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1층 (3)
[오벨리스크에 접속하셨습니다.]
[이곳은 1층의 대기 구역입니다. 시련에 필요한 모든 인원이 찰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십시오.]
연우와 판트 남매는 문을 열고 통로를 걷던 중에 갑자기 주변 풍경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커다란 너비를 자랑하는 홀(Hall)이었다.
홀은 온통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뤄져 있었다. 천장에는 부드러운 조명을 뿌려 대는 샹들리에가 걸렸고, 바닥에는 갖가지 소파와 편리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홀의 양쪽 끝에는 기다란 복도가 놓여, 벽면을 따라 여러 개의 방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연우는 여기가 어딘지 대략적으로 알 것 같았다.
‘대기 구역.’
장기 미션이 시작되는 11층부터는 층계에서 터전과 촌락을 이루며 살아가는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하지만 단기 미션이 수행되는 10층 아래의 초심자 구획은 보통 대기 구역이 정해져 있어 일정한 인원이 차야만, 시련이 시작되는 방식이었다.
그중에서도 1층의 대기 구역은 흔히 ‘스타트 존’이라고도 불리며 아주 중요한 장소였다.
탑을 오르고자 하는 이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쉴 수 있는 장소.
그리고 편의 시설도 제법 잘 갖춰져 있었다.
원한다면 대기 구역 내에서 짧은 명상이나, 수련도 가능했다. 때에 따라서는 신비 상인이 방문해 기초적인 물건 구매도 할 수 있었다.
미션(Mission), 흔히 탑에서는 ‘시련’이라고 부르는 과제를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장소.
여기서 플레이어들은 서로 간에 친목을 다지기도 하고, 때로는 팀 대 팀으로 거래를 나누기도 했다.
대기 구역에는 이미 플레이어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인원은 대략 50명 내외.
“왔군.”
“……역시. 또 왔어.”
플레이어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갑자기 대화를 뚝 그쳤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쪽을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환멸감이나 짜증도 더러 섞여 있었다.
연우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낯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딱히 그들의 경계심을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곧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깨닫고 피식 웃고 말았다.
‘이놈들을 보는 거였군.’
판트 남매는 플레이어들의 시선 따윈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어디 보자. 여기쯤에 그게 있었을 텐데. 꽤 맛있었는데.”
“술 마실 생각하지 마. 저번처럼 또 난동 피우려고?”
“헤헤.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냐?”
“안 돼.”
판트는 진열장에 혹시 남은 술이 없나 뒤적거렸고, 에도라는 그를 뜯어말리다가 귀찮은지 적당한 구석 자리에 앉아 가져온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마치 이 넓은 대기 구역에서 딱 두 사람만 따로 유리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긴. 원래 이런 녀석들이었지.’
최근에 이 두 사람이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녀서 그렇지, 원래 판트 남매는 튜토리얼에서도 논외로 취급받고 있었다.
최강의 일족, 외뿔부족의 왕족들.
그들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날 뿐만 아니라, 최상급 무술을 단련하고, 왕족으로서의 예절과 품위, 덕목까지 익히는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당연히 일반 사람들에게 그들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다 가가지도 못한다. 아니,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리고.
연우는 자신에게도 그런 비슷한 시선이 쏟아진다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 맞지?”
“어. 독식자야.”
“미친. 이번 회차 시련도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하는 건가?”
“어쩌면 무임승차를 할 수 있을지도.”
“저놈들이 그걸 지켜보겠냐?”
이미 연우가 이번 회차에 참여한다는 소식은 저층 구간의 플레이어들 사이에도 쫙 퍼진 모양이었다.
연우는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어차피 이들과 친분을 쌓을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사실 판트 남매와 같이 움직이게 된 것도 상황이 그렇게 흘러서였을 뿐.
밖에서 했던 말처럼 방해가 된다면 그냥 두고 갈 생각이었다.
직진.
연우는 10층을 모두 끝낼 때까지 공략을 단 한 번도 쉬지 않을 생각이었다.
‘열흘 안에, 아니, 최대 9일 안에 초심자 구역을 모두 통과한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
그렇게 해야만 하데스의 열쇠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초심자 구역에는 한 가지 비밀이 더 숨겨져 있었다.
