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탑 (8)
갑작스럽게 벌어진, 전혀 생각지도 못한 판트의 난입.
다행히 박살 난 벽은 나이트 워치에서 설치해 준 자동 복구 마법진으로 원상 복구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게 된 헤노바의 심란한 마음까지 복구된 건 아니었다.
나이트 워치의 행패에 이어서 판트의 난입까지.
요 며칠 간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건지.
후웁, 후우-
후웁, 후우-
헤노바는 망치 대신에 든 곰방대만 계속 입에 물고 말없이 끔뻑끔뻑 피워 댔다.
미간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따앙, 따앙-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는 제자리에서 계속 망치질을 해 댔다.
처음으로 만든 검이 제법 잘 만들어져서 재미가 붙은 것이다.
용마안의 숙련도를 올리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하지만 심사가 뒤틀린 헤노바에겐 평소에 정겹게 들리던 망치질 소리도 지금은 거슬리기만 했다.
“저놈, 계속 저대로 둘 생각이냐?”
연우는 잠시 뒤로 돌아봤다.
대장간 한쪽 구석.
판트가 산만 한 덩치를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퍼렇게 멍든 눈가를 계란으로 문대면서.
둘의 눈이 마주치고.
“…….”
“…….”
따앙- 따앙-
연우는 무시하고 도로 망치질을 시작했다.
“야!”
졸지에 개무시 당한 판트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꽥 하고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계속 망치질만 해 댔다.
따앙- 따앙-
“방금 전에 당한 건 어디까지나 내가 방심했기 때문에 당한 거다. 그러니 인정 못 해!”
따앙- 따앙-
“그러니 다시 한 판 붙자. 이번에야말로 박살을 내 줄 테니까!”
따앙- 따앙-
“밖으로 나와라. 남자 대 남자답게! 전사면 전사답게! 시원하게 한 판 붙고 모두 끝내자.”
따앙- 따앙-
“썅!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라고!”
판트는 말을 하는 내내 무시하기 일쑤인 연우를 보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럴수록 연우는 계속 무시했다.
순간, 그는 연우의 낯짝에다 주먹을 날릴까 말까 깊게 고민했다.
하지만 싸움을 걸지 않는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건 자랑스러운 외뿔부족의 전사로서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였다.
그런 건 피해야만 했다.
“그렇군. 그걸 몰랐어.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건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니. 하지만 가만히 있는 대장간을 부순 건 명예를 더럽히는 게 아닌 모양이야. 흐으으음. 나중에 따로 무왕에게 물어봐야겠어.”
작게 중얼거리는 헤노바.
판트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냥 허름해 보이는 대장간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난입했던 것인데.
하필이면 자신들의 부족에게도 몇 번 납품을 했던 대장장이일 줄이야.
게다가 아버지와도 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판트가 선택한 방법은.
“야! 한 판 붙자고!”
그냥 헤노바 쪽은 무시하고 연우를 노려보는 거였다.
그럴수록 헤노바의 미간에 패인 주름은 더더욱 깊어졌다.
당장 10년 전에 창고에 처박아 뒀던 핼버드를 꺼낼까 말까 수없이 고민했다.
그나마 거기까지 가지 않은 건 에도라라는 아이 때문이었다.
“이거라도 한 잔 드시면서 화 푸세요.”
에도라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과차를 건네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헤노바는 찻잔을 받다가 에도라가 품에 안고 있는 신마도에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그건?”
에도라가 배시시 웃었다.
“기억하시나요? 어렸을 적, 헤노바 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칼입니다.”
“그렇군. 이제야 기억이 나. 그때 고집을 피워 대던 꼬맹이였구먼. 벌써 이렇게 컸나?”
헤노바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면서 칼을 만들어 달라고 졸라 대던 여자아이를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 옆에는 사고를 너무 많이 치고 다녀서 무왕의 골머리를 썩게 만들던 남자 아이가 있었지.
그게 아무래도 저놈인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나, 컸을 때나 똑같았다.
“그런데 저놈, 계속 저렇게 둘 거냐?”
헤노바가 턱짓으로 판트를 가리켰다.
여전히 녀석은 연우에게 한 판 붙자고 졸라 대고 있었다.
“원래 저런 사람이라서요.”
이제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다는 투.
“으으으음.”
헤노바의 짜증이 더 깊어졌다.
* * *
그날부터.
대장간의 문턱을 수시로 넘나드는 사람은 연우 말고도 두 명이 더 추가되었다.
“야! 한 판만 붙자고! 남자답게!”
따앙- 따앙-
물론 연우는 무시했다.
그래도 판트는 끝까지 달라붙었다.
“너도 전사라면 절대 도전을 거절하지 않겠지!”
망치질을 할 때에도.
“그러니까 붙자고!”
식사를 할 때에도.
“야! 좀 하자고!”
심지어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갔을 때에도.
“야아아아아!”
하지만 연우는 여전히 듣는 척도 하지 않았고, 판트는 아예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다.
“이렇게 말하는데. 듣는 척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확 면상 쳐 버린다?”
어느새부턴가 도전장은 협박이 되었고.
“제발 좀 붙자고. 어? 부탁이다.”
협박은 사정이 되었다가.
“제발…….”
사정은 애원조로 변해서 거의 연우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이 정도 간청을 했으면 들어줄 법도 하건만.
연우는 여전히 판트 쪽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묵묵히 망치질을 했다.
따앙- 따앙-
“제에바아아알…….”
결국 참다못한 헤노바가 폭발하고 말았다.
