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탑 (6)
걷어차인 녀석은 실 끊어진 연처럼 붕 떠올라 탁상과 의자 두어 개를 박살 내고 저만치 굴렀다.
“으으윽…….”
“컥! 컥!”
신음 소리가 가득 퍼졌다.
“젠장! 놈은 한 명이라고! 그것도 튜토리얼을 갓 나온 햇병아리란 말이다. 이 새끼들아!”
저쪽에서 수하들을 독려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놈이 있었다.
연우는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어, 어어? 마, 막아!”
녀석은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 채 뒷걸음을 쳤다.
간부라도 되는지 다른 놈들이 다급히 달려들었지만.
퍽! 퍼퍽!
연우는 손날을 바짝 세워 놈들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하체를 박살 내고, 명치를 무릎으로 꽂아 쓰러뜨리면서 단번에 간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컥!”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우드득!
손에다 잔뜩 힘을 주니 놈의 머리통이 그대로 반대로 돌아갔다. 혓바닥이 길게 나왔다.
“사, 사이 님까지!”
“저, 저놈은 대체……?”
연우는 죽은 간부를 아무렇게나 내버리고 감각을 더 예리하게 세웠다.
‘어디지? 위? 아래?’
확장된 감각 영역에 따라 뭔가가 철컹, 철컹,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트랩이 작동하는 소리.
기밀 장소로 들어오면 바로 화살이나 독침을 날릴 수 있게 기관 장치가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연우는 트랩이 집중적으로 뭉쳐 있는 곳 너머에 있는 빈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큼지막한 뭔가가 헐레벌떡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려는 걸까?
‘그렇게는 안 되지.’
연우는 위치를 가늠하고 마력회 로를 있는 힘껏 가동시켰다.
장딴지에 힘이 가득 실리자, 그대로 지면을 세게 밟았다.
콰아앙!
마치 대포라도 터진 것처럼 단단한 바닥이 그대로 으스러지면서 충격파가 건물 전체를 뒤흔들었다.
쾅! 쾅! 콰콰쾅!
덕분에 발아래 깔려 있던 무수히 많은 트랩들이며 비밀 통로가 그대로 박살 나거나 무너지면서 연쇄 폭발이 일었다.
“저, 저, 저, 저……!”
“미, 미, 미쳤……!”
아직 정신이 남아 있던 놈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입을 쩍 하고 벌리고 말았다.
그리고 박살 나 버린 지면 아래.
퀭한 구멍이 깊게 나 지하 깊숙한 곳에 있던 비밀 공간을 훤히 드러냈다.
거기에는 금고를 만지다 말고 놀라 자지러져 이쪽을 보고 있는 놈이 한 명 있었다.
퉁퉁한 체구.
윌렛이 말한 나이트 워치의 클랜장, 뎀이 틀림없었다.
탁!
연우는 아래로 몸을 날려 가볍게 착지했다.
덜덜덜.
뎀은 입만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르륵, 벽면을 따라 미끄러졌다.
철컹!
그때 마침 녀석이 매만지던 금고의 문이 활짝 열렸다.
속에는 갖가지 서류며 무기명 채권, 증서, 그리고 각종 작은 보석이며 금괴들이 각 칸 마다 정리되어 있었다.
연우는 마장대검을 상수로 고쳐 잡으면서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가면 너머, 연우의 두 눈이 차갑게 웃고 있었다.
뎀은 덜덜 떨면서 허겁지겁 금고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침 손끝에 검 한 자루가 걸렸다. 꽤 귀한 아티팩트라서 따로 빼돌려 뒀던 장물이었다.
“뒈, 뒈져 버렷!”
뎀은 검을 뽑아 연우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있는 대로 마력을 발동시켜 스킬을 전개했다.
하지만 연우는 결을 따라 마장대검을 내리쳐 녀석의 검을 분질러 버리는 것과 동시에, 크라슈나의 단검을 뽑아 녀석의 목젖에다 쑤셔 넣었다.
퍼억!
“……쿠르륵!”
뎀은 게거품을 물면서 덜덜 떨다가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암흑가를 호령한다는 클랜 보스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연우는 녀석의 사체를 바닥에다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위쪽으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황망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놈들이 있었다.
얼굴에 경악이 가득했다.
“다 뒈지고 싶지 않으면, 대표로 한 놈만 내려와.”
* * *
“마, 말씀하신 커, 커피입니다.”
