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2화 (72/862)

22화. 1층 (4)

플레이어들이 잠깐 서로 간에 눈치를 봤다.

100명이라는 인원은 많은 것 같으면서도, 절대 많은 인원이 아니었다.

여기서 대표로 나선다면 앞으로 1층을 공략하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게 뻔했다.

다행이라면 이미 플레이어들 간에는 어느 정도 커뮤니티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연우 등과 달리, 그들은 이미 대기 구역에 머물면서 서로 면식을 튼 상태였다.

그리고 다수는 이미 이전 회차에서 의기투합을 하기도 했으니.

자연스레 이끄는 위치가 된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제가 받도록 하죠.”

붉은색 가죽옷을 입은 사내는 주변의 시선을 받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아론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에게 건네려는데.

“잠까안.”

갑자기 판트가 불쑥 앞으로 나서면서 방해했다.

사내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뭡니까?”

“난 너더러 받으라고 찬성한 적이 없는데?”

사내는 살짝 화가 난 얼굴이 되었지만, 꾹 참으면서 말했다.

“누가 받든지 무슨 상관입니까? 일단 받고 나서 각자 의논을 나눠서 숨기면 될…….”

“아니. 다섯 개 전부 내가 맡도록 하지.”

사내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자질구레하게 숨길 바에는 차라리 내가 갖고 있는 게 낫지 않나? 아니면? 너희들 중에 나보다 더 잘 맡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판트가 사납게 웃으면서 주변을 쓱 훑어봤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은 주춤 물러서거나,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 했다.

판트가 다시 사내를 돌아봤다.

아무도 부정하지 않냐는 눈빛.

하지만 사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양심도 없습니까? 이전 회차에서도 그렇게 욕심을 부리다가, 괜히 크리스탈만 전부 부서지지 않았습니까!”

사내의 뒤에 있던 몇몇 플레이어들이 기억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던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저렇게 된 거였군.’

이전 회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그림이 그려졌다.

판트는 중요한 물건을 타인에게 맡길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반드시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근거 없는 믿음과, 자신의 의도대로 사건을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문제는 그런 모난 성격을 가지고 있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강했으니까.

탑의 세계에서 ‘강하다’는 것은 모든 단점을 보완하고도 남을 만큼 아주 귀한 보물이었다.

차라리 정의라고 해도 틀린 게 없었다.

그리고 그건 에도라도 똑같은 생각이었으니.

단순하고 욕심 많은 판트와 다르게 그녀는 분명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판트가 저렇게 날뛰어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그녀의 판단대로도 크리스탈은 판트가 가지고 있는 게 가장 안전했으니까.

아무리 1층 시련의 난이도가 생각보다 높다고 해도, 결국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의 수준은 고만고만했다.

그들이 아무리 떼를 지어 덤빈다고 해도, 판트의 옷자락이나 제대로 건드릴 수 있을까?

그러니 크리스탈은 판트의 손에 들어오는 게 맞았다.

다만, 조금 문제가 있다면.

“그때 당신이 괜히 욕심을 부리겠다고 날뛰지만 않았어도……! 그러니 이번에는 절대 크리스탈을 맡길 수 없습니다!”

연우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오히려 활약을 하려다가 크리스탈을 깨 버리는 경우라니.

대강 그림도 그려졌다.

아마 적진은 판트의 활약에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겠지.

당연히 시련도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테고.

그래서 모든 걸 포기했을 때, 난데없이 시련이 통과했다는 보고를 받아 버린다면?

‘당황스럽겠지. 반면에 아군은 어이가 없을 테고.’

사내는 아마 그때를 거론하면서 판트를 믿지 못한다고 의견을 내세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판트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약한 녀석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이전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 없었다.

결국 사내의 주장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럼 우리끼리 서열 정리라도 해 보자고?”

도리어 판트는 소맷자락을 슬쩍 말아 올리면서 무시무시한 겁박까지 해 대고 있었다.

흉포한 기세가 잔뜩 퍼져 나갔다.

플레이어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사내 뒤에 섰던 플레이어들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하자는 뜻이었다.

결국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꽉 쥔 주먹에 핏대가 잔뜩 서며 부르르 떨렸다.

