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탑 (7)
이튿날.
나이트 워치는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와 연우의 지시대로 문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서진 집기나 모루, 망치 같은 것들은 더 비싸고 좋은 것들로 배치를 해 놓았다.
덕분에 아침 사이에 대장간은 이전보다 훨씬 시설이 좋아지고 말았다.
“어떻습니까?”
연우는 빠르게 뛰어다니는 나이트 워치 멤버들을 보면서 가볍게 웃었다.
“뭘?”
“딱 봐도 전보다 훨씬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저한테 감사하셔야 합니다.”
연우가 장난스럽게 던진 농담에 헤노바는 짧은 팔로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흥! 기에스의 눈이 하루라도 빨리 완성되면 좋다면서? 그럼 당연히 네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뭘 고맙니 마니 따져? 그리고 일은 저놈들이 다 했는데.”
하지만 험악한 말투와 다르게 헤노바의 콧잔등과 귓불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칭찬하기 낯부끄러우니 저렇게 투덜거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지구에서 하는 말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연우는 간질거리는 머릿속에서 단어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츤데레.”
“음, 뭐가 말이냐?”
작게 읊조린 혼잣말.
헤노바가 고개를 들어 뭐라고 떠들어 대냐는 얼굴로 쳐다봤다.
연우는 재빨리 아무것도 아니라며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입가는 계속 씰룩거리고 있었다. 이럴 때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게 참 다행이다 싶었다.
헤노바가 영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시 연우를 노려봤지만, 연우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사라지질 않았다.
참 헤노바에게 어울리는 단어이다 싶었다.
* * *
시설 정리가 모두 끝난 뒤.
연우와 헤노바는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헤노바는 남은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다시 망치를 들었고, 연우는 야금술 연습에 몰두했다.
땅, 땅, 따앙-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어젯밤에 있었던 그 거칠었던 난리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용마안’이 숨겨진 ‘결’을 드러냅니다.]
[‘용마안’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22.9%]
언제부턴가.
연우는 야금술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용마안을 활짝 연 채로 주물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갓 거푸집에서 꺼낸 주물을 따라 가느다란 점선이 그려지는 게 보였다.
연우에게만 보이는 점선들.
‘결.’
용마안은 진리를 꿰뚫는다.
시전자의 머릿속에 정리된 정보를 바탕으로 계산해서 가장 효율적인 루트를 제시한다.
이러한 루트는 결로 표시가 되기 때문에 연우는 비교적 훨씬 편하게 주물을 두들길 수 있었다.
따앙, 따앙, 따앙-
헤노바가 기초라며 아무렇게나 전해 준 지식과 노하우들은 사실 천금을 주고도 못 살 만큼 대단한 것들이었다.
연우는 하루 동안 용마안으로 헤노바를 살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헤노바가 대검 제작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이는지.
그런 것들이 전해졌다.
용마안으로 헤노바의 자세를 꼼꼼하게 살폈다.
금강체로 명석해진 머리로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차곡차곡 담아 정리를 해 뒀다.
그리고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용마안은 연우의 실력을 빠른 속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남들은 사기라고 여길지도 모르는 일들.
‘왜 용을 현인(賢人)의 종족이라고 했는지 알겠어.’
만물을 관찰하고, 지식을 습득하고, 진리를 꿰뚫는다는 용의 눈, 용마안.
연우가 부릴 수 있는 것도 용마안이 가진 수많은 권능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할 텐데.
그걸 이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으니 감탄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완성 직전에 다다른 계승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되었을 때.
용의 힘이 깃들었다는 용체를 손에 넣었을 때는.
또 어떤 능력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덕분에 연우는 야금술을 ‘이해’하고 ‘행동’하면서 기술 자체가 가진 매력에 사로잡혔다.
따아앙-
연우는 몇 번씩이고 접었던 쇠를 마지막으로 두들겼다.
주물을 따라 잔잔하게 물결무늬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걸 집게로 들어 옆에 뒀던 냉수통에 넣었다.
