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종료 (8)
명예의 전당.
각 층계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한 사람들만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곳.
당연히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건, 그만큼 뛰어난 업적을 이뤘다는 뜻이었다.
또한, 보다 신에 가까워졌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플레이어들이라면 누구나 바랄 만한 영광이었지만.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등록을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아도 당신의 업적은 탑에 깊게 새겨져 원할 시에 언제든 등록 여부를 전환하실 수 있습니다.]
이블케가 살짝 눈을 크게 뜨다가, 익살맞게 웃었다.
“확실히 ###님은 다른 분들과는 아주 다른 성향을 지니고 계시는군요. 확실히 종종 그런 분들이 계시긴 했지요. 뛰어난 실력을 지녔으면서도, 딱히 겉으로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으셨던 분들이요.”
이블케는 연우의 선택을 다른 이유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연우로서는 단순히 본명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였지만, 그런 오해도 나쁠 게 없었기 때문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보상을 지급하겠습니다.”
플레이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저런 압도적인 공적치 뒤에는 어떤 보상이 주어질까 싶어서.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아르티야 이후로 조용했던 탑이 다시 시끄러워질 거라는 것.
이블케가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허공에 빛무리가 맺히면서 물음표가 새겨진 푸른색 박스가 나타났다.
보상을 담은 아이템 박스.
박스는 잠시 둥둥 떠다니다가 다시 휙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연우의 망막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상으로 ‘제우스의 열쇠’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짐승왕의 사자 갈기 투구’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이블리스의 알’을 획득했습니다.]
……
연우는 보상 받은 아티팩트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나하나가 좋아 보이는 것들.
그중에는 옛 군주가 쓰던 아티팩트도 있을 정도였다.
‘전부 다른 물건으로 바꿀 것들이긴 하지만.’
하지만 연우의 눈에 가장 띄는 것은 따로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마치 토파즈를 깎아 만든 것처럼 노랗게 반짝이는 열쇠.
‘제우스의 열쇠.’
[제우스의 열쇠]
분류: 잡화
등급: C+
설명: 하늘의 신, 제우스의 보고를 열 수 있는 열쇠. 사용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제우스의 열쇠는 신의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등급이 C+랭크로밖에 분류되지 않았다.
이마저도 신의 이름 때문에 갖게 되었을 뿐.
실제로 단순히 이것만 갖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F등급의 잡템으로 분류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마 이런 물품은 이게 유일할 테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어떻게 이런 물건이 튜토리얼 1위에게만 주어지는 보상이냐고 따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튜토리얼 1위들이 잡템으로 취급해서 버리거나,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꽤 많은 플레이어들이 상위 층계를 공략하면서 우연찮게 열쇠의 정체를 알아내고 후회를 한다고 했지.’
하지만 비밀을 안다고 해도, 그 뒤가 쉬운 것도 아니었다.
열쇠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11가지의 재료가 더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당연한 말이었지만, 남은 재료도 전부 히든 피스였다.
그것도 각각 얻는 과정이 제우스의 열쇠를 얻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들.
‘하지만 난 반드시 올림포스의 보고를 열어야 한다.’
힘겹게 겨우 얻은 열쇠였다.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다.
열쇠를 쥐는 손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러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도…… 이게 있으니 이제야 진짜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나.’
불과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전부 합친다면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4년보다 훨씬 고된 것 같았다.
‘앞으로 겪을 일들은 이보다 더 극심할 테지만.’
연우는 제우스의 열쇠를 비롯해 보상들을 전부 가방 안에 밀어 넣고, 오른쪽 어깨에 걸쳤다.
자신을 보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대부분 시기에 찬 눈빛들.
더 자세한 건 플레이어들이 없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확인할 생각이었다.
짝!
이블케는 연우의 준비가 모두 끝났다 싶자, 크게 박수를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연우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로 향했다.
“자, 이렇게 모든 관문이 끝났습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고,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 왕왕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탑으로 올라갈 자격을 얻으신 분들은 따로 공지가 나갈 것이며, 설사 공지를 못 받았다고 하더라도 다음 기회를 이용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이블케는 우아하게 인사를 하면서.
“나가시는 문은 아래쪽입니다.”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연우와 플레이어들 머리 위로 빛의 장막이 내려왔다.
[위대한 수행자여, 그대는 탑을 오를 만한 충분한 자격을 입증하였습니다. 앞으로도 탑은 신이 되고자 하는 당신의 굳센 의지를 기원할 것입니다.]
[탑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연우의 발밑을 따라 푸른색 포탈이 열렸다.
그래서 바로 넘어가려는데, 갑자기 판트가 소리를 지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직 부상이 완전히 다 나은 게 아닌지,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어이, 가면 쓴 놈!”
연우가 무심한 눈길로 쳐다봤다.
