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5화 (55/862)

5화. 종료 (5)

바이람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은 그때.

판트는 그들을 무시하고, 연우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우는 어느덧 이목구비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판트는 양발을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상체를 살짝 숙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두 눈을 꼭 감았다.

마치 돌진하기 직전의 황소처럼.

폭풍이 불기 전, 고요한 밤처럼.

아주 잠깐, 그를 따라 깊은 침묵이 흘렀다.

여태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전투 자세.

진정한 호적수를 만났을 때에만 선보이는 자세였다.

“후우……!”

짧은 날숨과 함께.

번쩍!

두 눈을 뜨자, 보라색 눈동자 위로 노란 안광이 샘솟았다.

그리고.

파직! 파지직!

패기가 자욱하게 퍼져 나가면서, 굵은 주먹과 팔뚝을 따라 샛노란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뇌정권(雷遷拳)〉.

외뿔 부족 내 청람가(晴嵐家)에서만 대대로 내려져 오는 혈족 전투 스킬이자, 비기(祕技).

피부 위로 튀어 오른 스파크는 점차 강렬해지면서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판트의 상체는 뇌기(電氣)가 갑주처럼 둘러진 상태가 되었다.

판트를 둘러싼 대기가 들끓었다.

패기를 동반한 뜨거운 열풍이 퍼져 나가면서 어느덧 연우의 귀기와 태풍에 맞서기 시작했다.

이윽고 뇌기가 사방을 잠식했다 싶을 때쯤.

“사라진 공적치야, 다시 빼앗아 채우면 그만이지.”

판트가 차갑게 웃으면서 움직였다.

콰아앙!

판트는 포탄이 되어 앞으로 쭉 밀고 나갔다.

콰르르릉!

대기가 발기발기 찢겨 나가면서 그가 지난 자리로 검은 탄내와 노란 불길, 그리고 귀가 멀 정도로 시끄러운 천둥소리가 남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모조리 짓밟혔다.

비명은 없었다.

천둥소리에 묻혔고, 시체마저도 사나운 뇌기에 터지거나 찢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플레이어들은 도망칠 곳도 없어 우왕좌왕해야만 했다.

앞에서는 음산한 귀기와 태풍이.

뒤에서는 강한 패기와 천둥번개가.

두 기운이 모든 걸 휩쓸면서 날아오는 마당에 대체 어디로 도망 칠 수 있단 말인가!

운이 좋은 플레이어들은 허겁지겁 안전지대로 피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스킬의 영향권 내에 있어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스테이지 바깥쪽으로 바짝 물러나야만 했다.

그렇게 두 힘이 격돌하고.

콰아앙-!

스테이지가 위아래로 크게 요동쳤다.

땅거죽은 몇 번이고 뒤집히고 갈라지기를 반복해서 원래의 형체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후폭풍도 연신 퍼져 나갔다.

충돌과 충돌, 폭발과 폭발이 계속 일어나 바깥에서는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 G구획 자체가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계속 충격이 이어지던 그때.

여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바이람이 움직였다.

세 자루의 칼, 마커스 계의 최고 마법검들이 일제히 검면에 새겨진 룬을 발동시켜 버프를 중첩시켰다.

바닥에 마법진이 몇 개씩 깔리고, 화려한 이펙트가 폭죽처럼 계속 터졌다.

아까 전까지 군단에 실었던 힘들. 그것이 이제는 전부 바이람 한 사람에게 실렸다.

체내에서 마력이 몇 배로 증폭되면서 감각도 예민해졌다.

세 자루의 칼이 신체의 일부가 된 것처럼 예리한 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이람은 칼을 양손에 하나씩, 그리고 발등에 하나를 얹은 독특 한 기예 자세를 갖췄다.

〈세 개의 발톱〉.

그가 오랜 용병 생활 뒤에 겨우 터득한 스킬이었다.

서로 다른 버프를 여러 번 중첩시키고, 효과를 몇 배로 증폭시켜 감각과 위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스킬.

다만, 한 번 펼치고 나면 마력 저장고가 다치고, 육체가 축나서 몇 달 동안 정양해야만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지금 내게 그런 걸 따질 겨를은 없겠지.’

바이람은 이를 악물면서 연우와 판트를 노려봤다.

이대로는 남은 수하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던 공적치까지 모두 빼앗겨 5위 자리를 지키는 것도 힘들어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여기서 승부를 봐야만 했다.

휘리릭!

바이람은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면서 두 힘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새하얀 빛살 세 개가 짐승의 발톱처럼 지표면을 긁고 지나가면서.

쐐애액-

연우와 판트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 * *

“흡!”

“이게, 뭐야!”

