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8화 (68/862)

18화. 탑 (10)

“인기가 많으십니다, 형님? 으흐흐?”

연우는 살짝 짜증이 섞인 얼굴로 탁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명함들을 바라봤다.

판트는 그 모습을 보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에도라도 가볍게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눈가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전부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연우가 받은 스카웃 제안서들이었다.

붉은 서풍이 다녀간 뒤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클랜들도 수없이 다녀가면서 제안을 건넸던 것이다.

그만큼 튜토리얼에서 펼친 활약들이 눈에 띄었다는 뜻.

대부분 그저 그런 영세한 곳들이었지만, 제법 큰 규모를 가진 곳도 있었다.

“그래서 형님은, 어쩔 생각입니까?”

판트가 씩 웃으면서 물었다.

“뭘?”

“제안 말입니다. 그래도 형님 정도면 부르는 게 값일 텐데? 8대 클랜에서도 입질이 올 만할 테고.”

탑의 세계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보니 대부분 뛰어난 인재들을 원했다.

전력을 보강하면 보강할수록 세력전에서도 큰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 테니까.

판트는 과연 연우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가 궁금했다.

그가 알기로 연우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튜토리얼에서도 칸, 도일과 친분을 쌓았다지만, 그렇다고 따로 팀을 이룬 건 아니라고 들었다. 거의 솔로로 돌파를 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니, 과연 탑에 들어가서도 독불장군처럼 계속 솔로 플레이를 추구할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연우의 대답은 어딘지 모르게 아리송했다.

“당분간은.”

“응? 당분간이라니? 당분간만 솔로로 지내다가, 몸값 적절하게 튀어 오를 때 소속을 알아보겠다는 뜻?”

“마음대로 생각해라.”

“으음.”

연우는 더 이상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럴수록 판트는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미간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물론, 연우는 그렇게 말했어도, 정작 어느 특정한 팀이나 클랜에 소속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것 따위 있어 봤자,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지. 혹만 될 가능성이 크고.’

연우는 튜토리얼을 거치면서도 어느 정도 정은 주었어도, 마음을 완전히 열어 준 적은 없었다.

동생이 어떻게 당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약점이 될 만한 거리는 절대 만들어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자 했고, 그건 헤노바나 판트 남매를 대할 때에도 크 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클랜에 들어갈 경우가 있긴 하겠어.’

연우는 한 가지 가정을 내리고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살벌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놈들의 심장부에 깊숙하게 들어가, 칼을 꽂을 때.’

물론, 아직 힘이 부족한 지금 당장 시도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당분간은 정우가 적어 둔 히든 피스들을 모으면서 힘을 기르는 데에만 집중해야 해. 복수는 그 뒤에 진행해도 늦지 않아.’

원수 중 한 명인 리언트의 한쪽 팔, 빌드를 잡기는 했어도 상황이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일 뿐.

연우는 아직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은 뛰어난 플레이어로 주목 받는 정도에 그칠 생각이었다.

‘팀도, 클랜도, 세력과 관련된 어떤 것도 만들지 않는다. 그저 최대한 나를 속이고, 숙이고, 감춘다.’

연우의 눈빛이 담담하게 빛났다.

‘하지만 일어날 때에는 득달같이. 단번에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연우가 가장 먼저 탑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히든 피스도 바로 올림포스의 보고를 여는 것이었으니.

그 속에 한 가지 얻을 아티팩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커피도 다 마셨으니, 이만 일어나지.”

“예. 그러죠.”

“네.”

판트와 에도라도 연우를 따라서 일어서려던 때였다.

“으음? 여기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느낌이로군.”

그때.

테라스 쪽으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금방이라도 불길이 타오를 것처럼 붉은색 장발이 인상적인 사내.

그 순간, 카페 주변으로 어수선했던 행적이 거짓말처럼 조용해 졌다.

연우를 호시탐탐 관찰하던 꼬리들도 어느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사내는 테라스가 제법 익숙한지 주변 풍경을 살짝 감상하다가, 푸근하게 웃으면서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연우의 눈빛이 살짝 굳어졌다.

다행히 가면으로 얼굴을 덮고 있어서 들키지는 않았지만, 한 번 일어난 심리적인 동요는 멈추지 않았다.