“뭐지?”
“따라와라. G구획에서 보였던 거, 보아하니 아티팩트 빨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힘 대 힘으로 한 번 겨뤄 보자. 너도 전사라면 절대 거절하지 않겠지?”
판트는 기필코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항복.”
연우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양손을 높이 들었다.
순간, 판트가 당황했다.
“무, 뭐?”
“항복이라고. 네가 이긴 걸로 해 두지. 그럼 되지 않았나? 설마 전사가 되어서 항복한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겠지?”
판트는 황당해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가진 상식으로 항복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하지만 연우는 더 이상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곧바로 포탈을 가동시켰다.
“얌마! 아직 이야기 덜 끝났다고!”
판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연우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젠자아앙! 뭔 저딴 새끼가 다 있어!”
판트는 관자놀이를 쥐어뜯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뭔가 연우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뒤에 있던 에도라가 피식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튜토리얼이 끝났다.
* * *
새로운 루키가 등장했다!
튜토리얼이 종료되는 순간, 소문은 각종 커뮤니티를 따라 탑 내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
튜토리얼의 1위를 독차지한 자.
처음으로 달성한 50만 점의 말도 안 되는 높은 공적치를 이룬 자.
G구획을 휩쓸어 모든 것을 독식하고, 외뿔부족의 왕족인 판트 남매마저 쓰러뜨린 자.
그래서 붙은 별명이 ‘독식자’.
하나하나가 이슈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것들이었다.
덕분에.
많은 클랜들이 탐을 냈다.
탑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튜토리얼을 종료한 플레이어들은 늘어 났지만, 언제부턴가 눈에 띄는 인재는 찾기가 힘들어졌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루키의 등장은 그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루키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내고자 했다.
많은 사람들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이 찾을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었다.
루키가 늘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과 이름조차 드러내기를 꺼려 해서 명예의 전당에도 등록하지 않았다는 것.
칸, 도일 콤비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긴 했지만, 이마저도 용병 관계로 만난 게 전부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 혼란에 잠겼다.
결국 루키에 대한 정보는 온통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채.
클랜들은 그를 영입하기 위한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튜토리얼이 종료된 지 꽤 긴 시간이 흘러도, 루키를 목격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여태 탑 내에 파다하게 퍼졌던 소문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듯,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 같았다.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루키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온갖 억측과 소문을 실으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 * *
화아악!
연우는 눈가를 찌르는 환한 빛무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어지러워.’
눈이 따갑고,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마치 고공비행을 겪는 것처럼 현기증이 돌았다.
플레이어가 된 후로는 스킬을 발동하지 않는 한 이런 일을 겪지 않을 줄 알았는데.
‘공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전이 마법은 조금 다른 건가?’
어쩌면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오면서 육체가 거기에 익숙해지는 과정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마력회로가 가동되면서 빙글빙글 돌던 세상을 바로 붙잡았다.
멀미도 금세 가라앉았다.
덕분에 연우는 편하게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여기가 탑의 세계란 말이지?’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아주 넓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따라 온갖 다양한 가옥과 건물들이 밀집했고, 곳곳에 난 대로를 따라 갖가지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너무 많은 것들이 뒤섞여 난잡한 느낌이 들 법한데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영화나 꿈에서나 나올 것 같은 광경.
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따로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도시, 정 한가운데.
아주 높다랗게 선 탑이 있었다.
끝은 구름을 뚫고 올라가 보이지 않았고, 99개로 이뤄진 층은 신비한 기운을 뿌렸다.
단순히 서 있는데도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신의 탑. 오벨리스크.’
동생의 일기장에서 몇 번이고 목격했던 광경.
하지만 일기장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에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경외(敬畏).
그런 말로밖에는 표현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세계와 세계가, 우주와 우주가, 차원과 차원이 거미줄처럼 수도 없이 교차하여 수많은 문물과 종족들이 살아간다는 이상향의 대지.
혹은 교집합의 세상.
하지만.
‘저 안에, 놈들이 있다.’
연우의 눈에는 원수들이 득실대는 복마전으로 비쳤다.
상위 랭커며 뛰어난 클랜들까지. 동생과 연루된 자들은 하나같이 탑을 통솔하는 지배자들이었다.
놈들에겐 동생의 모든 행동이 도전하는 것으로만 보였을 테니, 동생도 역부족이었을 수밖에.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연우는 동생의 눈으로 놈들을 보고, 동생의 목소리로 놈들에게 물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놈들에게 똑같이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하얀 가면 사이로.
두 개의 도깨비불이 거칠게 타올랐다.
* * *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들이라면, 누구나 마지막 99개의 층계에 다다라 신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탑을 오르려 하고 있었다.
독식자.
혹은 먼 훗날 흑신이라 불릴 자가 탑에 들어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