연우와 판트가 몸을 옆으로 튼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연우는 비그리드로 판트의 상체를 쓸어가고 있었고, 판트는 뇌기가 압축된 정권을 내질러 연우를 날려 버리고자 했다.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노린 일격답게 강렬했고, 매서웠다.

하지만.

갑자기 3개의 칼날이 공격과 공격의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 순간, 그들의 본능이 동시에 경종을 울렸다.

무시하지 말라고.

그냥 둔다면 너희들의 목을 잘라 버릴 것이라고.

그래서 둘은 충돌하기 직전,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눈빛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휘두르던 그대로 공격을 옆으로 틀었다.

연우는 좌측으로, 판트는 우측으로.

따당!

한쪽에서는 태풍이 빛살을 지우면서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쾅!

다른 한쪽에서는 뇌전이 빛살을 찢었다.

“이 새끼가!”

뇌기가 터지면서 노란 불똥이 흩어졌다. 갈라진 연기 사이로 판트의 사나운 눈동자가 불길을 뿜었다.

여태 잔챙이들만 만나다가, 이제야 겨우 상대할 만한 놈을 찾아서 희희낙락하던 참이었는데.

그런 즐거움이 난데없이 깨져 버리고 말았으니.

하지만 바이람은 그런 네 생각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지면 위를 미끄러지면서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하체를 쓸어 갔다.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좋아. 그럼 어디 한 번 해보자고!”

판트는 뇌기를 최대로 출력시키면서 발을 세게 굴렸다.

연우와 바이람, 둘 모두를 압도적으로 짓밟기 위해 어깨를 단단하게 세우면서 돌진했다.

저돌(猪突), 멧돼지가 송곳니를 앞세워 산비탈을 내려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콰콰콰-

그런 두 사람이 주는 압박 사이에서.

연우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비그리드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아래로 세게 내리쳤다.

파아앙!

지면이 다시 한 번 내려앉았다. 후폭풍이 동심원처럼 퍼져 나가면서 두 사람을 거칠게 튕겨 냈다.

콰콰콰콰-

“큽!”

“으윽!”

판트는 연우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직전, 날아오는 충격파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양팔을 교차시켜 겨우 머리를 보호할 수 있었다.

몸을 둘러싸고 있던 뇌기가 물로 씻은 듯이 완전히 사라졌다. 판트는 벽에 거세게 부딪친 것 같은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내장이 흔들리고, 골이 울렸다. 충격파를 고스란히 감당한 두 팔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뒤로 주르륵 밀려난 자리로 두 개의 고랑이 짙게 남아 있었다.

“대, 체……?”

처음 자신만만했던 것과 다르게.

판트는 충격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왕족으로서 태어나 갖가지 무술을 섭렵했고, 나아가 아카샤 뱀의 내단까지 섭취하면서 엄청난 양의 마력까지 품었다.

그런 자신이 이렇게 쉽게 떠밀린다고?

판트는 뭔가 잘못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뇌기를 끌어 올리려 하는데.

“우욱!”

판트는 갑자기 목젖까지 치솟은 울혈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다 그대로 토해 냈다.

속은 완전히 진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바이람도 마찬가지였다.

“빌어, 먹을.”

그는 겨우겨우 한 자루의 칼을 지팡이 삼아 일어서 있는 상태였다. 나머지 두 자루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옷도 다 찢겨 상체가 전부 상처로 도배되어 버렸으니.

피를 너무 많이 쏟아 현기증이 핑 돌았다.

그래도 최소한 쓰러지지는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텼다. 여기서 무너지면 정말 모든 게 끝장이었으니까.

대신에 바이람은 악에 찬 눈빛으로 연우를 노려봤다.

눈앞에 판트보다 더 큰 벽이 놓여 있었다.

판트조차도 단 한 번에 튕겨 나게 만든 벽. 절대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이었다.

바이람은 암담한 심정이 들었다.

판트와 에도라만 하더라도 그에게 열등감을 심어 줬는데, 이보다 더한 자가 나타났다.

튜토리얼이 이 정도라면, 대체 본편이라는 탑은 어떤 괴물들이 득실거린다는 거지?

그리고 그런 탑에서도 정점을 차지하고 있다는 랭커들은 또 어떤 놈들이고?

자괴감이 들었다. 열등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러면서 오기도 들었다.

어떻게든 뛰어넘고 말겠다는 오기.

그래서 바이람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버리기로 작정했다.

“판트!”

바이람이 일그러진 얼굴로 판트를 불렀다.

판트가 이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뭐냐?”

“합공하자.”

“뭐?”

판트가 인상을 구겼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뜻.

하지만 바이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존심보다 승리가 더 절실했다.