탁상에 커피 잔을 내려놓는 손길이 잘게 떨렸다.
연우는 그걸 보다 작게 웃었다.
“독을 탄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녀석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걸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었으니까.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나이트 워치의 부클랜장, 이제는 졸지에 클랜장이 되어 버린 비스터는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헤노바의 대장간에 들락날락하는 플레이어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별반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간혹 탑 외 지역을 찾은 햇병아리들 중에 5대 명장이라는 소문에 혹해서 헤노바를 찾는 놈들이 있었으니까.
그런 자들이야 적당하게 손만 봐 주면 알아서 내뺐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정도로 여겼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헤노바의 대장간에서 빼앗은 아티팩트들이 아주 좋은 것들이었다는 점이었다.
아니, 아주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너무 뛰어난 것들이었다.
짐승왕의 사자 갈기 투구와 절반쯤 제작이 된 기에스의 눈.
이것을 본 순간, 뎀과 비스터의 눈은 반쯤 뒤집어지다시피 했다.
말로만 듣던 군주의 유품을 보았고, 랭커들이나 다룬다는 아티팩트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이런 것을 맡길 정도라면 분명 실력이 뛰어난 플레이어일 텐데, 과연 손을 대도 될까 하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두 물건의 원주인을 찾아보고자 소문을 파악했다.
‘그때, 뎀 새끼가 물러서기만 했어도!’
그러다 그들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최근에 탑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튜토리얼의 신기록. 그 신기록을 세우고는 갑자기 자취를 감춰서 이상한 소문만 무성했던 플레이어가 보상으로 짐승왕의 유품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서 뎀은 쾌재를 외쳤다.
아무리 신기록을 세웠다고 해도 노비스는 노비스.
그런 녀석의 물건이라면 눈 먼 장물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녀석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곳이 많았으니 꽤 비싼 값에 정보를 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독식자’가 설마 탑이 아니라 탑 외 지역에 있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워낙에 행색이 괴팍한 사람들이 많은 탑 외 지역이니, 여태 소문이 나지 않았던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비스터는 이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걸 꺼림칙하게 여겼다.
아무리 노비스라고 해도 그만한 신기록을 세운 놈이라면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없더라도 곧 생길 게 뻔하니, 오히려 자신들에게 해악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하지만 뎀은 그런 비스터의 우려를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클랜 자체가 박살 나 버릴 줄이야. 제길.’
나이트 워치는 그래도 나름대로 손꼽히는 규모를 가진 곳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허망하게 당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레드 드래곤이 배후에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때문에 나이트 워치보다 규모가 큰 다른 암흑가 클랜들도 그들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었는데.
하지만 연우는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도리어 더 싸워 볼 생각이라면 싸워 보자는 듯이.
아마 나이트 워치는 당분간 영업을 접어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이미 끝장난 것일지도.
죽거나 중상을 입은 녀석들이 워낙에 많은 데다가, 어렵게 장만했던 본거지도 박살이 나 버렸으니.
멀쩡한 녀석들 중에도 상당수가 밤중에 줄행랑을 칠 게 뻔했다.
사람 하나를 잘못 건드린 대가가 너무 참혹한 것이다.
그런 비스터의 타들어 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탁!
연우는 마시던 커피 잔을 탁상에다 내려놓고, 무심한 눈길로 비스터를 바라봤다.
비스터는 움찔 몸을 떨었다.
두 개의 도깨비불이 쇠사슬이 되어서 몸을 꽁꽁 묶어 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이제 변상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벼, 변상, 이라 하시면?”
“망친 물건값. 부서진 건물 수리비. 그리고 여태 너희들이 해코지를 해 대면서 대장간이 받아야 했던 손해며, 헤노바의 치료비, 정신적 충격에 대한 보상…… 받을 게 꽤 많지 않나? 싫으면 목 위에 있는 것, 내놓아도 좋고.”
비스터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태 헤노바의 대장간을 건드린 건 자신들만 아니라, 다른 암흑가들도 마찬가지였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일단 거기 금고에 든 건 전부 이쪽에서 챙겨 가도록 하고.”
비스터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나마 클랜에 남아 있던 마지막 남은 밑천이 몽땅 털리는 순간이었다.
“건물 수리도 너희들이 직접 챙겨야겠지? 특히 대장간에다 깽판을 놨던 놈들, 헤노바에게 손을 썼던 놈들로 데리고 와야 할 거야. 더불어서 앞으로 대장간에 다른 날파리들 끼이지 않게 보호 잘해야 할 거고.”
