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종료 (4)
칸과 도일은 비그리드의 위치와 공략법을 가르쳐 주면서도,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출처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것쯤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칸과 다르게 신외지물이라고 해도, 강해질 수 있는 방식이라면 절대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거?”
“저놈만 잡는다면.”
“1위! 1위를 할 수 있다고! 아니, 1위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저 많은 공적치를 봐. 저걸 나눠 가지기만 하더라도……!”
“무기도 탐이 나. 대체 저런 걸 어디서 구한 거지?”
연우를 보는 모든 플레이어들의 눈가에는 탐욕이 잔뜩 어렸다.
압도적인 공적치와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고급 아티팩트.
이 두 가지만 해도 욕심이 나건만.
더구나 연우는 팀이나 배후가 없는 솔로 플레이어였다.
잡아먹더라도 뒤탈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1위를 할 정도로 많은 증표를 모았다면, 숨겨진 실력자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판트 같은 논외의 실력자라면 또 모를까.
아무리 강한 실력자라고 해도 이 많은 머리수를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더구나 그만한 실력자였다면 벌써 이름이 알려졌겠지.
하지만 그들 중에 연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명이란 뜻이었다.
그렇게 하나둘씩.
연우에게 적의를 보이는 플레이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안전지대에 있던 플레이어들도 밖으로 나와서 연우의 주변을 에워쌌다.
여차하면 바로 연우를 잡을 생각으로.
안전지대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는 순간, 회오리바람을 찢고 연우를 들이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뿜는 적의는 차곡차곡 쌓여 연우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검의 축복]
비그리드에 내재되어 있던 첫 번째 옵션이 반응했다.
연우를 둘러싼 회오리바람이 더 강렬해졌다. 그 속에 귀기가 조금씩 섞였다.
까아아-
소름 끼치는 귀곡성이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연우를 둘러싸려던 플레이어들이 흠칫거렸다.
등골을 따라 알 수 없는 오한이 흘러내리고, 불길한 마음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사이에도 귀기는 점차 강렬해지면서 칼날을 벗어나 연우에게로 깃들었다.
적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이 내뿜는 적의가 깊으면 깊을수록 귀기도 강해지는 방식.
당연히 귀기는 끝없이 계속 강해졌다.
그리고 이건 연우가 노리던 바이기도 했다.
플레이어들의 적의를 끌어내기 위해서 일부러 증표를 내보이고 비그리드를 꺼낸 것이었다.
그들의 탐욕을 이용해 귀기를 최대로 증폭시키기 위해서!
‘너희들의 오만이, 너희들을 다치게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겠지.’
마침내 귀기의 힘이 마지막 지점까지 다다랐을 때.
연우는 G구획으로 오기 전에 미리 귀속시켰던 망령들을 한꺼번에 소모, 귀기를 증폭시켰다.
화아아악!
“흡!”
“이게 무슨……!”
회오리바람은 태풍이 되어 단숨에 스테이지 전체를 뒤덮었다. 귀기도 칼바람이 되어 플레이어들 사이로 잔뜩 퍼져 나갔다.
몇몇은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 채로 휘청거리고, 몇몇은 균형을 잃고 쓰러져 피를 토했다.
그제야 그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콰아앙!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연우는 안전지대의 대부분이 내려앉을 정도로 거세게 지반을 짓밟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안전지대를 벗어나, 스테이지 중앙까지 일점돌파를 시도했다.
쐐애액-
연우와 함께 태풍도 같이 뒤따르면서 스테이지 위를 해일처럼 쓸어 나갔다.
콰콰콰!
“위험하다!”
“마, 막아!”
플레이어들은 귀기 때문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면서 앞으로 튀어나갔다.
아무리 연우가 자랑하는 힘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탐욕을 꺾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크게 부추기고 있었다.
저 무기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자신들도 저런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죽어!”
어떤 플레이어가 연우 앞을 가로막으면서, 악에 받힌 목소리로 칼을 휘둘렀다.
연우는 무심한 눈빛 그대로 비그리드를 거칠게 휘둘렀다.
콰앙!
“컥!”
녀석은 부러진 칼과 함께 상체가 잔뜩 터진 상태로 튕겨 났다. 비그리드가 훑고 지난 자리에는 거친 자국만 남아 있었다.
축 늘어진 눈에서는 더 이상 생기를 찾을 수 없었다.
절명한 것이다.
하지만 공격의 효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콰콰쾅!