‘각 층계마다 숨겨진 열쇠들도 찾아야 하고.’
튜토리얼에서 한 개. 초심자 구역에서 한 개.
그렇다면 올림포스의 열쇠를 완성시키기 위해 남은 열쇠는 총 10개.
이 10개는 전부 하나씩 각 층계마다 숨겨져 있으며, 히든 피스로 존재하고 있다.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숨겨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시련과는 다른 히든 퀘스트를 수행해야 하기도 한다.
즉, 연우는 열 개의 시련을 수행하며 층계를 빠른 속도로 통과하면서 또 별도로 열 개의 히든 피스도 찾는 이중고를 겪어야 하는 셈이었다.
‘1층에 숨겨진 열쇠는 헤라의 열쇠였지?’
연우는 헤라의 열쇠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다가, 검지와 엄지로 눈두덩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벌써부터 피곤해지는군.’
연우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설계를 짜 놓은 관리자들을 욕하면서도, 자리를 잡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우웅-
마력회로가 가볍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명상에 잠기면서 마력회로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살폈다. 근육과 골격의 움직임도 세세하게 감각에 잡혔다.
사실 피곤하다는 감상과는 다르게, 그는 이미 실패 따위는 상정에 두지도 않고 있었다.
여태 쌓아 올린 스탯과 스킬이 있었고, 획득한 아티팩트가 있었으며.
몸에 착용한 기에스의 눈도 있었으니까.
“…….”
우우웅-
마력이 더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 * *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에 여러분들의 1층 시련을 안내하게 된 관리자, 아론이라고 합니다.”
이블케와 달리 190센티미터는 넘는 것 같은 장신. 창백한 피부. 붉은 입술을 뚫고 나온 송곳니가 유독 인상적이었다.
‘뱀파이어.’
관리자들은 모두 몬스터인 걸까.
뱀파이어 역시 이블케처럼 반듯한 턱시도를 입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관리자가 나타난 건, 연우가 탑에 들어오고 사흘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대기 구역에는 수백 개의 방이 제공된다.
각 방은 주인의 허락 없이는 타인이 절대 침입할 수 없는 구조.
덕분에 그동안 연우는 아티팩트를 점검하거나 명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본격적인 ‘시간 기록’은 1층의 시련이 시작되는 시점부터였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사이에도 유입 인구가 꾸준히 늘면서 대기 구역 내에 상주하는 인원이 거의 100명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연우가 느낀 점은, 플레이어들이 과도하게 판트 남매를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튜토리얼에서 이름을 알렸던 자신보다도 훨씬 더.
아니, 자신을 경계하는 건, 오히려 판트 남매와 자주 어울리기 때문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얘들은 이미 1층을 겪었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판트와 에도라쯤 되는 녀석들이 1층의 시련을 실패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실패했다면 시련을 공략하던 도중에 뭔가 꼬였거나, 팀원들 간에 어떤 반목이 생겼을 경우.
연우는 아무래도 후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막 나가는 판트 녀석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만약 지금 대기 구역에 있는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판트 때문에 공략에 실패했던 자들이라면.
‘어떻게 된 일인지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겠군.’
괜히 이번에도 쓸데없는 짓을 해서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니까.
연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관리자 아론은 딱 100명이 된 플레이어들을 한데 모은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본격적인 탑의 공략을 시작하기 전에 필요한 것들이나, 명심해야 할 사항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연우는 일기장을 통해 파악해 뒀던 것들이기 때문에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리고 일장 연설이 끝난 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저를 여기서 몇 번씩 봐 이미 내용을 알고 있으신 분들도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처음 오신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으니 시련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론이 빙긋 웃었다.
“단, 설명은 한 번밖에 되지 않으니 모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짜악!
아론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연우와 플레이어들을 둘러싼 공간이 휘청거리더니, 새로운 공간으로 안내되었다.
순간.
휘이잉-
“으윽.”
“흡!”
갑자기 불어닥치는 강풍.
플레이어들은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자세를 바짝 낮추거나, 마력을 한껏 유동하면서 발에 잔뜩 무게를 실어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풍경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높다랗게 서 있는 거대한 절벽 위였다.
