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0화 (60/862)

10화. 탑 (2)

헤노바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인상을 와락 구겼다.

“뭔 이런 미친 새끼가……!”

연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듣는군.’

예전에는 부대장에게서 하루가 멀다 하고 들었던 말이었는데.

이런 곳에서 듣게 될 줄은.

“헛소리할 거면 꺼……!”

“물론, 농담입니다.”

말은 농담이라지만, 목소리는 무뚝뚝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당연히 헤노바의 인상이 더 크게 일그러졌다.

살짝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연우는 오른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헤노바는 고함을 치려다 말고, 살짝 눈을 옆으로 가느다랗게 좁혔다.

“너, 그거? 설마 다크 엘프 족의 사냥 보따리냐?”

‘역시. 바로 알아보는군.’

연우는 잘되었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음. 그런 걸 갖고 다니는 걸 보니 영 맹탕은 아닌가 보군.”

헤노바는 조금 달라진 눈빛으로 연우를 위아래로 살폈다. 여전히 콧방귀를 뀌고 있었지만.

다크 엘프는 자신이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물건을 내주지 않는다.

그런 일족의 물건을 갖고 있다는 건 그만한 실력자라는 뜻.

게다가 헤노바는 연우의 행색을 보고 그가 갓 튜토리얼을 통과한 플레이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채고 있었다.

튜토리얼에 있는 다크 엘프는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갈리어드에게서 받았나?”

“예.”

“흥! 그 키만 멀대 같이 큰 말라깽이가 성질은 더러워도, 맹탕을 가늠하는 수준 정도는 되지.”

다크 엘프인 갈리어드와 드워프인 헤노바는 개와 원숭이처럼 서로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사이였다.

단순히 종족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내가 봤을 때는 암만 봐도 두 사람은 사이가 아주 좋은 건데 말이다.

친한 친구들이 스스럼없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물론, 두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간 맞아 죽겠지만.

동생은 갈리어드와 헤노바에 대해서 그렇게 서술하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여 놓았다.

툭하면 으르렁거리더라도, 서로의 실력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진심으로 존중하고 있었다고.

“그래. 그럼 튜토리얼에서 갖고 온 것들로 값을 치르겠다는 것 같은데. 어디 한 번 꺼내나 봐. 참고로, 내 물건은 무엇이든지 아주 비싸다. 네깟 놈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헤노바는 팔짱을 끼면서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튜토리얼에서 나는 물품이라고 해 봤자 대개 탑에서는 취급도 하지 않는 싸구려들.

한 번 구경이나 해 보자는 심보가 분명했다.

하지만 연우는 가방을 열어 묵묵히 안에 든 것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고블린의 이빨과 턱, 리자드맨의 눈알, 오크의 갈비뼈, 트롤의 피와 뇌수…….

뭔가 하나하나씩 나올 때마다 헤노바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전혀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탑을 공략할 힘이 없어 잡템을 주워 근근이 살아가는 일꾼들이나 주울 것 같은 것들.

물론, 제 딴에는 물건을 보는 안목이 있는지 잡템 중에서도 비싸게 팔리는 부위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명장’급의 반열에 오른 헤노바의 기준에서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수천 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 받지 않을 것들.

하지만 그래도 연우는 묵묵히 안에 든 물건들을 꺼냈다.

헤노바는 고작 이런 쓰레기로 자신의 물건을 함부로 사려 했다는 사실에 짜증과 치욕을 느끼면서도, 언제까지 이런 쓰레기들을 늘어놓나 싶어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쓰레기를 보는 헤노바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놈 봐라?’

연우가 늘어놓는 잡템들이 ‘그냥’ 잡템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하나하나만 두고 보자면 절대 취급하지 않을 것들이지만, 한데 모아서 본다면.

‘어떤 아티팩트의 기초 재료가 되는 것들.’

그리고 헤노바가 알기로 그 아티팩트는 꽤 고급으로 통하는 물건이었다.

갓 튜토리얼을 나온 녀석은 절대 취급할 수 없을 만큼.

‘그러고 보니.’

헤노바는 연우를 다시 위아래로 훑다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입고 있는 것들, 노비스가 입기에는 꽤 좋은 것들이군.’

아니, 사실 따지자면 ‘꽤’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주 좋은 정도였지.

그의 자존심상 인정하지 않을 뿐이었지.

연우가 오른손에 착용한 검은 팔찌는 자세히 감정해 봐야겠지만 범상치 않은 내력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등에 매단 검.

