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탑 (4)
모든 회차가 끝나 리셋만 기다리고 있는 튜토리얼에 어느 손님이 찾아왔다.
“개판이로군.”
푸른색 로브를 몸에 두른 채, 폐허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시선에는 짜증이 가득 섞였다.
그를 따라왔던 수행원들까지도 인상이 딱딱하게 굳을 정도였으니.
이건 그들이 보고를 들었던 것보다 훨씬 사태가 심각했다.
생존자는커녕, 여태껏 섬의 눈을 피해 겨우 모으고, 쌓고, 이뤘던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으니.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조사는 꿈도 못 꿀 것 같았다.
그리고.
‘심장’에 대한 행방까지도, 전부.
‘빌어먹을 빌드 같으니.’
‘혼자서 욕심을 부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딴 꼴이 되냐고!’
‘이제야 겨우 리언트 님이 무신이 되셔서 기지개를 펼 수 있나 싶었었는데…… 젠장!’
수행원들은 이미 죽고 없는 빌드를 떠올리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러면서 주인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라. 땅을 뒤집든, 튜토리얼을 뒤집든, 어떻게든!”
“명!”
“명!”
수행원들은 고개를 숙이면서 땅을 박차 재빨리 사라졌다.
사내는 다시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아랑단이 있었던 폐허를 바라봤다.
바득. 이가 잔뜩 갈렸다.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의 이름은 리언트.
8대 클랜, 청화도를 다스린다는 다섯 무신 중 한 사람이자, 한때 팀 아르티야의 멤버이기도 했던 자였다.
* * *
“그런데 정말 야금술을 가르쳐 주시면 안 됩니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연우는 헤노바가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싶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헤노바의 한쪽 눈썹 끝이 다시 꿈틀거렸다.
“너 이……!”
“이번에는 장난이 아닙니다. 기초 단계라도 좋으니 배우고 싶습니다.”
진지한 말투.
헤노바도 연우가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두들기던 망치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발치에 놨던 곰방대를 들어서 입에 물었다.
‘그러고 보니 꽤 심한 골초라고 했었지.’
연우가 담담하게 헤노바를 바라볼 무렵.
푸우우-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뭘 하려고?”
“수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수리? 뭔데?”
“죄송합니다. 보여 드릴 수는 없습니다.”
연우는 품속에 있는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낡을 대로 낡고 시침만 남아 고장 난 회중시계.
하지만 안에는 여러 가지 마법 장치가 내재되어 웬만해서는 손을 댈 수 없게 되어 버린 아티팩트였다.
연우는 이것을 고치고, 내부를 열고 싶었다.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지.
혹시 찾지 못한 다른 단서가 있지 않을지.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자신과 동생 사이에 어린 추억이 담긴 물건이기 때문에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헤노바라면 충분히 수리가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는 야금술뿐만 아니라, 연금술과 마도공학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연우는 회중시계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직 헤노바를 믿을 수 없었다.
동생과 가장 가까웠던 그라면 회중시계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겠지.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이제 알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신뢰할 수 있단 뜻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가 직접 고치고 싶다.’
이건 동생이 자신에게 남긴 물건.
그렇다면 이 손으로 직접 고쳐야 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고집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연우에게는 그것이 자신만의 다짐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후우헤노바는 다시 연기를 내뱉으며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짜증을 부릴지 모른다는 예상과 다른 태도.
연우는 그 점이 의아했다.
“화가 나진 않으십니까?”
“내가 왜?”
“사정도 설명하지 않고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생떼를 부리는 것이지 않습니까.”
피식.
헤노바는 한쪽 입술 끝을 올렸다.
재미난 걸 발견했다는 듯.
“네놈도 네놈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 알긴 아는 모양이구나?”
“…….”
후우-
“아서라. 말하지 않는다면 이쪽도 관심 없으니. 제 세상을 등지고 탑에 오르려는 놈치고, 사연 없는 놈이 어디 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기 지나는 놈 아무나 하나 붙잡아 인생 이야기를 하라고 해도 잘만 쓰면 소설책 한 권은 그냥 나올 게다.”
그러면서 헤노바는 웃었다. 얇게 주름진 눈가에 여러 감정이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연우는 그게 회한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 네놈도 다르지 않을 테지. 특히 그 되도 않는 가면을 쓰고 다니는 꼴만 봐도, 속내가 시커먼 놈이라는 건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낄낄낄.”
