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탑 (3)
‘한 달.’
연우는 품에서 회중시계를 살짝 꺼내 바라봤다.
동생의 손때가 잔뜩 묻은 시계.
튜토리얼에서 그렇게 맹렬하게 회전하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시침은 여전히 ‘XII’ 칸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처음 연우의 손에 왔을 때는 꿈쩍도 않던 게, 지금은 아주 미미하지만 잘게 떨리고 있었다.
태엽이 조금씩 감긴단 뜻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연우는 회중시계를 도로 품속에 집어넣고, 마장대검을 허리춤에 걸었다.
‘그나저나.’
연우의 두 눈이 가라앉았다.
조금씩 날카로워진 감각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참 많이도 따라붙었군.’
대장간에서 나와 얼마 걷지 않았을 때부터 어떤 무리들이 뒤를 밟고 있었다.
‘열다섯? 아니, 열일곱.’
연우는 인지 영역을 최대로 확장시켜 미행하는 녀석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판단했다.
‘보상 아티팩트를 노리는 놈들인가? 아니면 날 조사하려는 놈들?’
아무래도 둘 다인 것 같았다.
움직임으로 보아 같은 패거리는 아니었다. 대여섯 명씩 짝을 지어 다르게 움직였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그래 봤자 잔챙이들.
떼로 덤빈다고 해도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그래도 계속 엮이는 건 귀찮으니.’
연우는 모른 척하면서 모퉁이를 돌았다. 걸음에 속도를 주자 녀석들도 다급하게 움직였다.
빛이 쉽게 닿지 않는 어두운 곳.
“어? 이 새끼 어디로 갔어?”
“젠장! 절대 놓치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하지만 그곳에 연우는 없었다.
결국 헛걸음만 하게 된 추적자들은 관자놀이를 쥐어뜯어야 했다.
* * *
연우는 추적자들을 따돌린 뒤, 근방에 있는 허름한 여관에 방을 잡았다.
그리고 따로 점원에게 웃돈을 주고 구한 로브를 두르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수중에 돈은 충분했다.
튜토리얼에서 막대하게 쌓아 올렸던 공적치. 탑에서는 포인트가 일반 화폐처럼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편리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와 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은 많았으니까.
그렇게 연우가 도착한 장소는 인근에서 가장 높은 층을 자랑하는 카페였다.
“찾으시는 장소라도 있으십니까?”
“가장 위층. 테라스를 쓰고 싶은데.”
연우는 점원에게 제법 많은 공적치를 지불하고 5층 테라스로 안내되었다.
공간이 탁 트여 탑 외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어느덧 해가 져서 그런지, 야경이 아름답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손님께서는 아주 운이 좋으시군요. 보시다시피 이곳은 전망이 아주 좋아 평소 인기가 많은 장소랍니다. 마침 평소 즐겨 찾으시던 손님께서 다시 층계 공략에 나서시면서 자리가 비…….”
“헤이즐넛으로. 시럽은 빼고, 원두는 인공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연우는 점원의 말이 더 길어질까 싶어 툭 잘라 버리고 의자에 앉아 야경을 조망했다.
점원은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
연우는 주문한 커피가 도착할 때까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커피는 제법 맛있었다.
지구가 원산지로 탑에서도 인기가 꽤 많아 일부 경작하는 농장이 있다더니.
지구에서 마시던 것과 사뭇 다르면서도 향이 좋았다.
연우는 이런 커피가 좋았다.
전투에 돌입하기 전, 잠깐 티타임을 가지면 아드레날린으로 뜨거워진 머리를 싸늘하게 식힐 수 있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
방금 전까지 살짝 달아올랐던 고양감이 차분하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시원한 밤바람.
탁 트인 야경.
따뜻한 커피.
모든 게 좋았다.
‘네가 추천하던 곳은 언제나 괜찮았지.’
이곳은 동생이 자주 찾던 단골 카페였다.
한창 아르티야를 결성하고 층계 공략에 열을 올릴 때에 주로 찾던 곳.
동료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즐기는 추억이 어려 있는 곳…….
때문에 연우는 일기장에 남아 있는 기억을 토대로, 카페에 가만히 앉아 아경을 구경했다.