일반 장검이라고 하기엔 길이가 조금 짧았지만, 칼집을 따라 신기(神氣)와 마기(魔氣)가 함께 은은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절대 함께할 수 없는 두 기운이, 함께 말이다.

이런 경우는 딱 한 가지였다.

‘원래는 성검이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저주를 받아 마검이 되어 버린 것들. 옛 영웅시대의 무구들…… 그런 귀한 게 튜토리얼에 있었던가?’

결국 헤노바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던 연우에 대한 평가를 조금 더 위로 올리게 되었다.

사기꾼에서 풋내기로.

별 차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평가는 더 위로 조정되었으니.

연우가 가방 속 잡템을 모두 꺼낸 뒤, 추가로 두 개의 아티팩트를 얹었기 때문이었다.

잡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보물들.

하나는 짐승왕의 사자 갈기 투구.

다른 하나는 이블리스의 알.

튜토리얼의 보상을 전부 대가로 내놓은 것이다.

헤노바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나와 장난치자는 거냐?”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 아니라고? 넌 이 물건들이 뭔지 모르는 거냐?”

“알고 있습니다. 짐승왕이 썼던 유품과 마수(魔獸)의 알이지 않습니까?”

[짐승왕의 사자 갈기 투구]

분류: 머리 방어구

등급: A-

설명: 과거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진 짐승왕이 애용했던 투구. 영물이라는 백사자 다섯 마리를 잡아 그들의 머릿가죽을 덧대어 만들었다.

백사자의 용맹과 기상, 짐승왕의 힘이 깃들어 있다.

* 백사자의 이빨

처치한 몬스터의 숫자만큼 10초 동안 공격력이 1%씩 증가해 최대 35%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또한, 백사자의 기세를 불러와 제어 방해 효과의 지속 시간을 5% 이상 감소시킨다.

* 짐승왕의 포효

짐승왕의 기세를 퍼뜨려 주위의 적들을 공포에 빠뜨리고, 8~10초 동안 발을 묶는다.

[이블리스의 알]

분류: 알

등급: B+

설명: 마수(魔獸) 이블리스가 낳은 알.

특수한 방법으로만 부화시킬 수 있으며, 알을 깨고 나온 이블리스는 가장 먼저 본 사람만을 주인으로 인식한다.

짐승왕은 탑에서도 제법 유명한 축에 속하는 옛 군주였다. 한때, 흡혈왕과 함께 탑을 질타했던 자.

그렇다 보니 짐승왕이 남긴 유품은 연우가 탑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A- 랭크였다.

연우가 처음 손에 넣었던 아티팩트 형태의 바토리 흡혈검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그래도 절대 부족하지는 않을 물건.

당연히 부르는 게 값이었다.

당장 시장에 내놓는다고 하면 사겠다는 플레이어들이 줄을 설 테지.

무엇보다 탑은 보상을 내어 줄 때 플레이어의 특성과 기록에 따라 맞는 것을 내준다.

당연히 짐승왕의 사자 갈기 투구는 연우에게도 알맞은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내놓겠다니.

게다가 이블리스의 알도 만만치 않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블리스는 마계 게헤나의 깊숙한 밀림 속에서 살아간다는 마수였다.

날개를 폈을 때 크기가 5미터에 달하고, 단단한 부리와 발톱을 가지고 있어 영물도 단번에 찢어 버린다는 괴조(怪鳥).

비록 부화시키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과정이 뒤따르지만, 그래도 이블리스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감당할 만한 것들이었다.

짐승왕의 유품. 마수의 알.

두 개 전부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플레이어 하나를 고수로 거듭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헤노바는 자신의 실력에 대해서 뛰어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들을 연우가 짚은 단검의 값어치로 매길 정도는 아니었다.

한 개라면 또 모를까.

그래서 헤노바는 연우가 자신에게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 정도는 장난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갖고 노는 수준이었다.

아르티야가 해산된 뒤, 다른 클랜들에게 핍박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지만.

어쩌다 이런 한낱 노비스 따위에게도 능멸을 당하는 꼴로 전락하고 만 걸까?

헤노바는 수치심이 들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꺾을 수 없었기에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억지로 화를 삭이면서 연우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런 헤노바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는 무덤덤한 시선으로 헤노바의 눈빛을 받으면서 말했다.

“만약 이 두 물건과 재료들이 이 단검보다 값어치가 높다고 생각하신다면, 제작 의뢰를 하나 맡겨도 되겠습니까?”

