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1층 (2)
바할이 카페를 나서는 순간, 주변 교통을 통제하던 플레이어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플레임 비스트.
따로 바할의 친위대로도 불리는 레드 드래곤의 전투 부대였다.
바할은 한적한 거리를 보면서 눈살을 살짝 좁혔다.
“또 길을 막고 있었나?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바할 님을 노리는 자들은 많습니다. 유의하신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바할은 단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이들은 말이 좋아 자신의 친위대라 불릴 뿐이지, 원래는 레드 드래곤의 수장이 직접 육성한 특수 부대 중 하나였다.
그렇다 보니 바할은 단순히 이들을 지휘하는 역할만 맡고 있을 뿐, 세세한 부분에서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요즘 같이 탑 내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돌고 있을 때에는 더더욱 그런 정도가 심했다.
랭커는 각 클랜의 전력을 가능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
바할 같은 존재를 잃는 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바할은 이런 탑 외 지역 같은 곳까지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플레임 비스트는 말을 따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옆에 있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도 순조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한데, 독식자라는 자와는 같이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 본다더군.”
단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노비스 주제에. 간이 배 밖에 나온 놈이로군요.”
레드 드래곤에 대한 충성심으로 살아온 그로서는 클랜의 제안을 걷어찬 연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바할이 피식 웃으면서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한창 기세등등할 때잖아? 너나 나도 저 때는 다 저랬었고.”
“그래도 무례한 것은…….”
“그만둬. 어차피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지금의 제안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단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심자 구역이라면 모를까, 탑은 튜토리얼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절대 오를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애초 다른 놈들이 접근하지 않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기도 했고. 내가 직접 왔는데,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누가 건드리겠나. 어차피 갈 곳은 우리 클랜밖에 없어. 그리고.”
바할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부드럽던 인상 위로 날카로운 불꽃이 일렁였다.
“조사는? 어떻게 됐나?”
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예상했던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하, 하하! 리언트, 그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게 전혀 없구나. 시간이 흘러도 참 한결같은 친구란 말이지.”
사실 바할이 탑 외 지역으로 직접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 건, 단순히 연우를 스카웃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정도는 밑에 있는 플레임 비스트 중 한 명만 보내도 충분한 일이었으니까.
그저 외부에는 이 일을 핑계 삼고, 실은 다른 진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리언트에 대한 추격.
얼마 전, 레드 드래곤 내 조사대에게 이상한 정보가 하나 걸려들었다.
청화도에서 무신이 될 예정에 있는 리언트가 튜토리얼에서 뭔가를 비밀리에 꾸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레드 드래곤은 청화도가 아랑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따로 건드리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 비밀 조직은 따로 체크만 해 둬야 한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 한 번에 들이쳐야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아랑단이 사실은 리언트의 사조직이라는 내용이 새롭게 걸려든 것이다. 여기에 플레이어들을 따로 납치해서 뭔가를 비밀리에 만들고 있다는 것까지도.
이에 레드 드래곤에서는 아랑단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 바할에게 조사에 대한 모든 책임 권한을 위임했다.
한때 리언트와 함께 아르티야에서 뛴 적이 있으니, 그를 잘 파악할 거란 판단에서였다.
이때부터 바할은 플레임 비스트를 이끌고, 리언트와 아랑단에 대한 추적을 시도했다.
자금 유동 흐름, 자원의 이동, 튜토리얼로 파견되는 인적 사항까지 낱낱이.
그리고 내린 결론은.
“수백 수천의 플레이어들을 갈아 넣어서 새로운 마력 기관을 만든다…… 옛날 전래 동화에서나 듣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진짜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를 줄이야.”
바할은 아직까지 리언트가 만들고자 하는 물건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능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마력 기관(魔力器官).
혹은 마력 기관(機關)이라고도 불리는 것.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체내에 마력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마력을 담은 그릇을 마력 기관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력 기관도 신체의 일부다 보니 마력을 담을 수 있는 총량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군주나 최상위 랭커 등, 뛰어난 경지에 오르면 육체가 재구성되면서 총량이 대폭 늘어난다고도 하지만, 그런 위치에 오르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항상 마력 총량이 문젯거리였다.