‘저 사람이, 여기는 왜?’

연우의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했다.

“독식자, 맞지?”

사내가 연우를 보면서 빙긋 웃었다.

담담하면서도,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

하지만 그 속에는 절대 사람을 거스를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숨어 있었다.

흔히 연우를 스카웃하러 온 사람들은 존대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하대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고 그것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은연중에 풍기는 분위기가 공기를 휘어잡고 있기 때문이리라.

사내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을 품고 있었다. 지금 연우로서는 절대 맞서지 못할 힘.

연우는 이런 힘을 가진 사람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랭커.’

이런 곳에서 탑의 최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실력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더군다나 상대는 연우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화권(火拳)의 바할.’

평소에는 점잖은 성격을 하고 있지만, 싸움에 임할 때에는 전신에 불길을 둘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깡그리 태워 버린다는 랭커.

레드 드래곤이 자랑하는 간부 중 한 명이며, 한때 아르티야의 멤버이기도 했던 자였다.

그리고.

‘헤노바의 제자이기도 했었지.’

하지만 아르티야의 해체와 함께 헤노바와 의절을 당한 뒤로, 다시는 탑 외 지역에 오지 않을 거라고 했던 녀석이 여기는 왜?

‘나이트 워치의 일 때문인가? 산하 조직이라고 해도 랭커들이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 판단이 틀린 건가? 아니면 단순히 나를 스카웃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가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한 가지는 잊지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

랭커는 대부분 일가(一家)를 이룬 초인(超人)들이다.

일반 플레이어들의 생각이나 노림수 따위는 그들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너무 쉽게 읽힐 수 있었다.

바할 역시 언젠가 연우가 부딪쳐야 할 녀석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예전에 생각했듯이.

그는 아직까지 랭커나 클랜들과 직접 부딪칠 정도의 힘이 없었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자신을 감춰야만 했다.

그래서 연우는 최대한 동요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

바할은 그런 연우를 보면서 피식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무뚝뚝하다는 말은 듣긴 들었지만. 정말인가 보군. 뭐, 그런 성격이 나쁜 건 아니지.”

바할은 부드럽게 눈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길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짧게 말하지. 레드 드래곤으로 들어올 생각 없나?”

“……!”

뜻밖의 말.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알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노비스에게 영입 제안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네가 바로 그 첫 대상이고.”

바할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앞으로 네가 층계 공략을 하는 데 있어 필요한 것들, 전부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 주지. 지원 정도는…… 아마 네가 생각했던 것, 이상일 테고. 어때?”

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알기로도 갓 튜토리얼을 헤치고 나온 노비스에게 8대 클랜이 직접 관심을 기울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아무리 튜토리얼에서 맹활약을 보였다고 해도, 탑을 오르던 중에 사망하거나 낙오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만큼 튜토리얼과 탑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초기에는 실력이 뒤처져도, 어떤 계기를 통해 실력자로 우뚝 서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 보니 8대 클랜들은 굳이 ‘유망주’를 발굴하기보다는, 실력이 검증된 이들을 초빙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유일하게 예외를 두고 있는 곳은 청화도뿐.

다만, 청화도는 클랜 특성상, 자체적으로 플레이어들을 선발하고 육성해서 자기 전력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우 역시 많은 클랜들의 제안을 받아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레드 드래곤이 이렇게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역시 그만큼 전력을 필요로 할 일이 있다는 거겠지.’

연우는 최고급 마정석이 발굴되는 하르간의 둥지가 신비 상인에게 비싼 값에 팔렸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8대 클랜 간에 긴장감이 흐를 거라던 예상.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질 않았다.

레드 드래곤으로서는 연우 같은 사람이 타 클랜으로 흘러 들어가는 걸 조기에 차단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겠지.

그리고 외부에도 ‘레드 드래곤이 침을 발라 놨다’고 공표하는 것과 같았으니.

아마 앞으로 연우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하는 자들은 없을 터였다. 레드 드래곤과 괜히 척을 지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연우는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바할은 겉으로 보기에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안쪽에는 흉악한 짐승을 품고 있었다.

최대한 의심을 사는 행동은 피해야 했다.