동생이 여기에 앉아 어떤 생각을 했을지 떠올려 보면서. 녀석이 어떤 모습으로 웃고 있었을지 상상해 보면서.
탑 외 지역은 일반 플레이어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동생에게는 곳곳에 많은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었다.
연우는 당분간 동생이 스쳤던 곳들을 되짚어 볼 생각이었다.
기에스의 눈이 완성되는 한 달 동안.
입가에 다시 커피잔을 가져갔다.
시럽을 넣지 않아서 그런지, 헤이즐넛은 조금 썼다.
* * *
아침이 되었다.
연우는 카페에 갔을 때처럼 가면과 로브만 쓰고 길을 나와 어느 식당을 찾았다.
식당은 그처럼 아침 식사를 위해 찾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자리 있나?”
“합석하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아무 데나 상관없다는 대답에 연우는 중앙에 있는 거대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이미 착석해 있던 사람들도 자신처럼 따로 왔던지 각자 알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연우는 알아보기 힘든 여러 메뉴 중에서 동생이 맛있다고 추천한 걸 골랐다.
터키에서 먹었던 케밥과 비슷한 음식.
맛은.
‘그러고 보니 네 입맛은 최악이었지. 깜빡했다.’
형편없었다.
* * *
연우는 식사를 끝내고, 외곽에 위치한 숲길을 거닐었다.
상쾌한 바람이 부는 곳.
한적해서 사람도 잘 다니지 않았다.
이런 곳에 올 만큼 여유 있는 사람들이라 해 봐야 대부분 층계를 공략하려는 플레이어들이라 잘 찾지 않는 것이겠지.
좋은 장소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없는 음식을 먹고 짜증 났던 기분이 싹 달아났다.
* * *
“골라, 골라! 아무거나 골라!”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적한 숲길과 다르게 노점상이 가득 찬 거리.
여러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연우는 그 길을 따라 한참 걸었다.
* * *
탑 외 지역 서남쪽에 아쿠아리움과 비슷한 곳이 있었다. 여러 세계의 해양 생물들을 한데 모아 놓은 곳.
하지만 정작 연우가 이곳에 온 이유는.
“…….”
여자 구경을 위해서였다.
제법 예쁜 여자들이 많이 보였다.
‘너도 남자였구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 * *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듯.
길거리 노점상들이 파는 음식은 달고 맛있었다.
* * *
“어제 오셨던 그 손님이시군요.”
“어제 그 자리, 비어 있나?”
“이 시간에는 사람이 잘 없어 늘 비어 있지요. 하지만 낮에 보는 경관은 또 야경과 다른 묘미가 있답니다.”
연우는 어젯밤처럼 테라스에 앉아 티타임을 즐겼다.
어제까지 겪었던 소란들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 * *
탑 외 지역에 들어선 지 닷새 정도가 지났을 무렵.
연우는 다시 헤노바의 대장간을 찾았다.
땅, 땅, 따앙-
“뭐야? 여긴 또 왜 왔어?”
헤노바는 한창 담금질을 하던 중이었는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주물을 내려놓으면서 미간을 좁혔다.
간만에 열심히 망치질을 해서 그런지 노인답지 않게 근육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지난 닷새 동안 연우는 쉴 새 없이 대장간을 들락날락거렸다. 마치 자기 집처럼.
“지나가던 길에 들렀습니다. 심심하기도 하고, 주문도 제대로 이뤄지고 있나 확인차 해서요. 보아하니 필요한 재료들은 어제 다 공급된 것 같던데. 맞습니까?”
낯짝 두꺼운 뻔뻔한 대답.
당연히 헤노바의 안면이 구겨졌다.
“뭐, 인마?”
물론, 연우는 담담했다.
“다행히 제작은 시작하신 것 같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옆에서 감시하겠습니다.”
“뭔 이딴 새끼가……!”
연우는 헤노바가 뭐라고 떠들건 말건 간에 적당히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 그를 빤히 쳐다봤다.
헤노바는 기도 차지 않은지 씩씩거렸지만, 여전히 연우의 낯짝은 두꺼웠다.