이번엔 갑자기 죽은 플레이어를 따라, 녹색 기류가 사방 15미터 안팎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동심원에 노출된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달려오다 말고, 일제히 자기 목을 붙잡으면서 고꾸라졌다.
“대, 대체!”
“이게 무…… 슨……! 저주! 크윽!”
그들의 안색은 전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호흡이 거칠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축복 전염]
비그리드의 두 번째 옵션이 작동하고 만 것이다.
기실 칸과 도일은 검의 축복이 주는 효능에만 집중했지만, 정작 연우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바로 이 옵션이었으니. 비그리드에 내재되어 있는 저주를 퍼뜨린다는 것.
영웅의 원한이 잔뜩 서려 있는 저주이니만큼 위력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잔뜩 증폭된 귀기까지 뒤섞인다면?
끔찍한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마지막 타격이라는 조건부가 달리긴 했지만, 저주로 인해 힘이 떨어진 플레이어들 중에서 당장 연우의 일격을 제대로 막아 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쾅! 콰앙!
콰콰콰-
연우가 비그리드를 휘두를 때마다, 플레이어들은 가을바람에 구르는 낙엽처럼 튕겨 났다.
그리고 축복 전염도 터지면서 곳곳으로 퍼져 나갔으니.
“크아악!”
“컥! 커커컥!”
스테이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비명과 절규가 끊이지 않는 아수라장이.
곳곳에 쓰러지거나 졸도하지 않은 플레이어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연우는 그사이를 맹수처럼 마구 날뛰면서 목표를 향해 달렸다.
목표는 에도라.
1위라는 성적에 대해 확실히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였다.
* * *
해일처럼 스테이지를 휩쓸어 버리는 어마어마한 태풍 속에서.
바이람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튜토리얼 랭킹 5위.
처음 바이람은 G구획에 들어오고 나서 이 결과를 받았을 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5위?
자신이?
그는 언제나 승자의 길만을 걸어온 사람이었다.
적이 있으면 꺾고, 방해꾼이 있으면 치워 버리면서, 언제나 승자의 역할을 독식해 왔다.
마커스 계(界)의 검사.
튜토리얼이 시작될 때부터 판트 남매나 혈검의 칸과 함께 집중을 받았던 것도 전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5위라는 성적표는 패자의 낙인과 똑같았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뒤집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바이람이 태어난 마커스 계는 원래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행성 전체가 메마른 사막으로 뒤덮여 있고, 강 대신 마그마가 지표면을 따라 흘렀다.
언제나 뜨거운 열기가 행성을 좀먹어 갔다.
때문에 마커스 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힘이 생존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척박한 환경 때문에 강해진 마커스 계의 전사들은 언제부턴가 여러 세계와 차원에서 제일로 꼽는 용병 집단이 되었다.
강하고, 우직한 모습으로 의뢰받은 임무를 언제나 말끔하게 수행했다.
당연히 여러 의뢰자들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커스 계의 전사들은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을 식량과 식수로 바꾸어,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곤 했다.
바이람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생존을 위해 칼을 휘둘렀고, 가족들을 위해 용병 생활을 했다. 그리고 이리저리 구르다 보니 언제부턴가 마커스 계를 상징하는 최고 용병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처음 탑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
바이람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기회라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탑은 수행자라면 누구나 바라 마지않을 장소.
그런 곳에서 왕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누구보다 뛰어난 용맹을 발휘해 정점에 설 수 있다면.
아니, 탑의 끝에 올라 그토록 바라던 신이 될 수 있다면!
가족과 친지, 동료들을 편하게 해 줄 뿐 아니라 마커스 계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모든 게 풍요롭고, 아늑하던 과거로.
잘못된 왕을 만나 모든 게 망가지기 이전의 시대로.
다행히 바이람은 검사로서의 소양 외에도 또 다른 재능이 있었으니.
군주 후보.
다른 플레이어들을 지휘하고, 명령을 내리며,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왕이 될 자질이 있단 뜻이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튜토리얼에 참전했다.
하지만 그는 승승장구를 하다, 처음으로 벽에 부딪쳐야만 했다.
판트 남매.
녀석들은 바이람이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벽이었다.
여태 용병으로 살면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 왔다지만, 이 두 사람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어떻게 범접할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루키로서 혈검의 칸과 함께 그들의 이름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별것 있겠냐면서 무시를 했었는데. 그게 실수였던 것이다.
이게 탑이 가진 저력인 걸까?