탁!
헤노바는 곰방대를 한 번 더 빨아들이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연우를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터뜨린 웃음.
연우를 보는 눈빛에 짜증과 경계심 대신에 새로운 감정이 깃들었다.
헤노바는 다시 망치를 들었다.
“네놈이 한 주문 때문에 제대로 가르쳐 줄 시간은 없다. 대충 기본만 일러 줄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눈대중으로 훔쳐 배워.”
“감사합니다.”
“흥! 네놈 좋아서 가르쳐 주는 줄 아느냐? 심심해서 그러는 것이다. 심심해서.”
연우는 콧방귀를 뀌는 헤노바의 귓가가 살짝 빨개져 있는 걸 보고도 모른 척했다.
겉보기와 달리 참 부끄러움 많은 드워프다 싶었다.
* * *
처음 알아서 배우라던 말과 다르게.
헤노바는 연우가 망치를 쥐기 무섭게 잔소리부터 퍼부었다.
풀무질이 시원찮으면 발로 걷어 차고, 자세가 틀어지면 들고 있던 망치로 위협했다.
덕분에 연우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망치질 한 번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건 당연한 행동이었다.
대장간에 있는 것들은 모든 게 위험하다.
화로는 물론, 쇳물은 자칫 실수로 살갗에 닿기라도 하면 큰일이 벌어지기 십상이었다.
웬만한 상처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기초는 단단하게 잡아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모든 기구들이 특제품인 드워프의 것이라면 더더욱.
헤노바도 말과 다르게 초보인 연우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으니 간섭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연우는 빠른 속도로 기초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따앙-
따앙헤노바는 연우가 어느덧 그럴싸 한 자세를 잡고 망치를 두들기게 된 후에야 제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천치는 아닌 모양이야.’
후우-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곰방대를 맘껏 빨아 댔다.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하지만 헤노바의 생각과 다르게 연우를 관찰하는 그의 주름진 눈가는 묘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붉게 달궈진 주물이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망치질을 따라 넓게 펴졌다가 접히기를 반복했다.
보통 처음 망치를 쥐는 사람들의 작업은 힘을 적절히 배분하지 못하거나, 접쇠 방식이 잘못되거나, 쇳물의 적절한 끓는점이 잘못 되는 등 다양한 실수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용마안을 통해 망치질이 필요한 지점을 정확하게 찾았고, 힘을 완전하게 조절하면서 필요한 만큼 두들기고 필요한 만큼 펴고 접기를 반복했다.
어떻게 보면 기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동작들.
그러나 달리 보면, 어느 정도 기술이 잡힌 대장장이의 동작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헤노바는 3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오로지 망치만 쥐면서 살아왔다.
그중에서 최근 100년은 갖가지 세상에서 날고 긴다는 자들만 모인다는 탑에서 생활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뛰어난 장인, 재능이 넘치는 녀석, 기초는 부족하지만 센스는 좋았던 놈.
자신에게 기술을 배워 보고 싶다면서 자신 있게 왔다가 소박만 맞고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뭘까?
분명히 처음 망치를 쥘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지식도 없는 놈이었는데.
틀린 걸 지적해 줄 때마다 똑바로 고치더니 어느새 자세도 제법 그럴싸하게 변해 있었다.
이런 놈은 처음이었다.
‘아니, 두 번째였나?’
‘영감, 영감! 그거 나도 가르쳐 줘! 엄청 재미있어 보이는데? 가르쳐 주라, 응?’
이제는 지난날의 추억이 되어 버린 목소리.
이상하게도.
빌어먹게도.
불길 앞에서 망치를 꽉 쥐고 열심히 내려치던 그놈의 모습이 언뜻 눈앞의 녀석과 겹쳐지는 것 같았다.
피식.
헤노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늙었나? 나이를 먹으니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는구나.’
떠오르는 추억을 내쫓은 뒤.
헤노바는 때마침 실수를 저지른 연우에게 냅다 곰방대를 던졌다.
“이놈아! 각도가 글러 먹었잖아!”
다시 헤노바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 * *
낮에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전부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거리가 한산해진 밤.