에도라는 그때까지도 한 발자국 떨어져서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다.

튜토리얼의 G구획 때처럼 신마도를 꼭 끌어안은 채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

판트는 기세를 꺾어 놨다는 생각에 씩 웃으면서 아론에게 손을 내밀었다.

“결정이 나셨나 봅니다. 그럼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아론은 판트에게 다섯 개의 푸른색 크리스탈을 전부 건넸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포탈에 녹아 자취를 감췄다.

“으흐흐. 이번에는 좀 잘해 봐야지.”

판트는 크리스탈을 어떻게 숨기거나 보호하겠다는 별다른 작전도 내놓지 않았다.

그저 헤실헤실 웃으면서 크리스탈을 갖고 놀기 바빴다. 꼭 장난감을 만지고 노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안쪽 주머니로 넣으려 했다.

‘삥 뜯는 양아치가 따로 없군.’

플레이어들의 안색도 조금씩 어두워질 무렵.

여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연우가 앞으로 성큼 나섰다.

판트가 무슨 일이냐며 멀뚱멀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런 녀석 앞으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내놔. 전부.”

* * *

아론은 포탈을 타고 다른 공간으로 넘어왔다.

99개의 층계를 관리하는 여러 관리자들이 한데 머무는 곳. 관리자실이었다.

거기에는 여러 관리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늘에는 수백 개의 스크린이 각각의 층계를 동시에 송출하는 중이었다.

“오효효. 왔습니까?”

그때, 아론에게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아론의 허리춤에나 올 법한 키를 가진 고블린. 이블케였다.

“예.”

아론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케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

기실 관리자들도 다 같은 의미의 관리자인 것은 아니었다.

각종 사무를 담당하는 자들, 보상을 관리하는 자들, 시련을 감시 및 관리하는 자들 등, 수직적인 직위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높은 직급을 자랑하는 자들은 각각의 층계를 총 관리하는 책임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맡은 층계에 있어서는 탑의 시스템이 허락하는 한, 최고의 권한을 발휘할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군주급 인사들을 찍어 누를 수 있을 정도였다. 단, 여기에는 여러 가지 페널티가 가해질 수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개입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2층의 책임자인 아론 역시 최고위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블케는 그런 아론도 반드시 공손하게 대해야 하는 관리자였다.

그는 수백 명에 달하는 관리자들을 다룬다는 우두머리, 12간지(干支)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둘은 서로 존대를 하더라도, 이블케는 아론을 귀엽게 다루는 말투에 가까웠다.

“어땠나요?”

하지만 겉으로만 봐서는 아무도 이블케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특이한 웃음소리를 내고, 외눈 안경을 쓴 독특한 고블린으로만 여길 뿐.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론은 이블케가 던진 질문에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외눈 안경 너머로 비치는 이블케의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 어렸다.

“모르겠다고요?”

“예. 분명 보통 노비스들보다 월등히 실력이 뛰어난 건 알겠습니다만, 그래 봤자 노비스는 노비스더군요. 어르신께서 왜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시는지는 잘…….”

아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고개를 들어 허공에 띄워진 스크린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판트에게서 크리스탈을 갈취하고 있는 연우의 모습이 보였다.

판트가 불만 가득한 얼굴이 되자, 연우는 ‘그럼 네 말마따나 우리끼리 서열 정리라도 할까?’라고 담담하게 되묻고 있었다.

판트가 움찔하면서 꼬리를 마는 모습이 보였다.

아론이 봤을 때는 그저 친한 플레이어들 사이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이블케는 뭐가 그리 재미난지 그걸 보면서 낄낄 웃어 댔다.

“오효효효. 그렇군요. 그럼 우리 내기 한 판 해 볼까요?”

“내기라 하시면……?”

“저 플레이어가 이번에 사고를 친다, 안 친다로 어떨까요? 저는 친다 쪽에 걸죠.”

아론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히다가,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전 안 친다에 걸겠습니다.”

“오효효. 좋아요. 그럼 내기 내용은…….”

* * *

플레이어들은 입을 쩍 벌리면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기세등등하게 날뛰던 판트였는데.

연우는 말 한 마디로 판트에게서 크리스탈을 갈취해 버렸다.