아니면 그들 두 사람이 논외인 걸까?
대답이 무엇이건 간에, 바이람은 압도적인 기량 차이 앞에서 처음으로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기량으로 승부를 낼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승부를 내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바이람은 군주 후보로서의 능력을 한껏 발휘, G구획에 참전한 플레이어들을 설득해 임시 팀을 구성했다.
판트 남매부터 쓰러뜨린 다음에 승부를 보자는 임시적 연합을 주장했다.
질이 아니면 양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일.
그리고 판트 남매를 쓰러뜨리고 나면, 플레이어들에게 걸어 뒀던 스킬을 강화시켜 군단으로 형성할 원대한 계획까지 품고 있었다.
〈속박〉.
군주가 자신의 수하들에게 내리는 절대적인 제약.
바이람은 이미 플레이어들에게 속박 스킬을 걸어 둔 상태였다.
첫 목표였던 판트 남매를 쓰러뜨리고 나면, 스킬의 구속력도 강화되어 강제로 충심을 끌어낼 수 있었다.
상위 50여 명의 플레이어들을 이끌며 탑에 올라선 군주!
그만한 화려한 타이틀도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뭐냐고!’
판트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50여 명에 달하는 수?
그런 것쯤은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아무리 바이람이 버프 스킬을 발동해 군중 제어를 시도해도, 도저히 판트를 넘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 명이 더 추가되고 말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기스러운 하얀 가면을 쓴 남자.
단번에 1위로 치고 올라오더니, 기상천외한 아티팩트까지 꺼내서 플레이어들을 홀려 버렸다.
플레이어들과 바이람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50여 개의 링크가 옅어졌다.
그들은 넘볼 수 없을 것 같은 판트를 포기하고, 목표를 하얀 가면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재앙이 되고 말았으니.
콰콰콰!
“크아악!”
“이게…… 무…… 크헉!”
해일처럼 스테이지 위를 휩쓸고 다니는 태풍.
음산파게 퍼지는 녹색 귀기.
강렬한 일격.
플레이어들 중에 그것을 제대로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회오리바람에 죄다 갈려 나가면서 스테이지에 살점과 핏자국만 남기는 게 전부였다.
“피하라고, 이 멍청한 놈들아!”
바이람이 플레이어들을 만류했을 때는 이미 사태가 벌어지고 난 뒤였다.
결국 그는 여기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무기는 하나, 세 자루의 칼뿐.
이 칼끝을 어디로 돌릴 것인가?
그리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들은 훗날 내 군단이 될 소중한 재료들이다!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해!’
1위는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플레이어를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군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대로는 링크가 모조리 끊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칼 쪽으로 손을 가져가려는데.
“으하하핫!”
난데없이 판트가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메아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고개를 홱 돌렸다.
판트의 두 눈이 다른 어느 때보다 거칠게 타오르고 있었다.
쾅! 쾅!
판트가 두 주먹을 세게 맞부딪 치면서 사납게 웃었다.
“그래. 이거지! 난 여태 이런 걸 기다리고 있었다고! 잔챙이들이 아니라, 진짜 이런 싸움을 원했다고!”
판트의 눈가를 따라 희열이 감돌았다.
희열은 광기로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연우를 보다가, 뒤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에도라가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
“가도 되겠지?”
“언제 오빠가 나한테 그런 걸 일일이 허락 맡았다고.”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
에도라가 피식 웃었다.
“알았어. 아빠한테는 말하지 않을게.”
그제야 판트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으흐흐. 그럼.”
“대신에 그건 두고 가.”
“아, 그렇지. 깜빡할 뻔했어.”
판트는 앞으로 나서려다 말고,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금색 수정을 에도라에게 전부 넘겼다.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메시지창이 빠르게 변했다.
[튜토리얼 랭킹이 갱신되었습니다.]
[튜토리얼 랭킹]
1위. 에도라(120,230Point)
2위. 비공개(109,984Point)
……
“미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바이람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경악했다.
6만점에 가까운 공적치를 전부 아무렇지 않게 동생에게 넘겨?
그래서 1등을 탈환해 버린다고?
일견 무식해 보이지만 확실한 전략.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적치란 튜토리얼에서 죽을 위기를 수차례 이겨 내면서 겨우 쌓은 것들.
당연히 아무리 친형제라고 해도 쉽게 양도할 수 없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판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플레이어들에게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네깟 놈들과 우리를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애초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너희들과는 그릇이 다르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