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탑 (9)
지난 한 달 동안 연우는 꽤 바쁘게 지냈다.
기에스의 눈이 완성되기를 기다렸고, 동생의 추억이 담긴 길을 다니며 녀석이 했을 생각들을 되짚어 봤다.
그리고 회중시계를 수리하기 위해 야금술을 익히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기에스의 눈 외에도 탑 외에 있는 중요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탑 공략을 위한 작전 구상.
‘정우는 10층까지 열흘 만에 통과했었지.’
아르티야가 처음 탑의 주목을 받았던 이유.
그건 튜토리얼이 끝난 뒤, 단 10일 만에 초심자 구역을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한 층씩 깨 버린 셈.
수천 년을 자랑하는 탑의 역사 동안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던 대사건이었다.
덕분에 많은 클랜들이 관심을 기울였고, 정우와 아르티야는 그 여세를 몰아 단번에 탑 내 세력전에서 일정 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세운 기록은, 아르티야가 해체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탑 내에서 절대 깨지지 않는 불멸의 신화로 남아 있었다.
물론, 연우가 바라는 건 단순히 공명심 같은 건 아니었다.
‘정우가 하데스의 열쇠를 얻은 게 바로 그런 기록을 세우고 난 뒤라고 했었으니까.’
올림포스의 보고를 열기 위한 12개의 재료 중 두 번째, 하데스의 열쇠.
하데스의 열쇠는 1층에서 10층까지, 흔히 ‘초심자 구역’이라고 부르는 층계들을 빠르게 통과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히든 피스였다.
제우스의 열쇠가 튜토리얼에서 1위를 기록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탑은 이번에도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뭣도 모르고 하데스의 열쇠를 얻고 난 뒤, 뒤늦게 제우스의 열쇠를 튜토리얼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노력을 했더라면 1위도 노려볼만 했을 테니까. 나중에 기회가 닿아 올림포스의 보고에 들어갈 기회를 얻긴 했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일찍 들어갈 수 있었더라면…….
기존의 기록을 깨야만 하데스의 열쇠를 얻을 수 있으니, 결국 연우는 10일보다 더 빠르게 10층을 모두 통과해야 하는 셈이었다.
조금 힘이 들 것 같았지만, 어려울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튜토리얼에서 쌓은 것들이 상당하니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기에스의 눈이기도 했다.
그러다 연우는 문득 자기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보면 이건 형제간의 겨루기가 되는 셈인가?’
그런 생각이 드니 자기도 모르 게 호승심이 들었다.
형으로서 자존심 있지, 동생보다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으니까.
연우는 고개를 들어 창가 너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구름을 뚫고 높게 선 탑이 보였다.
* * *
“하아! 빌어먹을 새끼들. 하여간 그놈이 오고 난 뒤부터 조용할 날이 없어.”
연우와 판트 남매가 떠난 자리.
헤노바는 홀로 남은 대장간에서 곰방대를 끔뻑끔뻑 피면서 툴툴거렸다.
지난 몇 년 동안 조용하기만 하던 곳이었는데.
단 며칠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지나가 버렸다.
어쩌다 이 꼴이 나고 만 건지.
좀 조용히 하라고 그렇게 소리를 질러 대도 녀석들은 도무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이게 전부 가면 쓴 놈.
그놈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놈의 이름이……?’
헤노바는 연우의 이름을 떠올리려다가 이내 여태껏 ‘야’, ‘새끼’, ‘빌어먹을 놈’이라고만 불렀지, 정작 이름을 물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도 참 어지간하다 싶었고,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고맙단 마음도 있었지만.
“아니지. 아니지. 그놈 때문에 여태 내가 받은 스트레스가 얼만 데. 에잉. 고얀 놈.”
헤노바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연우가 앉았던 자리로 가만히 시선을 던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망치 소리가 시끄럽게 나고, 쇳물이 뜨겁게 끓고, 화로가 시뻘건 불길을 토해 내던 자리.