게다가 그들은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판트가 연우를 가리켜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저 판트가 형이라고 부른다고?’

‘대체 그동안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탑 내에서 외뿔부족에 대한 인식은 간단했다.

오만하다.

그들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강한 만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무척 강했던 것이다.

그래서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으며, 나란히 설 자격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말을 섞는 것도 싫어했다.

그렇지만 한 번 마음을 열었을 때에는 자신의 목숨도 흔쾌히 내어 수 있는 종족.

당연히 왕족이라는 판트 남매는 자존심이 더 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직접 겪은 판트는 그런 소문이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 줬다.

안하무인에 자존광대가 너무 심했으니까.

그런 판트 옆에 다른 일행이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자신보다 서열이 위라는 것까지 인정하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연우에 대한 관심이 더 크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튜토리얼에서 연우와 판트 간의 대결을 지켜보기도 했던 플레이어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다는 표정이었다.

“나쁜 형님 같으니. 혼자서 날뛰려고 동생 삥이나 뜯고.”

판트가 툴툴대면서 발치에 구르던 돌멩이를 발로 뻥 하고 걷어 찼다.

그때, 에도라가 연우에게 다가갔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오라버니?”

플레이어들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얼음장 같았던 에도라가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뭣도 모르는 남자들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정작 그 미소를 보고 있는 연우는 무덤덤했지만.

그때. 연우가 무미건조한 눈길로 다른 플레이어들을 쓱 훑어봤다.

“잠시 여기 지켜 줄 수 있나?”

순간, 에도라의 눈빛이 반짝였다.

“얼마면 될까요?”

“짧으면 30분. 길면 1시간.”

“그 정도면 충분하죠. 다녀오세요.”

연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구름다리가 걸쳐진 절벽 끄트머리로 다가갔다.

플레이어들은 연우가 뭘 하려는지 몰라 살짝 인상을 좁혔다.

1층의 시련이 까다로운 건, 상대의 절벽에 침입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모르는 크리스탈을 찾아 부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조금만 충격이 주어져도 끊어질 것 같은 구름다리를 건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구름다리를 지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상대의 절벽으로 넘어가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러자니 도중에 구름다리 위에서 칼부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다 싸움이 거칠어지면 구름다리가 끊어져 위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부유 마법이나 비행 스킬이 있다고 해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구름다리 없이 상대 절벽으로 넘어갈 수는 있어도, 그 후에는 오히려 집중 사격을 당할 수도 있으니.

결국 진퇴양난일 수밖에 없는 상황.

이러한 여러 까다로운 조건들 때문에 1층은 초심자 구역에서도 가장 사망자가 많고, 낙오자도 많은 스테이지였다.

기세등등하게 튜토리얼을 통과했어도, 탑을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자들이 수두룩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판트 남매가 한 번 공략에 실패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연우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 관심을 보이면서도, 냉소적인 시선이기도 했다.

도리어 이전 판트 때처럼 크리스탈을 전부 챙겨 갔다가 무슨 사고라도 치는 게 아닐까,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으니.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등에서 비그리드를 천천히 뽑으면서 구름다리 앞에 섰다.

저 멀리, 맞은편 절벽에서 레드 팀이 구름다리 위를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1층을 통과할 수 있는 공략법은 분명 여러 개가 있어.’

휘휘휘!

마검 비그리드를 따라 강렬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귀기도 같이 둥둥 떠다녔다.

검의 축복.

이미 G구획에서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을 단번에 쓸어 내기도 했던 기능.

얼마나 강렬한지, 협곡을 타고 올라오던 강풍이 빗겨 나갈 정도의 세기였다.

연우는 비그리드를 꽉 쥐면서 높이 들었다.

콰아아!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건.’

연우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압도적인 힘으로 처바르는 거지.’

그 생각과 함께.

촤아악-

연우는 비그리드를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세게 내리그었다.

비그리드를 따라 감돌던 돌풍이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돌풍은 3개의 구름다리를 단번에 부숴 버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맞은편 절벽에 작렬했다.

폭발 소리와 함께 절벽이 크게 요동쳤다. 벽면을 따라 거대한 칼자국이 길쭉하게 남았다.

콰콰콰-

쿠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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