“아직까지는 어딘가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연우는 허세에 취한 노비스처럼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행히 바할도 그렇게 받아들였는지, 가볍게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때는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차 있을 때지.”

바할은 ‘탑은 튜토리얼과 다를 텐데’라는 뒷말을 굳이 달지 않았다.

탑에서 이리저리 구르다가, 솔로 플레잉의 한계를 느끼고 나면 알아서 지금의 이 제안을 떠올리게 될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라고.”

“그러지.”

바할은 연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기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실린 마력이 연우에게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아, 그리고.”

그렇게 바할은 테라스를 벗어나다 말고, 뭔가 빠뜨린 게 있다는 듯 잠시 걸음을 멈췄다.

“스승님께서 간만에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처럼 보이던데. 마음이 약한 분이니까 잘 부탁하지.”

바할이 가볍게 웃으면서 떠났다.

연우는 전혀 모른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승?”

“아, 그냥 말하면 모를 수 있겠군. 드워프 헤노바 말이야. 내 몫까지 잘 부탁하지.”

바할과 헤노바 간의 관계는 탑에서도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비밀에 가까웠다.

헤노바가 8대 클랜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그동안 암흑가 클랜들이 뭣도 모르고 헤노바에게 해코지를 가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바할이 완전히 자리를 떠난 뒤.

“푸하!”

판트는 막혔던 숨을 거칠게 토했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뭐야, 저거?”

판트는 연우와 바할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단 한 마디도 끼어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치 공간에서 따로 유리된 기분.

그의 아버지가 실력자들을 만날 때에나 느꼈던 압박감을 탑 외 지역에서 느끼게 될 줄이야.

그리고.

그런 압박감을 두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덤덤하게 대화를 나눈 연우가 이제는 괴물처럼 보였다.

“랭커야. 아마도…… 화권인 것 같은데.”

“뭐? 화권?”

에도라가 살짝 굳은 표정으로 내뱉은 말에, 판트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화권의 바할이라면 레드 드래곤을 상징한다는 ‘81개의 눈’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

그런 사람이 연우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특히 레드 드래곤은 76층에 자리를 잡은 채, 50층 아래로는 관심도 두지 않는다는 말이 파다할 정도로 고고한 존재들.

외뿔부족들도 쉽게 대하지 못할 세력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직접 간부가 찾아와 스카웃을 제안할 정도이니.

당연히 연우를 보는 판트의 눈빛도 묘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뭔가를 고민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희들은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으면 마저 하고 가라.”

“어디 가시는데요?”

“대장간에. 잠깐 뭘 좀 두고 온 게 있어서.”

연우는 판트가 같이 가자고 말할 겨를도 없이, 테라스 밖으로 몸을 던져 사라졌다.

* * *

‘바할이 왔다가 갔다면, 헤노바에게 들르지 않았을 리가 없어.’

연우가 파악한 헤노바는 겉으로는 잘 툴툴거려도, 속은 유리처럼 너무 약한 사람이었다.

바할과의 만남이 그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쳤을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으음? 이 시간에 네가 웬일이냐?”

헤노바는 화롯가 앞에서 곰방대를 끔뻑끔뻑 피워 대고 있었다.

슬퍼하거나 우울함에 잠겨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서 오히려 연우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연우는 순간 괜찮은지 묻기가 애매해졌다.

‘내가 너무 민감하게 생각했나.’

연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적당히 둘러대려 했다.

하지만 헤노바는 연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이유야 별 상관없으니 됐고. 마침 잘됐다. 방금 전에 좀 짜증 나는 일이 있어서, 간만에 스트레스도 풀 겸 망치질 좀 열심히 했더니.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물건이 다 만들어졌다.”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말씀은?”

“그래. 기에스의 눈, 다 만들었다.”

헤노바는 안쪽 구석에 뒀던 함을 가져와 바닥에 내려놨다.

쿵!

얼마나 묵직한지 내려놓는 소리가 제법 컸다.

“열어 봐라.”

헤노바가 놀랄 준비를 하라는 듯 오만하게 턱을 치켜세우면서 말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선물.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안쪽에는.

한 개가 아닌, 두 개의 아티팩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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