헤노바는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화가 한 순간 싹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연우가 뭘 요구하려 한 건지 눈치챈 것이다.

“설마 ‘기에스의 눈’이라도 만들어 달라는 것이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으음……!”

수십 개의 눈과 수백 개의 손을 가졌다는 거인, 기에스.

그것의 이름을 따온 무구라면, 확실히 연우가 내놓은 두 물건에 걸맞은 값어치를 갖고 있긴 했다.

그리고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명장급 장인은 탑 내에서도 다섯 명을 넘지 못했다.

헤노바는 그중 한 명이었고.

헤노바가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면서 연우를 노려봤다.

“빌어먹을 놈. 처음부터 이런 걸 노렸던 거로군.”

“죄송합니다. 최근에 아티팩트는 제작하지 않으신다고 들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심기를 불편케 해 드려야만 했습니다.”

연우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사과했다.

헤노바는 다시 침음을 흘렸다.

그의 시선은 기초 재료와 두 아티팩트에 한참 동안 고정되었다. 눈가에는 갖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러다 다시 연우를 쳐다봤다.

“네놈, 내게 이런 물건을 맡긴다는 것, 무슨 뜻인지는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거냐?”

“거기에 대해서는 말씀드렸던 그대롭니다. 다른 클랜들의 일은 제가 알아서 감당하겠습니다.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기에스의 눈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해 주시겠습니까?”

담담한 눈빛.

하지만 그 속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부러지지 않을 강한 의지가.

그리고.

헤노바는 저런 눈빛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고 대답하려는데.

“물론, 다른 클랜들이 무서우시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불쑥 연우가 꺼낸 말에 헤노바는 이맛살을 와락 찌푸렸다.

무뚝뚝한 말투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꼴이라니.

아무래도 이놈과는 상성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헤노바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알았다. 해 주면 될 것 아니냐, 해 주면!”

* * *

[감정에 실패했습니다.]

[감정에 실패했습니다.]

……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용마안’의 스킬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15.5%]

[헤노바의 마장대검(魔裝帶劍)]

분류: 한 손 무기

등급: B-

설명: 헤노바가 3년간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단검. 원래 소중한 이를 위해 만들었으나, 그가 죽으면서 주인을 잃어 헤노바의 정념과 원한이 깃들었다.

덕분에 바위도 가볍게 가를 수 있는 날카로운 예기를 지니게 되었다.

* 드워프의 소망

마장대검은 소유자의 사념을 양식으로 삼는다. 강한 의지가 깃들수록 예기도 더 날카로워진다.

* 정념의 칼날

공격하는 동안 상대의 상처를 계속 악화시켜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상대의 생명력이 20% 미만 아래로 떨어지면 일정 확률로 빙독(水毒)에 중독된다.

**이 아티팩트는 ‘성장형’입니다. 주인의 성장에 맞춰서 아티팩트도 같이 성장하므로, 친숙도와 능숙도를 함께 올리십시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

헤노바의 대장간을 나오는 길.

연우는 마장대검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검의 내력을 살피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라면 상급품에 해당했다. 아르티야에 제공하던 무구가 이 정도가 아닐까.

무엇보다 성장형이라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사용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립감도 괜찮고.’

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헤노바에게 기에스 눈의 제작을 맡기겠다는 생각은 계속 갖고 있었다.

재료들을 모을 때, 칸과 도일도 몇 번씩이나 믿을 수 있는 대장장이가 있냐고 물을 때도 생각해 둔 바가 있다고 했었다.

그 대장장이가 바로 헤노바였다.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니, 기에스의 눈도 충분히 제작할 수 있겠지.’

헤노바는 최소 한 달은 소요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초 재료는 충분해도 다른 재료들을 공수해야 하고, 제작하는 과정도 꽤 긴 시일을 필요로 한다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다른 클랜들의 방해는 받았어도 망치질은 꾸준히 하고 있는 것 같았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꺾이지 않는 걸 보면, 대단한 사람인 건 분명해.’

연우는 앞으로 한 달 동안 기에스의 눈을 핑계 삼아 헤노바를 꾸준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들까지도, 함께.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충분히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겠지.’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

연우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마장대검을 쓰다듬었다.

우웅, 웅-

마장대검이 기분 좋다면서 잘게 몸을 떨었다.

처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마장대검은 유독 뭔가 자신과 잘 맞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찾은 것 같은 느낌.

“…….”

그러다 문득 설명창에서 ‘소중한 이’라는 단어가 눈에 밟혔다.

여기서 말하는 소중한 이란.

대체,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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