치이익!
새하얀 증기가 마구 일어났다.
연우는 숨이 막힐 법도 한데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주물을 주시했다.
[야금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더 깊은 지식이 쌓이면서 더 많은 가능성을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식은 당신을 둘러싼 세계관을 하염없이 확장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은 지식을 익히고, 더 많은 진리를 탐구하십시오. 용의 축복이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용마안’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25.1%]
[지식의 성장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릇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중단되었던 계승 작업이 다시 재기됩니다. 93, 94%…….]
[현재 작업량: 94.9%]
뚝. 뚝.
식은땀이 바닥에 계속 떨어졌다.
‘힘들어. 쉽게 볼 만한 게 절대 아니야.’
연우는 가볍게 뭉친 어깨를 풀었다.
용마안이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해도 그걸 습득하는 과정이 마냥 쉬운 건 아니었다.
튜토리얼에 있을 때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라도 했지, 이렇게 덥고 습한 곳에서 가만히 틀어박혀서 계속 망치질만 하려니 몸이 뒤틀렸다.
하지만 덕분에 연우는 단순한 육체의 성장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장도 병행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태 정체되어서 어떻게 다시 재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던 계승 작업이, 아주 조금이지만 진척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건 좋지 않다는 것이겠지. 여러모로 까탈스러워. 뒤로 갈수록 더 심해져.’
그런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마력회로가 작동하면서 눈가에 응어리 맺혔던 피로가 사르르 녹았다.
다시 활력이 돌았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성장을 이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한계가 한 단계 이상 확장된 느낌이었다.
‘어디.’
연우는 주물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만들어지고 있는 좋은 주물]
예상 분류: 양손 무기
예상 등급: F
예상 내구도: 5~10
설명: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은 주물이다. 하지만 첫 시도치고는 괜찮게 된 것 같다.
‘이만하면 첫 시도치고는.’
연우는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헤노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워프 헤노바]
CP: ??? / 성격: 새침부끄한
“뭘 봐? 어서 일 안 해?”
시선이 마주친 헤노바가 눈살을 좁혔다.
어제 아주 잠깐 연우에게 보였던 따뜻한 눈빛은 오늘부터 평소대로 되돌아가 있었다.
연우는 헤노바의 저런 태도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란 걸 잘 알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헤노바에게 맺혔던 정보창.
“알겠습니다.”
연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주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람에 대한 정보도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쾌거였다.
야금술을 단련하면서 물건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졌지만, 설마 그게 인물에 대한 것에도 적용될 줄이야.
‘상대를 관찰할 수 있다는 건…… 아주 큰 무기가 된다.’
상대를 알고 상대하는 것과 모르고 상대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비록 헤노바에 대해서 많은 걸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것만 하더라도 앞으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앞으로 무수히 많은 녀석들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아주 미약하지만 큰 변화.
연우는 그제야 용마안을 이루고 있는 메커니즘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많은 것을 익히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겪을수록.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수록 용마안의 범위도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과 경험이 더 깊어질수록 범위의 깊이도 같이 깊어지겠지.
‘그런데 CP가 뭐지?’
연우가 처음 보는 개념에 궁금증이 생겼지만, 천천히 알아 가면 될 거란 생각에 머릿속에서 의문을 지웠다.
그러다.
연우는 헤노바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안쪽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용마안을 열었다.
하지만.
[정보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역시 아직은 아닌 모양이군. 하긴. 첫 끼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
그래도 만족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부족한 숙련도야 계속 단련하면 되니까.
그런 생각과 함께.
연우는 다시 망치를 들었다.
따앙-
평소보다 망치가 더 깊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새침부끄라. 좀 어울리네.’
연우는 헤노바에게 보였던 단어를 떠올리면서 가볍게 피식 웃고 말았다.
* * *
그 뒤로도 연우의 방문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헤노바를 괴롭혔다.
“접쇠를 할 때 방향 위치를 잡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불의 온도가 적정 수치를 넘은 것 같습니다.”