연우가 묵묵히 망치를 두들기고, 판트가 옆에서 시끄럽게 쫑알쫑알 떠들어 대고, 에도라가 조용히 책을 읽던 모습이.
소란스럽고 정신 사납기만 하던 광경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위로 다른 어떤 광경들이 겹쳐 보였다.
‘영감님, 영감님. 어때? 이만하면 죽이지?’
‘야! 너 지금 그거 썼지? 스킬은 쓰지 않기로 했잖아!’
‘아니. 안 썼는데. 증거 없는데.’
‘안 쓰고 그런 모양이 나올 리가 있냐!’
‘증거 없는데. 증거 없는데.’
‘저 새끼 좀 보소?’
‘야, 야. 좀 그만 떠들어라. 너네들 때문에 책을 읽을 수가 없잖아.’
‘훗. 멍청한 것들. 이러니 우매하단 소리를 듣지.’
‘그럼 나가서 읽든가, 인마!’
역시나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분잡하고, 정신 사납기만 하던 광경.
제발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질러 대도, 좀 나가서 떠들라고 발로 걷어차도, 왜 하필이면 여기 와서 이 지랄들을 하냐고 욕지거리를 쏟아 내도, ‘우리 맘인데?’라고 뻔뻔하게 대꾸하면서 두꺼운 낯짝으로 자기들의 아지트 삼아 행패를 부리던 놈들이 있었다.
그런 놈들을 왜 떠올리게 하는 건지.
이제는 다시 볼 수도 없을 광경 들인데.
후우우-
길게 내뱉는 날숨을 따라 하얀 연기가 대장간 천장을 가득 메웠다.
‘늙은 게야. 정말이지.’
헤노바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잉. 빌어먹을 것들.”
아무래도 오늘 작업은 여기서 그만둬야 할 것 같았다.
괜히 심란한 마음으로 망치를 잡아 봤자 질 안 좋은 물건만 나올 테니까.
‘그러고 보니 이것도 거의 완성 되었어. 그럼 벌써 한 달이나 지난 건가? 하아!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시간은 참 빨라.’
원체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평소보다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른 느낌이었다.
며칠 안에 물건을 완성시켜 주기로 약속했는데.
뭐, 조금 늦어져도 놈들 때문이니 아무 말도 못하겠지.
헤노바는 그렇게 화로에 지핀 불을 끄고 조용히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끼이익.
“실례합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오늘은 장사 끝났어. 내일 다시 돌…….”
헤노바는 상도의도 없이 불쑥 찾아온 불청객을 쫓아 버리기 위해 문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바짝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곳에.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얼굴이 있었다.
옛 추억 속에 있던 얼굴.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사내가 헤노바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 * *
달이 뜬 밤.
연우는 지난 한 달 동안 한 것과 마찬가지로 동생이 자주 찾던 카페에 와서 헤이즐넛을 마셨다.
발아래, 아름답게 반짝이는 도시 야경이 보였다.
생동감 넘치는 곳이라 매일 같이 계속 봐도 질리지 않았지만, 연우는 오늘 다른 것을 살피고 있었다.
[정보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
[감정에 실패했습니다.]
[정보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
……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의 ???한 ??? 회중시계]
???. ??????.
‘됐어.’
연우는 용마안으로 회중시계를 몇 번이고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 주물을 만지면서 야금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정리했더니 드디어 열람 권한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열렸어도, 대부분의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
‘아직 멀었단 뜻이겠지.’
그래도 열리지 않는 것과 열린 것의 차이는 컸다.
한 번 열렸으니 앞으로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아 용마안을 강화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는 생각에 입가에 살짝 미소가 머물 무렵.
“여기서 혼자서 청승맞게 뭐하고 있어…… 요?”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연우는 회중시계를 도로 품속으로 밀었다.
그사이.
판트와 에도라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판트는 여전히 존댓말이 입에 익지 않았는지 말꼬리가 흐렸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많이 나아져 있었다.