연우는 대장간을 나와서 달이 비추는 길을 따라 숙소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처음 탑 외 지역에 들어왔던 날, 선불로 한 달 치 숙박료를 미리 지급했기 때문에, 시간에 관계없이 언제든 편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벌써 이곳으로 온 지 보름쯤 되었나?’
낯설었던 길도 이제는 익숙했다. 일기장에서만 보던 길이, 어느덧 연우에게도 생활의 일부가 된 것이다.
‘참 재미난 드워프야.’
요 며칠, 연우는 카페와 거리, 그리고 대장간만 이동하는 동선을 가졌다.
회중시계를 고치기 위해 야금술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보다는 예전에 동생이 누렸던 생활에 더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전부 즐거웠고, 흥미로웠다.
특히 헤노바와의 일상이 가장 재미있었다.
매번 툴툴거리고 버럭 신경질을 내면서도, 속을 박박 긁으면 긁는 대로 잘 넘어오는 단순한 성격.
그러면서도 마음씨는 너무 약해서 혹시 연우가 불편한 게 없나, 야금술은 잘 익히고 있나 수시로 확인하는 드워프였다.
그런 사람을 한참 골려댔으니.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생이 왜 그를 가리켜서 ‘아버지 같다’고 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가 느낀 헤노바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으니까.
‘모든 걸 잃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너에게 남은 게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연우는 사람을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성격이었다. 믿는다고 해도 항상 일말의 의심은 품고 있었다.
그런 그가 봐도 헤노바는 절대 누구를 배신하거나, 힘들다고 떠날 만큼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최소한 동생을 배신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은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연우는 헤노바에게 자신이 누군지를 말하지 않았다.
괜히 자신의 일에 끌어들여 고생하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
그저 헤노바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안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안심할 수 있었다.
동생의 삶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기에스의 눈이 완성되는 대로, 대장간을 완전히 떠난다.’
이미 주물을 만지는 기초는 거의 배운 상태. 곁눈질로 어느 정도 제련 과정도 엿보았으니, 나머지는 나중에 따로 연습을 하면서 차근차근히 익혀 나갈 생각이었다.
쏴아아!
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쌀쌀한 바람.
연우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밤하늘에 걸린 달을 바라봤다.
바라던 대로 이제 탑에는 들어왔다.
동생의 생활도 알았고, 남긴 인연도 얼추 알게 되었다. 녀석이 즐겼던 건 다 엿본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
‘탑을 오르고, 놈들을 만나는 것.’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필요로 했다.
연우가 아무리 튜토리얼에서 많이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진짜 원수라고 할 수 있는 놈들은 아주 까마득한 곳에 있었으니까.
랭커.
탑의 최상부 층에 존재한다는 자들이었다.
이런 탑 외 지역이나 하위 층계 같이 ‘떨거지’나 살아가는 곳은, 그들 같이 고고한 존재들이 발을 담그기엔 너무 미천했다.
그들은 튜토리얼에서 최고 기록을 갱신했다는 연우에 대해서도 ‘그렇구나’하고 듣고 넘기거나, 아니면 아예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연우는 하루라도 더 빨리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놈들과 어깨라도 나란히 해야, 눈높이라도 맞춰야, 동생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랭커라는 벽은 너무 높고 험난했다.
‘그리고 그렇게 강해지기 위해서 기에스의 눈은 필수야.’
연우는 지금쯤 헤노바가 실컷 두들기고 있을 기에스의 눈을 떠올리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단순히 기에스의 눈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자신의 단련이 가장 중요했다.
‘내가 튜토리얼에서 얻은 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어. 그걸 전부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돼.’
이미 연우는 틈틈이 튜토리얼에서 얻은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혹시 빠진 건 있지 않나 되돌아보던 그때.
“뭐지?”
연우는 골목 모퉁이를 돌다 말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다섯 사람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짝다리를 짚으면서 살벌한 기세를 흘린다. 녀석들은 단숨에 연우 주변을 삥 에워쌌다.
혹시 예전에 몇 번씩 따돌린 적이 있던 녀석들처럼, 자신을 스카웃하거나 뒷조사하기 위해서 온 자들인가 싶었지만.
“하얀 가면. 붉은색 가죽 갑옷. 맞군. 감히 우리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최근에 헤노바의 대장간을 뺀질나게 드나든다던 새끼.”
녀석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면서 험상궂게 인상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