“바람이 생각보다 약합니다.”
“이 부분은 왜 이렇게 되는 것이죠?”
아는 것들이 생기다 보니 모르는 게 더 많아졌다.
때문에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헤노바를 붙잡고 물었고, 헤노바는 이리저리 가르쳐 주다가 망치질 한 번 제대로 못하고 관자놀이를 쥐어뜯어야 했다.
“너 알아서 좀 배우라고, 이놈아!”
“모르니까 묻지요.”
“그러니까 알아서 배우라고!”
“알아서 가르쳐 주십시오. 알아서 배우겠습니다.”
“아아악! 이 새끼가아!”
헤노바는 순간 연우가 그간 퍼부어 댔던 잔소리에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 의심까지 들었다.
그렇다고 무시하려니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통에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둘이서 아옹다옹하는 사이.
연우의 솜씨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리고.
“이거 좀 봐 주시겠습니까?”
“대체 하루에 몇 번을 부르는 거냐! 나도 일 좀 하자, 일 좀! 이거 네놈이 맡긴 거란 말이다. 늦어지면 네놈 손해지, 내 손해가 아니라고!”
“물건을 완성해서 그렇습니다.”
“뭐?”
헤노바는 연우가 다시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연우가 담담하게 내뱉은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완성했다고?”
“예.”
헤노바는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연우가 야금술을 익힌 건 이제야 겨우 열흘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연우의 성장 속도가 놀랍긴 했어도, 벌써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놈, 마침 잘 걸렸다. 그동안 잘도 내 속을 박박 긁어 놨지?’
헤노바는 여태 자신을 못살게 괴롭히던 것까지 합쳐서 구박해 줄 생각이었다.
연우는 그런 헤노바의 속내가 고스란히 읽혀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물건을 헤노바에게 건넸다.
헤노바는 영 미심쩍은 눈빛으로 물건을 받았다.
제법 그럴듯한 형태가 만들어진 검.
[초보 대장장이의 칼]
분류: 한 손 검
등급: E
설명: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만들어진 검. 예기가 아쉽지만, 내구도는 제법 단단하다.
물건을 본 헤노바의 첫 감상은.
“개 같은.”
욕지거리였다.
“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헤노바는 연우가 만든 검이 열흘짜리 대장장이가 만들 만한 것이 아니란 걸 깨닫고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실력이 빠른 속도로 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대체 이 녀석 뭘 하는 놈이지?
그러다 헤노바는 연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험험, 헛기침을 했다.
“뭐, 처음 치고는 그런대로 만들었다만. 그래도 이런 걸 검이라고 갖고 오는 거냐? 좀 더 제대로 못 만들어?”
“좀 칭찬해 주면 덧납니까?”
“시끄러, 이놈아! 칭찬해 주고 말고는 내 마음이지!”
칭찬을 하면 기고만장해질까 봐 던진 구박도 연우에게는 단번에 격추되고 말았다.
“하여간 더 두들겨! 아직 멀었어!”
“그럼 계속 헤노바 옆에서 묻겠습니다.”
“이제 좀 그만 귀찮게 달라붙지? 어?”
“싫습니다.”
“이 놈이, 진짜!”
그렇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던 그때였다.
연우는 대장간 밖에서 강렬한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는 말을 할 새도 없이.
연우는 헤노바를 끌어안고 옆으로 피했다.
콰아앙-
갑자기 벽이 부서지면서 무언가가 안쪽으로 난입했다.
굵직한 주먹. 부리부리한 눈매. 산양처럼 솟은 뿔.
판트였다.
“이 새끼, 어디 있어! 이 판트가 너 때문에! 너 때문에에! 탑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많은 곳을 뒤졌는지 알기나 하……!”
녀석은 씩씩대며 소리를 지르다 말고, 부서진 돌 파편 사이로 날아온 주먹에.
빠아악!
“쿠에엑!”
얻어맞고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나자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