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9화 (59/862)

9화. 탑 (1)

연우는 언덕을 따라 내려와 걷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 그가 있는 장소는 탑 외 지역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튜토리얼과 신의 탑을 잇는 중간 지점.

탑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면서 만들어진 거대 도시였다.

때문에 튜토리얼을 갓 통과한 플레이어들은 보통 탑 외 지역에 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오로지 탑을 오를 생각만 가득했으니까.

하더라도, 이곳을 단순히 공략에 필요한 물품을 수급할 장소로만 여겼을 뿐. 오래 머물 장소로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우는 달랐다.

그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탑에 바로 오르지 않았다.

대신에 탑 외 지역에 남았다.

그에게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 * *

‘분명히 이 근처였을 텐데?’

연우는 탑 외 지역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시장을 찾았다.

현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시장처럼 여러 사람들이 정해진 구획에 좌판을 까는 노점상 형태였다.

곳곳에서 흥정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길을 걷는 연우의 손에는 사진이 한 장 들려 있었다.

회중시계와 함께 동생의 유품이라면서 남겨졌던 사진. 옛 아르티야의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은 색이 많이 바랬지만, 다행히 찍힌 사람들의 생김새나 장소는 구분할 정도가 되었다.

연우가 찾고자 하는 건, 여기에 찍힌 한 사람과 사진을 찍은 배경 장소였다.

‘사진만 봐서는 여기 부근이 확실한데.’

연우는 사진과 시장을 몇 번씩 대조하면서 장소를 찾았다.

하지만 흐른 시간만큼 시장도 바뀌기 마련이니, 큰 건물을 중심으로 되짚어 나가야만 했다.

덕분에 신기하게 생긴 이종족들과 다양한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니 눈길이 돌아갈 법한데도, 연우는 주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행인 건 다니는 사람들이 여러 모습들을 하다 보니 가면을 쓴 정도는 크게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튜토리얼에서는 독식자니, 새로운 루키니 하더라도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여긴가?’

연우는 모퉁이를 몇 번 돌아 어느 대장간 앞에 섰다.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건물. 대장간이라는 걸 알리는 망치와 모루 마크도 많이 낡아 읽기가 힘들었다. 찾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진 속 배경과는 똑같았다.

확실했다.

여기였다.

“…….”

연우는 물끄러미 망치와 모루 마크를 쳐다보다가, 사진을 도로 품속에 넣으면서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삐그덕.

문짝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내부는 외관처럼 엉망이었다.

바닥에 먼지 뭉치가 굴러다니고, 벽에는 곳곳에 얼룩이 졌다.

하지만.

‘무구류는 깨끗하구나.’

연우는 벽면을 따라 진열된 여러 무기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눈에 마력이 깃들면서, 동공 사이로 새로운 동공이 하나 더 열렸다.

용마안이었다.

[헤노바의 상급 철검]

분류: 양손 무기

등급: C+

설명: 드워프 헤노바가 제련한 철검. 단단한 내구도와 오랜 수명을 자랑한다.

[헤노바의 대궁(大弓)]

분류: 양손 무기

등급: B-

설명: 드워프 헤노바가 만든 활. 미노타우르스의 뿔과 힘줄로 만들었다. 시위가 너무 질겨 웬만한 근력으로는 당길 수가 없다.

[헤노바의 칠흑 투구]

분류: 머리 방어구

등급: B

설명: 드워프 헤노바가 제련한 투구. 어둠 속에 기척을 차단하는 특성이 내장되어 있다.

……

‘전부 상급품이야.’

용마안은 진리를 꿰뚫는다. 당연히 결을 이용하면 각 물품이 가진 잠재력과 특성을 어느 정도 읽어 내는 것도 가능했다.

덕분에 연우는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해 보이는 무구들이 얼마나 좋은 것들인지를 알 수 있었다.

안목이 뛰어나지 않으면 절대 가질 수 없을 이점이었다.

물론, 용마안으로도 아직 파악이 힘든 것도 있었다.

[헤노바의 ???]

분류: ???

등급: ???

설명: 드워프 헤노바가 제련한 ???. ?????.

연우는 무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녹이 잔뜩 슨 단검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가 챙겼던 대검보다 약 10센티미터가량 날이 더 긴 길이로 크라슈나의 단검보다는 짧았다.

용마안으로도 읽을 수 없는 건 두 가지였다.

너무 엉망이거나.

‘아직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뛰어나거나.’

겉보기에는 전자일 것 같았지만, 연우는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촉’이 그랬다.

강도면 강도, 재질이면 재질. 절대 쉽게 만든 게 아니었다. 녹이 슨 형태로 숨겨 뒀어도 그 속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탐나는데.’

이미 연우는 튜토리얼을 전전하면서 갖가지 좋은 아티팩트들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검은 팔찌, 크라슈나의 단검, 고블린 왕의 눈이나 몬스터 5색 보석, 하르간의 왕관, 비그리드.

그리고 짐승왕의 사자 갈기 투구나 이블리스의 알 같이 아직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던 튜토리얼의 보상들까지.