“어차피 놈은 혼자서는 절대 못 이기는 괴물이다. 그러니 지금만큼은 합공하잔 말이다. 그 뒤의 일은 그 뒤에…….”

“싫다.”

“너……!”

바이람이 뭐라고 소리를 치려 했지만, 판트는 콧방귀를 뀌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말했지만, 날 너희들 같은 짐승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이 몸이 걸을 길은 패도(覇道). 그 속에 그깟 꼼수 따위가 있을 것 같은가?”

파직! 파지직!

판트를 따라 다시 뇌기가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속은 진탕이어도 억지로 마력을 쥐어짰다.

입가에는 흉악한 미소가 걸렸다. 허기에 굶주린 맹수의 미소가.

“왕이 될 자에게 패배는 있을지언정, 후퇴는 없는 법이니! 그것이 내가 아버지께 배운 왕도(王道)이며 나를 세우는 근간이다!”

콰앙!

쐐애액-

판트가 다시 연우에게로 쇄도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바이람은 짜증이 치밀었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놈이 무슨 왕도를 운운한다는 건지!

이래서 바이람은 귀하게 자란 놈들을 싫어했다.

저 빌어먹을 고고함과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판트는 제 주제도 모르고 길길이 날뛰기만 한다. 에도라는 제자리에 못 박혀 참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 판에서 자신의 지분을 챙겨야만 했다.

바이람은 도중에 끊어졌던 스킬을 도로 재발동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정면에서 안 된다면 측면을 노린다.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판트가 연우를 상대하는 동안 그의 보조 역할을 도맡을 심산이었다.

촤촤촤-

채채챙!

콰앙-

연우는 처음으로 뒤로 밀려났다.

휘휘휘!

둘의 공세는 매서웠다.

판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을 끊임없이 쏟아 냈고, 바이람은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파고들면서 연우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빠르게 휘몰아치던 비그리드의 투로가 처음으로 혼란스러워졌다.

퍼버벙!

연우를 둘러싸던 태풍이 갈라졌다.

음산한 귀기가 흩어졌다.

칼날과 주먹이 교차했다. 바이람은 연우를 쪼개 버리려 했고, 판트는 그를 찍어 누르고자 했다.

채챙! 챙!

연우는 한없이 뒤로 밀렸다.

어떻게든 반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바이람의 칼을 옆으로 흘리면서 귀기를 터뜨려 판트의 머리를 날리려는 시도도 했다.

하지만.

한 명이라면 모를까, 여러 개의 버프를 중첩시킨 검사와 외뿔부족원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건 히든 피스로 무장하다시피 한 그로서도 무리였다.

비그리드를 휘둘러 어떻게든 세 자루의 칼날을 쳐 내고, 크라슈나의 단검을 계속 뿌려 대면서 판트의 접근을 차단했다.

하지만 날의 길이가 짧은 비그리드로는 연속적으로 쏟아지는 칼날을 막는 데 한계가 있어 금세 손이 어지러워졌다.

그 순간, 기회라 여긴 바이람이 숨겨 뒀던 버프를 터뜨렸다.

지잉-

〈위력 강화〉.

칼날을 따라 시푸른 빛이 맺히면서 비그리드를 갈라 버렸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도 연우가 갖고 있던 대검이 동나면서 뇌전이 한껏 응축된 주먹이 연우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뇌천격〉이었다.

콰드득!

늑골이 박살 났다. 폐부가 쪼그라졌다.

연우의 허리가 굽혀졌다.

‘지금!’

바이람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손을 세게 휘둘러 연우의 머리통을 쪼갰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과 함께 연우에게 암전이 찾아왔다.

-아니, 그건 현실이 아니었다.

‘있을지도’ 모르는 일.

원래대로라면 ‘벌어졌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여태 튜토리얼에서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마지막 스킬이 있었다.

여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비장의 한 수.

연우만이 간직한 고유 스킬.

[시간 예지] (특수)

숙련도: 0.5%

설명: 일정 시간의 앞을 내다볼 수 있다. 예지 가능한 시간은 마력량과 숙련도에 비례하며, 예지가 끝난 후에는 시차 현상으로 극심한 현기증을 페널티로 겪는다.

일정한 시간, 지금은 대략 5초가량만 잔상처럼 비춰 주는 스킬.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을 미래 시간을 내다봤다.

한 번 발동시키는 데 무려 마력의 2/3 정도가 소모되었다. 인형설삼과 아카샤 뱀의 내단이 녹은 엄청난 양의 마력이 있어도 그만큼 잡아먹을 정도였으니.

연우가 여태껏 사용하는 것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스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충분히 사용이 가능했다.

덕분에 연우는 그 속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고.

째깍.

째깍.

품속에 있던 회중시계가 미친 듯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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