그래서 많은 플레이어들이 외부에서 마력을 공급해 줄 마력 기관을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물로, 가장 먼저 탄생하게 된 것이 포션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가지 물건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졌다.
갖가지 옵션이 달린 마도구(魔道具)나 마력을 따로 저장할 수 있는 마력원(魔力源)이 만들어졌고, 심지어 ‘에너지 드레인’이라고 분류되는 마력 갈취를 위한 스킬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도 플레이어들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더 많은 총량을, 나아가 무한대로 마력을 공급해 줄 수 있는 기관을 만들고자 했으니.
바할은 리언트가 바로 이런 마력 기관을 만들려 했다고 추정하고 있었다.
마력은 순도가 맑으면 맑을수록 더 효율적인 에너지를 뽑아낸다.
그리고 그런 마력을 뽑아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인간의 피륙과 영혼을 쥐어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나중에는 실패로 판명 나고 말았다.
순수한 마력은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이 과정에서 죽은 인간의 저주나 사념이라도 어리게 되면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여러 네크로맨서나 연금술사들이 번번이 실패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리언트가 그런 실패도 무릅쓰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했다?
그것도 보통 플레이어들이 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튜토리얼에서?
바할은 리언트가 ‘어떤 방법’을 찾아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주와 사념이 어리지 않게 할 수 있는 공정 방법을.
‘설마 그 방법이 말로만 전해지던 ‘돌’은 아니겠지?’
예부터 연금술사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었다.
마나의 주인, 용종(龍種)만이 지녔다는 마력회로에 버금가는 만능의 물질이 존재한다고.
그들은 그걸 가리켜 ‘돌’ 혹은 ‘심장’이라고 불렀다.
‘뭐, 그럴 리는 없겠지.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즉에 만들어지고도 남았을 테니까.’
다만, 공정 방법과 리언트가 만들었다는 물건은 확실히 확보를 해야만 했다.
‘앞으로 아주 큰 도움이 되겠지. 레드 드래곤에게도. 나에게도.’
바할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가볍게 축였다.
“리언트의 소재는?”
“현재 튜토리얼로 이동했다가 곧 이쪽을 거칠 예정이라고 합니다.”
“좋아. 그럼 바로 그쪽으로 이동한다. 말했듯이 목표는 물건과 리언트다. 단, 둘 다 완전한 확보가 어렵다 판단되면 리언트는 죽여도 좋다. 하지만 물건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어야 한다.”
“예!”
“예!”
“그럼 가자.”
그렇게 바할과 플레임 비스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언트를 사냥하기 위해서.
이미 그들이 확보하고자 하는 물건은 리언트의 손을 떠나 버렸다는 것도 모른 채.
* * *
연우는 마갑을 몸에 걸치고, 허리띠에다가 마장대검과 카르슈나의 단검을 교차해서 걸었다.
목에는 고블린 왕의 눈과 몬스터 5색 보석을 같이 박은 펜던트를 걸고, 등에는 비그리드를 비스듬하게 꽂았다.
그리고.
튜토리얼을 통과하면서 계속 썼던 하얀 귀신의 얼굴을 벗고, 대신에 마장철면을 덮었다.
철컥!
가면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얼굴에 착 달라붙었다.
여태껏 딱딱하고 차갑기만 하던 하얀 귀신의 얼굴과 다르게 아무 것도 쓰지 않은 것처럼 너무 편했다.
마치 헤노바의 손길이 직접 맞 닿은 것처럼.
우우웅-
지난 한 달 동안 계속 단련을 거듭했던 마력회로도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력이 몸 곳곳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검은색 가면 사이로 한 쌍의 도깨비불이 타올랐다.
연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휴식과 준비는 끝났다.
이제 탑을 오를 차례였다.
* * *
“헤노바.”
“왜 그러냐, 애송아.”
헤노바는 정말 헤노바답다 싶었다.