주변은 도무지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하게 깊은 협곡이 깔려 있었다.
자칫 강풍에 휩쓸려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했다간 시체도 온전히 남기지 못할 게 뻔했다.
그리고 맞은편에도 그들이 있는 절벽과 같은 모양을 한 절벽이 우뚝 서 있었다.
이쪽 절벽과 저쪽 절벽 사이에는 구름다리가 3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구름다리는 딱 보기에도 위험천만해 보였다.
나무판자와 새끼줄만 대충 엮어서 만들었을 뿐, 이렇다 할 보강재가 하나도 없어 강풍이 불 때마다 크게 출렁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1층계의 스테이지.’
연우는 일기장에서나 봤던 스테이지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 순간.
하늘을 따라 거대한 메시지 창이 열렸다.
[이곳은 1층, 쌍벽의 관입니다.]
[1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그때, 메시지 창 아래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푸른색 크리스탈이 빛무리에 잠긴 채로 나타났다.
개수는 총 5개.
메시지가 계속 이어졌다.
[시련: 현재 이곳에는 두 개의 커다란 절벽이 놓여 있습니다. 각 절벽에는 100명으로 구성된 팀이 존재하며, 각각 5개의 크리스탈이 함께 주어집니다.
적으로부터 절벽을 사수하고, 팀의 크리스탈을 보호하십시오. 그리고 적의 절벽을 쳐서 상대의 크리스탈을 빼앗거나 부수십시오.
정해진 시간 내에 더 많은 크리 스탈을 부수거나 빼앗는 팀이 승리하게 됩니다.]
메시지가 끝나자, 다섯 개의 크리스탈은 아론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아론이 빙긋 웃으면서 부가 설명을 시작했다.
“메시지에 설명되었듯이, 저쪽 절벽도 이쪽과 똑같이 100명으로 구성된 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방금 전, 붉은색 크리스탈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임의로 이곳은 블루 팀, 저곳은 레드 팀이라고 명명하겠습니다.”
아론은 크리스탈에 시선이 고정 된 플레이어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크리스탈을 보호하는 것은 어떤 방법이라도 좋습니다. 미지의 장소에 숨겨도 좋고, 가장 강한 사람이 가지고 있어도 좋습니다. 단, 보호는 하되, 저쪽을 어떻게 침략할지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야겠지요?”
플레이어들은 레드 팀이 있을 맞은편 절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절벽과 절벽 사이로 이어지는 구름다리는 단 세 개뿐.
그마저도 협곡을 따라 부는 바람 때문에 계속 출렁거린다.
저 위에서 싸우라고?
자칫 움직이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바닥을 이루는 나무판자나 그것을 엮은 줄도 너무 약해 보였다.
조금만 충격을 줘도 금세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1층부터 미친 난이도로군.’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튜토리얼도 튜토리얼답지 않게 아주 어려웠다지만, 그래도 솔로 플레이로도 깨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1층의 시련은 초기부터 그런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었다.
서로 얼굴도 잘 모르는 낯선 100명이서 팀워크를 발휘해야만 한다. 그리고 위험천만한 구름다리 위를 건너 상대의 크리스탈을 빼앗거나 부숴야만 한다.
교섭력, 통치력, 연대감 등, 다양한 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헤라의 열쇠를 필요로 하는 연우에게는 한 가지 조건이 더 주어졌다.
‘푸른색, 붉은색, 색깔 구분 없이 모든 10개의 크리스탈을 손에 넣을 것.’
여기에 시련의 내용에 나왔던 문구에 문제가 있었다.
빼앗거나 ‘부숴도’ 좋다는 문구.
하지만 크리스탈 중 단 한 개라도 부숴지는 순간, 헤라의 열쇠는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연우는 조금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교섭? 전쟁?
연우에게는 그런 것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그냥 압도적인 힘으로, 방해꾼들을 모두 밀어 버린다.’
연우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우선 이쪽의 크리스탈부터 전부 손에 넣어야겠지.’
연우는 아론이 쥐고 있는 다섯 개의 푸른색 크리스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론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시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크리스탈 분배부터 하겠습니다. 누가 대표로 받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