비스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배후에 있다는 클랜에도 알아서 잘 보고하도록 해. 뭐, 걔네들이 이쪽의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이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비스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연우는 암흑가에 대한 생리 구조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마따나, 나이트 워치가 레드 드래곤의 산하 조직으로 있다지만, 레드 드래곤이 한낱 탑 외 지역에서 벌어진 일에까지 관심을 둘 이유는 없을 테니까.
설사 나이트 워치가 해체된다고 해도 원인만 조사할 뿐, 복수를 하거나 하지는 않을 게 뻔했다.
비스터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좋아. 그럼 뒷일은 믿고 맡기도록 하지.”
연우는 의자를 뒤로 물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배웅하는 비스터의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 * *
연우는 빵빵하게 찬 가방을 들고 대장간에 돌아왔다.
‘좀 더 손을 쓸걸 그랬나?’
사실 연우는 비스터를 앞에 두고 잠시 고민을 했었다.
아예 본보기로 나이트 워치를 박살 내 멤버들의 머리통을 걸어 버리고, 주변 암흑가 클랜들도 두어 개 정도 부숴 놓을까 하고.
하지만 암흑가는 암흑가. 빈자리는 새로운 놈들이 차지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은 새로운 날파리가 되어 헤노바를 더 귀찮게 만들겠지.
그렇다면 아예 기존에 있던 놈의 기세를 꺾어 버리고, 세워 두는 게 훨씬 속 편했다.
나이트 워치의 대가리가 잘려 나갔다고 해도, 그래도 규모가 있으니 곧 수습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다른 클랜들도 더 이상 헤노바를 귀찮게 하지 않도록 방패로 쓸 수 있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대장간에 도착한 순간.
“음?”
연우는 앞마당에서 전전긍긍해 하는 얼굴로 돌아다니는 헤노바를 볼 수 있었다.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는 걸 보니 의원에게는 다녀온 것 같았다.
그래도 눈빛은 영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
연우는 잠시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감정을 꾹 누르면서 고의로 인기척을 냈다.
헤노바가 자연스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연우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그러다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인상을 살짝 구기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위험하게 대체 어디까지 갔던……!”
헤노바는 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연우가 피식 웃더니 바닥에다 가방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안에 담긴 물건들을 차례대로 꺼냈다.
잃어버렸던 갖가지 물건들뿐만 아니라, 나이트 워치가 자체적으로 갖고 있던 온갖 희귀한 재료 들도 가득 담겨 있었다.
헤노바는 잠시 가방과 연우를 번갈아 봤다.
눈가에 갖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빌어먹을 새끼. 결국 그새 사고를 치고 돌아온 거로군.”
연우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네 녀석이 내 말을 귀담아 들을 리가 만무하지. 뒷일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냐?”
“예.”
“그럼 되었다. 그거 들고 들어와.”
헤노바는 끝까지 툴툴거리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따뜻하게 변해 있었다.
연우의 입가에도 살짝 미소가 걸렸다.
가방을 도로 어깨에 걸면서 헤노바를 따라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 * *
헤노바의 대장간에서 있었던 사건은 금세 퍼져 나갔다.
나이트 워치는 어떻게든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클랜의 존폐가 걸린 위기였기 때문에.
하지만 사람들의 가벼운 입방아를 전부 물리칠 수는 없었다.
결국 종적을 감췄다고 알려진 독식자가 탑 외 지역에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이에 다른 암흑가 클랜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대략적인 정보 보고서를 만들어 의뢰자들에게 비싼 값에 팔기 시작했다.
여러 거대 클랜들은 이를 바탕으로 연우를 스카웃하기 위한 물밑 작업을 개시했다.
또한.
이 소문은 몇 주 동안 그를 찾아 헤맸던 어떤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으니.
“뭐? 탑 외? 그놈이 왜 난데없이 거기 있다는 거야?”
판트는 술을 마시다 말고, 갑자기 옆자리에서 들린 말에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겁을 먹은 플레이어는 자신이 들은 소문에 대해서 한 시간 내내 설명을 늘어놔야만 했다.
판트의 귓가에는 그냥 딱 한 마디만 맴돌았다.
“탑 외란 말이지? 탑 외!”
판트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에도라는.
“헤노바?”
뭔가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