이름을 가르쳐 줘도 끝까지 이름으로 부르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헤노바는 연우를 제법 뿌듯한 얼굴로 바라봤다.
자신이 마련해 준 아티팩트로 무장한 플레이어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으니까.
연우도 가볍게 피식 웃다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이번에 올라가게 되면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음.”
헤노바는 잠시 몸이 움찔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배를 불룩 내밀었다.
“공략에 나서면 그야 당연한 거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네 맘이고. 그런 걸 굳이 왜 나한테 말해?”
연우는 뭔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헤노바는 알까?
이게 작별 인사라는 사실을.
‘이 이상 가까워져 봤자 이 사람에게는 해만 될 뿐이야. 괜히 내 일에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
동생이 왜 그토록 따랐는지는 이미 충분히 알았다.
그렇다면 거기서 끝내야 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은 멀었고, 험난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험난한 가시밭길에 같이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갈리어드에게도 말했듯이.
‘이 전쟁은, 내 전쟁이니까.’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헤노바는 곰방대를 입에다 갖다대면서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것이 몸 조심히 하라는 그만의 인사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연우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인사를 하고, 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몇 번씩이나 느낀 점이었지만, 탑은 높아도 너무 높았다. 구름을 뚫고, 하늘을 떠받치듯이 높다랗게 서 있다.
마지막 층계까지 오른 사람은 반드시 신이 될 수 있다는 신비에 찬 장소.
입구로 통하는 거대한 철문 앞에 섰다.
그때, 뒤에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토오오옵!”
뒤에서 불쑥 큼지막한 손이 튀어나오더니 철문을 열던 연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헤엑, 헤엑, 손의 주인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연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판트였다.
녀석은 먼 길을 다급하게 뛰어왔던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 탑에 들어가자고 그렇게 내가 노래를 불러 댈 때에는 듣는 척도 안 하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요? 들어갈 거면 들어간다고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던가!”
연우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왜?”
“으으! 진짜, 이 양반이.”
판트는 분통이 터지는지 큼지막한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연우는 가느다랗게 눈을 좁혔다.
“너희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희들과 소꿉놀이할 시간 따윈 없어. 노는 시간은 딱 어제까지다. 난 내 갈 길만 해도 바빠.”
판트는 연우의 너무 싸늘한 말투에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새카만 가면 사이로 비치는 두 개의 도깨비불.
강렬한 안광은 튜토리얼의 G구획에서 그가 만났던 연우를 떠올리게 했다.
강하고, 독선적이며, 오로지 앞으로 달리기만 하던 모습.
그리고 그 눈빛은 아버지인 무왕이 전쟁을 치르기 전에 보이던 눈빛과 너무 비슷했다.
‘대체 뭘 하려고……!’
판트가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뒤늦게 에도라가 도착했다.
그녀는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싱긋 웃었다.
“그럼 오라버니 먼저 가세요.”
“야!”
판트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에도라를 돌아봤다. 연우도 에도라의 속내를 알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
에도라의 미소가 커졌다.
“대신에 저흰 저희대로 오라버니 뒤를 쫓아갈게요. 쫓아가는 건 저희 마음이니, 설마 그것까지 막지는 않으시겠죠?”
판트는 좋은 생각이라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우는 그런 두 남매를 살짝 노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뒤돌아섰다.
“알아서들 해. 하지만 낙오하면 버리고 간다.”
“크하핫! 걱정 마슈. 눈에 띄는 건 내가 죄다 부숴 버릴 거니까. 1층은 이미 한 번 다녀오기도 했었고.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만 물으쇼.”
“잘난 척은. 규칙도 잘 이해 못 해서 판만 엉망으로 만들어 놨었으면서.”
“시끄러. 처음에는 실패해도 두 번째부터 잘하면 되는 거 아니냐.”
연우는 투닥거리는 판트와 에도라의 말을 뒤로 흘려들으면서.
끼이익-
있는 힘껏 철문을 밀어 열었다.
그 순간, 1층으로 통하는 탑의 문이 활짝 열렸다.
첫 입성(入城)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