하나하나가 중하위 층계까지도 충분히 사용이 가능한 것들.

특히 독특한 내력을 가진 검은 팔찌나 비그리드는 봉인된 옵션만 풀 수 있다면, 상위 층계에까지도 충분히 쓰일 수 있었다.

덕분에 연우는 웬만한 옵션이 아니면, 눈에 차지 않을 정도로 기준이 많이 높아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 단검은 단숨에 연우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묘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마침 이 정도 크기의 단검이 필요하기도 하고.’

G구획에서는 주로 비그리드를 사용했다지만, 어디까지나 연우의 주 장기는 두 대검을 양손에 쥐고서 펼치는 변칙 검술이었다.

그리고 이 단검은 카르슈나의 단검과 같이 사용하면 딱 알맞을 것 같았다.

‘역시 여기, 정우가 애용했던 곳일 만해.’

한때, 클랜 랭킹 5위에 달했던 아르티야에 독점적으로 아티팩트를 공급했던 공방(工房).

탑 내에서도 손꼽힌다는 대장장이가 만든 물품다웠다.

그래서 다른 무구들도 확인해 보려 고개를 돌리는데.

“너, 뭐야?”

갑자기 뒷문이 열리면서 짜리몽땅한 난쟁이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나타났다.

작은 키에 수염은 바닥에 쓸릴 정도로 덥수룩하게 기르고, 팔뚝과 몸은 황소처럼 탄탄했다.

양손에는 검자루를 한껏 안고 있었다.

드워프 헤노바.

이 허름한 대장간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에 있던 난쟁이. 똑같이 생겼어.’

빛바랜 사진 속에 동생과 같이 웃고 있던 난쟁이였다.

동생이 일기장에서도 몇 번이고 언급했던 사람.

‘아르티야’에서 내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너무 많아서 버벅거렸겠지만.

‘탑’에서 내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딱 한 사람을 꼽을 수 있었다.

헤노바.

내게는 아버지 같았던 존재.

동생은 헤노바를 가리켜 자신 있게 ‘아버지’라고 했다.

‘아버지, 라.’

사실 연우 형제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에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말만 들었으니까.

다만, 어렴풋한 기억 속에 언제나 웃으면서 그들을 안아 줬다는 따뜻한 감정은 남아 있었다.

그런 동생이 스스럼없이 아버지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무언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연우는 튜토리얼을 통과하고 나면 바로 이 사람부터 만나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정우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지.’

하지만 연우는 가면을 벗고 자신이 누군지 소개하지 않았다.

순진했던 동생은 당당히 몇 안 되는 ‘친구’이자 ‘아버지’라고 했지만, 연우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누구라도 의심해야만 했다.

“무기를 사러 왔습니다.”

“무기?”

헤노바는 어이없다는 듯 비웃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런 꼴을 보고도?”

헤노바는 턱짓으로 망가지다시피 한 건물을 가리켰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미친놈이군. 장난 칠 시간 없으니까, 썩 꺼져!”

헤노바는 연우를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다.

연우는 그보다 긴 다리를 사용해서 앞을 가로막았다.

“장난 아닙니다만. 정말 무기를 사러 왔습니다.”

“아, 됐고! 무기 안 파니까, 꺼지라고!”

헤노바는 더 이상 이야기도 하기 싫다는 듯 연우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근육이 얼마나 단단하던지 벽에 충돌이라도 한 것 같았다.

연우는 공방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아르티야가 해체되었기 때문입니까?”

“……!”

헤노바가 뒤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두 눈에는 한 가지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짙은 분노.

“애송이,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맞군.’

연우는 확신을 가졌다.

헤노바는 원래 아르티야의 전속 대장장이였다.

플레이어가 아니기 때문에 멤버는 아니었지만, 멤버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그가 제공한 뛰어난 무구들 덕분에 아르티야는 매번 층계 공략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무구들을 안 파는 이유.

“다른 클랜들이 압박이라도 넣었습니까? 자기들한테 들어오라고요.”

“너, 이 새끼 지껄이지 말랬지?”

“하지만 당신은 성격상 제의를 걷어찼을 테고. 클랜들은 옹졸하게 압박하기 위해서 물건을 산 손님들을 해코지라도 했나 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대장간에는 발길이 뚝 끊어졌겠지. 그러다 간혹 소문을 듣지 못한 손님이 있으면, 해코지 당하지 않도록 그냥 내쫓았을 테고.

어떻게 된 그림인지 보지 않아도 대강 그려졌다.

“너……!”

헤노바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그런 거라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그냥 물건만 파십시오.”

“…….”

헤노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우는 작게 실소가 나왔다.

말투는 험악해도 속은 여린 드워프라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결국 헤노바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다가 품에 지고 있던 물건들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좋아. 그렇게 사고 싶으면 맘대로 해. 뭘 살 건데?”

“이게 맘에 듭니다.”

연우는 방금 짚었던 단검을 들었다.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헤노바의 눈가에 다양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다 그는 신색을 회복하며 미간을 찌푸려 연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근데 네놈, 돈은 있냐?”

연우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외상은 안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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