주 대단했다.
첫 번째 옵션, 검의 축복.
이것은 다수의 적과 부딪쳤을 때에 공격력을 대폭 증가시켜 효율적인 대적을 가능케 한다.
게다가 귀기를 퍼뜨려 적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사기를 꺾는 효과도 갖고 있었으니.
많은 몬스터들을 상대해야 하는 플레이어들에게는 군침이 돌 수 밖에 없는 옵션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주한 상대의 힘이 강할수록 위력도 비례해 커진다는 특징도 있으니.
칸과 도일은 바로 이 옵션에 가장 크게 주목했다.
‘판트나 에도라가 강하면 강할수록, 비그리드의 위력도 비례해서 크게 증폭하게 되니까. 격차를 단 번에 따라잡을 수 있게 되지.’
칸은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판트 남매와의 실력 차이를, 편법이기는 해도 이런 방식으로라도 따라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에이씨! 사실 그 무기만 두고 본다면 사기지, 사기. 내가 갖고 있는 도룡검도 절대 미치지 못할 만큼…… 아마 내가 그걸 쓰면, 튜토리얼의 판 자체가 뒤집히지 않을까?’
칸은 비그리드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쓰게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았다. 편법은 편법에 불과하다는 걸. 아마 그런 걸 썼다간, 당장은 효과가 좋을지 몰라도 난 영원히 제자리걸음밖에 못할걸? 신외지물이야, 신외지물.’
신외지물(身外之物).
몸 밖의 물건이라는 뜻의 격언.
아무리 뛰어난 아티팩트라고 해도, 결국 손에서 떠나면 단순한 물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칸은 비그리드가 가진 이점을 알고 있었지만, 반대로 그것이 줄 단점까지 깨닫고 있었다.
비그리드를 손에 넣은 순간, 당장 판트와 에도라를 꺾을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다시 따라잡히게 될 것이라 것.
그리고 자신은 비그리드가 주는 이점에서 벗어나지 못해 평생 강해지지 못하리란 것도.
그런 깨달음을 얻은 건, 사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빌드와 충돌하고 난 뒤, 칸은 수없이 고민했다.
자신과 빌드 간의 차이를.
그 역시 뛰어난 검사로 손꼽혔지만 빌드를 꺾을 정도는 아니었다.
왜 그런 차이가 있었는지를 한참 동안 궁리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하나.
자신과 빌드 사이에는 엄청난 기량의 차이가 있다는 것.
빌드가 탑을 공략하면서 수없이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데 반해, 칸은 알량한 실력만 믿고 있었을 뿐 경험은 너무 미천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 기량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래서 칸은 비그리드에 대한 생각을 접었고, 연우에게 양보하면서 마지막 남은 미련까지 깔끔하게 버렸다.
덕분에.
연우는 비그리드라는 희대의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동생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튜토리얼 최고의 히든 피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