결국 헤노바는 뭐라고 떠들건 간에 듣지도 않을 놈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요 며칠 동안 계속 느꼈던 것이지만, 이놈은 정말이지 말이 통하질 않는 녀석이었다.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왔다가, 자기 마음대로 가 버렸다.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윽박을 질러도 담담히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리 화를 토해내 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그래서 헤노바는 연우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담금질에 들어갔다.
당연히 망치에 들어가는 힘은 이전보다 훨씬 셌다.
땅! 땅!
따앙-
연우는 지겹지도 않은지 한참 동안 헤노바가 하는 행동들을 관찰했다.
눈가를 따라 뱀을 닮은 새로운 눈이 활짝 열렸다.
용마안이 헤노바가 벌이는 모든 행동과 그 너머에 있는 의미, 목적까지 쫓고자 했다.
헤노바는 거친 야생마처럼 망치를 두들길 것 같은 인상과 다르게 주물을 아주 꼼꼼하게 살피면서 두들겼다.
추출. 쇳물을 천천히 녹이고.
주조. 대검 모양의 거푸집에 따라 밀어 넣어.
단조. 모양이 잡힌 주물을 열심히 두들긴다.
그리고 대검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제련까지, 헤노바의 손길은 너무나 정성스러웠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
장인.
그런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스스로 드워프 5대 명장이라고 큰 소리를 뻥뻥 치더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이뤄졌구나. 네가 쓰던 모든 물건이.’
정우는 한때 ‘헤븐윙’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 닉네임을 있게 해 준 모든 아티팩트들이 전부 헤노바의 손을 거쳐 탄생되었다.
당연히 그런 그의 실력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야금술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연우도 손끝이 간질거릴 정도로.
손길 하나하나에 힘이 넘치고, 평범한 사람들은 닿을 수 없는 달인의 뜻이 담겨 있었다.
연우는 이런 걸 직접 보고 싶었다.
동생이 먹었던 음식. 거닐었던 산책로. 머물렀던 장소. 누웠던 집. 친구들과 떠들던 곳.
손길이 닿았던 모든 흔적들.
“…….”
연우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일기장에서 봤던 장소들과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장소들을 대조해 봤다.
많은 것들이 비슷했고,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렇게 깊은 생각 끝에.
다시 눈을 떴을 때.
“자냐, 인마?”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진 헤노바의 커다란 머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짜증이 단단히 난 성난 눈빛.
“누구는 죽어라 두들겨 대고 있는데, 감시하러 오겠다고 한 새끼는 잠이나 쳐 자고. 너 여기 뭐하러 왔냐?”
“심심해서 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심드렁한 대답.
빠직.
연우는 헤노바의 주름진 이마에 혈관이 잔뜩 돋아나는 걸 볼 수 있었다.
“계속 깐족거리면서 늙은이 속만 벅벅 긁어 댈 것 같으면 저기 쭈그리고 앉아서 망치질이나 하던가! 이 빌어먹을 놈아!”
결국 헤노바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쪽 구석을 가리키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짧은 다리로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조금 웃겼다.
“그러겠습니다.”
연우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뚜벅뚜벅 헤노바가 가리킨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망치를 들고 그를 다시 보며 물었다.
“그런데 화로에 불은 어떻게 지핍니까? 가르쳐 주셔야 망치질이라도 하지요.”
“아, 나, 저 빌어, 먹을, 진짜……!”
헤노바는 더 이상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더듬거리다 끝내 뒷목을 붙잡았다.
“으으. 저 빌어먹을 새끼가아.”
“고혈압이십니까? 약이라도 지어다 드릴까요?”
“넌 그냥 닥쳐 주는 게 혈압 낮춰 주는 거니까 좀 닥쳐!”
“그러죠. 그런데 진짜 불은 어떻게 지핍니까?”
“아아악!”
헤노바는 도저히 말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말투만 봐서는 전혀 감정 굴곡이 없는 녀석 같은데.
그럼에도 대화를 몇 마디만 나누다 보면 어느새 사람 속이 뒤집히게 만들었다.
헤노바는 더 이상 성을 내 봤자 이쪽만 손해란 생각에 크게 숨을 고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으. 내가 왜 저딴 놈이랑 엮여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몇 년은 늙은 듯한 모습이었다.
‘정우가 왜 처음부터 따라다녔는지 알 것 같아.’
가면 아래, 연우는 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