“야! 그만큼 하면 좀 해 줘라!”
“그래. 좀 해 줘라!”
판트가 맞장구쳤다.
헤노바가 그쪽을 째려봤다.
“넌 좀 닥치고 있고!”
판트는 입을 꾹 다물고 연우를 바라봤다.
헤노바도 연우를 노려보고, 여태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책을 꺼내 읽던 에도라도 고개를 들어 연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 개의 시선이 동시에 쏟아졌다.
“…….”
결국 연우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망치를 내리면서 짜증 섞인 눈빛으로 판트를 올려다봤다.
“굳이 내가 왜?”
“전사로서 기량을 가르자는 거다!”
“귀찮다. 그냥 네가 이긴 걸로 해. 전에 항복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 게 어디 있냐!”
“싸우면? 내게는 무슨 득이 된다는 거지?”
“전사가 되어서 이득을 따진다는 거냐?”
“그래.”
너무 깔끔한 대답에 판트는 꿀을 삼킨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태어났을 때부터 무인으로 살아왔던 그로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연우의 모든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님 뭐라도 걸든가.”
연우는 그런 판트를 보다가 피식 웃으면서 다시 고개를 모루 쪽으로 돌렸다.
“없으면 말고.”
판트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 진 놈이 이긴 놈을 형님으로 모시기로 하자!”
연우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덤덤한 눈빛.
“형 말은 듣나?”
“당연하지!”
판트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세게 치면서 호언장담을 했다.
연우도 망치를 내려놓았다.
“좋아. 하지.”
* * *
그리고 잠시 후.
빠아아악!
대장간이 흔들릴 정도로 둔탁한 타격음이 밖에서 울려 퍼지더니.
끼이익.
연우가 가볍게 손을 털면서 대장간으로 돌아오고.
“…….”
판트가 축 처진 어깨로 뒤따라 들어왔다.
두 눈에는 판다처럼 멍 두 개가 시퍼렇게 자리 잡고 있었다.
헤노바는 그 꼴만 봐도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정신 사나울 일도 없겠지.
다시 조용하게 물건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망치를 들려다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잠깐. 그럼 무왕의 아들이?’
헤노바가 살짝 놀란 눈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싸운 시간도 몇 초 되지 않았는데?
에도라도 반짝이는 눈빛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튜토리얼에서 맞부딪쳤을 때는 그래도 꽤 팽팽한 승부를 이뤘었는데.
지금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새 더 강해진 거야!’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였다.
하지만 연우는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로 자기 자리에 앉아 망치를 들었다.
“이제 좀 조용히 두들길 수 있겠군.”
판트는 연우 옆에 조용히 앉아 더 이상 조르지 않고 가만히 그가 망치질하는 걸 지켜봤다.
그 모습이 비에 홀딱 젖은 강아지처럼 청승맞게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평생 무도를 걸어왔는데. 단번에 멍을 두 개나 달고 말았으니.
판트는 한참이나 그렇게 있다가, 슬쩍 연우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런데 혀…… 엉님은 왜 바로 탑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썼던 거야?”
판트는 ‘형님’이라는 단어를 살짝 흐리면서 질문을 던졌다.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이만한 실력이라면 초심자 구역과는 절대 안 어울린다.
그런데도 공략을 잠시 중단하고 옆으로 빠졌으니, 그 이유가 짐작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연우가 다시 망치를 내리더니 무심한 눈빛으로 판트를 돌아봤다.
“‘야’?”
판트가 움찔거렸다.
“……요?”
연우는 다시 모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앙- 따앙-
판트가 허겁지겁 설명했다.
“내가 탑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요.”
탑에 있는 내내 판트는 정말이지 화딱지가 나서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그로서는 어떻게든 연우와 다시 결착을 짓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며칠 동안 기다렸던 건 그만한 실력자가 당연히 탑을 오를 거란 ‘상식’ 때문이었다.
아마 그건 연우를 영입하고자 발 벗고 뛰는 다른 클랜들도 마찬가지일 테지.
듣자 하니 연우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어 여태 고생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건 판트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래도 한 달 가까이 연우가 나타나지 않아 전전긍긍하는데.
그때 에도라가 의견을 내놓았다.
탑을 오르는 게 아니면, 혹시 탑 외 지역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견을.
판트는 그게 말이나 되냐면서 코웃음을 쳤지만, 그래도 확인해서 나쁠 건 없지 않냐는 에도라의 설득에 같이 탑을 나섰다.
그러다 뒤늦게 들은 것이다.
연우와 나이트 워치 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물론, 결과는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지만.
판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해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또래에는 당해 낼 자가 없으며, 탑에 올라도 하층에서는 적수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
혈검의 칸? 폭시 테일 도일? 마커스 계의 검사, 바이람?
흔히 자신과 비견되는 루키라며, 손꼽히는 놈들이 있다지만, 판트는 단 한 번도 녀석들을 자신과 동등 선상에 놓은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을, 연우는 단번에 거꾸러뜨렸다.
그런 사람이 왜 탑 외 지역에 있는 건지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판트.”
“예…… 에?”
연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좀 조용히 해라. 정신 사나워서 주물에 집중할 수가 없으니까.”
“…….”
연우는 형님의 권한으로 판트의 입을 단단히 봉해 버리고 다시 주물에 집중했다.
따앙-
따앙-
* * *
연우는 여전히 판트가 퀭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걸 알았지만 무시했다.
그러다 가면 아래로 보이지 않게 작게 웃었다.
‘남은, 이유라.’
미소에 묘한 의미가 걸렸다.
‘많지.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