에도라는 아메리카노를 가볍게 마시면서 피식 웃었다.
“어디 카인 오라버니가 오빠처럼 단순하게 사시는 것 같아? 아마 앞으로의 공략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는 중이셨겠지. 안 그런가요?”
그러면서 연우를 보며 확인하듯 화사하게 웃었다.
여기에.
“……?”
연우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걸렸다.
“오라버니이이?”
판트는 살짝 비음이 섞인 동생의 처음 보는 행태에 이맛살을 구기면서 고개를 외로 꼬았다.
하지만 에도라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판트 오빠에게 형님이면, 제게도 오라버니가 되는 게 맞죠. 아니면 다르게 불러 드릴까요?”
판트가 발끈했다.
“야! 그럼 나한테도 오라버니라고 불러야지!”
“내가 왜?”
에도라는 판트를 보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연우를 대할 때와는 명백하게 다른 태도.
판트는 그런 동생을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에도라는 가볍게 무시했다.
연우도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 엮이게 된 녀석들.
원하던 대로 승부도 났으니 더 이상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자꾸 자신의 뒤를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그냥 귀찮아서 무시했다.
하지만 계속 엮이다 보니 이제는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특히나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에서는 누군가가 비쳐졌다.
자신과 동생.
칸과 도일.
‘남매나 형제는 세상이 달라도 어디나 똑같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가 짙어지는데.
“그런데 형님.”
연우는 판트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녀석이 조금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아침부터 계속 느꼈던 겁니다만.”
그러면서 슬쩍 테라스 아래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저 꼬리들, 왜 두는 겁니까? 귀찮게.”
판트가 말하는 꼬리.
연우의 뒤를 자꾸 따라다니던 놈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탑 외 지역에 있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 따라붙기 시작한 꼬리들이었다.
제들 딴에는 몰래 뒤를 밟는다고 조심했겠지만, 단단히 강화된 연우의 감각을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연우는 굳이 그들을 내쫓지 않았다.
오히려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는 듯이, 어떨 때는 대놓고 활보를 할 때도 있었다.
판트는 그런 점이 의아스러웠다.
그는 누군가가 찜찜하게 자신의 뒤를 밟는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연우는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버려 둬.”
“예? 하지만.”
“…….”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굳이 그렇게까지 노려볼 필요는 없잖습니까.”
판트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연우는 그런 판트를 무시하면서 다시 커피 잔에 입을 갖다 댔다.
그 역시 저렇게 꼬리가 따라붙는 게 솔직히 귀찮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따돌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 번 떨쳐 내더라도, 녀석들은 거머리처럼 계속 따라붙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냥 내버려 두는 게 훨씬 속 편했다.
‘굳이 이런 곳에서 소란을 부릴 이유도 없고.’
연우는 동생의 추억이 묻어 있는 곳에서 피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갑자기 카페 아래쪽에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연우 주변을 감시하던 꼬리들도 뭔가를 발견한 듯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응? 무슨 일이지?”
판트도 뭔가를 느꼈는지 눈살을 좁히다가, 위쪽으로 올라오는 어떤 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우측으로 돌렸다.
연우도 어느새 테라스 안쪽을 보고 있었다.
곧 테라스 쪽으로 정갈한 차림을 한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판트는 살짝 이맛살을 구겼다.
그는 자신의 영역 내에 허락받지 않은 사람이 다가오는 걸 아주 불쾌하게 여기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이 카페의 테라스는 외뿔부족의 남매가 전세를 냈다’는 소문을 고의적으로 퍼뜨려 일반인들이 출입을 꺼리게 만들었었는데.
하지만 남자는 그런 걸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판트와 에도라를 지나쳐 연우 앞에 섰다.
그리고 공손한 태도로 인사했다.
“카인 님이시지요?”
“그런데?”
연우가 가만히 묻자, 남자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클랜 ‘붉은 서풍’에서 나온 라함이라고 합니다. 카인 님을 저희 붉은 서풍으로 스카웃하고 싶어 이렇게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