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1층 (5)
절벽 일부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먼지구름이 하늘로 치솟았다. 부서진 낙석이 눈 다발처럼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판트는 입을 쩍 벌렸다.
튜토리얼 G구획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강해진 위력.
그동안 망치질만 한 줄 알았는데, 사실 따로 수련도 하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에도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 팀의 다른 플레이어들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도저히 초심자 구역에 있을 사람의 솜씨가 아니었으니까.
이전 회차에서 판트가 보였던 솜씨만 하더라도 혼자서 2개 팀을 찍어 누를 정도로 압도적이었는데.
연우가 보인 힘은 그마저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으니.
하지만 가장 큰 재앙을 맞은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3개의 구름다리를 통해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던 레드 팀의 플레이어들.
그들은 블루 팀에 판트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먼저 공격을 시도하던 중이었다.
선수 필승.
이전 회차의 사건 때문에 블루 팀이 내홍을 겪을 동안, 빠르게 몰아쳐서 블루 크리스탈을 부수고 레드 크리스탈은 그 틈에 숨긴다는 계획이었다.
구름다리를 건너는 3개조가 각자 맡은 임무도 따로 있었다.
하나는 판트를 대적하고, 다른 하나는 블루 팀을 몰아붙이며, 남은 하나는 블루 크리스탈을 빠르게 물색하자는 계획.
하지만 그런 그들이 잡았던 작전은 구름다리를 전부 건너기도 전에 재앙을 맞고 말았다.
아니, 지금은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급급한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부서진 구름다리의 잔해가 아래로 쏟아진다. 깊숙한 협곡을 따라 플레이어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펙트가 곳곳에서 터졌다.
부유 마법이나 비행 스킬, 혹은 아티팩트가 있는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생존을 도모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노비스가 그런 것들을 쉽게 가질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레드 팀 중 태반이 협곡 아래로 추락하는 불상사가 벌어 지고 말았다.
“퇴로는 끊었고.”
하지만 이곳은 강자존의 법칙이 살아 숨 쉬는 탑의 세계.
연우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과 관련이 없는 자들에게는 무관심했다.
애초 이런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그들도 이런 건 충분히 각오를 하고 덤빈 것일 테니.
그리고 원하던 대로 이것으로 절벽과 절벽 사이의 연결은 모두 끊어졌다.
저쪽에서 공격할 루트가 사라졌으니, 이제 이쪽에서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
팟!
연우는 마력회로를 더 크게 회전시키면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순보였다.
쐐애액-
연우는 마치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쇄도했다.
추락하는 부서진 구름다리 잔해들을 디딤돌 삼아서 빠른 속도로 공간을 건넜다.
“미, 미친……!”
“저게 뭐야!”
레드 팀은 부서진 구름다리 때문에 충격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거센 기세가 다가오자 뒤늦게 연우의 등장을 눈치챘다.
남은 플레이어들은 허겁지겁 무기를 뽑으면서 스킬을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아직 레드 크리스탈을 제대로 숨기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하지만 비그리드에 내장된 검의 축복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적의를 가진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귀기의 위력도 비례해서 강해지는 옵션.
연우는 다시 한 번 비그리드를 횡대로 휘둘렀다.
칼날에 잔뜩 맺혔던 귀기가 다시 한 번 강풍과 함께 터져 나갔다.
해일이 지면 위를 쓸어 냈다.
콰콰쾅-
“크아악!”
“아악!”
가장 정면에서 연우와 부딪쳤던 자들은 사체도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 나갔다.
뒤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졌다.
발동하려던 스킬들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이펙트만 허망하게 허공에서 맺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마치 반딧불이라도 한데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타악!
그사이 연우는 절벽에 부드럽게 착지할 수 있었고.
휘휘휘……!
다시 한 번 비그리드를 안쪽으로 잡아당겼다가, 이번에는 수직으로 그어 올렸다.
콰콰콰-
수평으로 휘두른 귀기가 해일을 일으킨다면, 수직으로 그은 귀기는 빛의 기둥을 만들어 낸다.
위력을 넓게 퍼뜨리는 것과 좁은 지점에 밀집시키는 것의 차이.
당연히 위력은 훨씬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연우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들이 몽땅 지워졌다.
연우로부터 레드 팀의 숲 지대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그곳으로 마침 숲 지대 쪽으로 도망치던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레드 크리스탈을 운반하거나 소지하는 임무를 맡았던 조였다.
연우는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팔목에 감겨 있던 검은 팔찌가 으스스한 빛을 토해 냈다.
곳곳에 보이던 죽은 영혼들이 망령으로 귀속되고, 곧바로 흑의 칼날로 변형되었다. 연우는 그 위에다 열화 스킬을 더했다.
퍼퍼펑!
숲 지대로 움직이던 플레이어들은 갑작스레 일어난 폭발에 달리던 그대로 몸이 튕겨 났다.
그나마 실력이 있는 자들은 늑골이 부러지는 정도였지만, 그렇지 않은 플레이어는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파밧!
연우는 길목 사이를 통과, 이번에는 마갑에다 마력을 불어 넣었다.
츠츠츠.
그러자 마갑에 그어진 실선을 따라 수십 개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모습이 너무 괴기스러웠지만, 연우는 잔뜩 확장된 감각 덕분에 레드 크리스탈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크리스탈이 가진 독특한 마력의 파장을 찾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연우는 쓰러진 자들에게서 5개의 레드 크리스탈을 전부 회수했다.
그 과정에서 연우를 막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막을 수가 없었다.
이미 축복 전염을 통해 그들에게 잔뜩 퍼져 나간 갖가지 저주와 공포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으니.
게다가 그들 중 대다수가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떻게 나설 수도 없었다.
아마 그들은 이번 회차가 끝나면 당분간 재도전도 힘들지 몰랐다. 정신적 타격과 함께 부상도 그만큼 심각했으니.
100명의 플레이어로 이뤄진 팀 하나가 아예 연우 한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하고 박살 난 것이다.
그리고.
맞은편 절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블루 팀은 모두 경악성을 토해 냈다.
G구획에 참여한 적이 있던 플레이어들은 여전한 실력에 침음을 삼켰고, 다른 사람들은 말로만 듣던 독식자의 무위를 보고 암담한 격차를 느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 전혀 감흥이 없었다.
아무리 탑이 거칠다고 해도 초심자 구역은 초심자 구역일 뿐.
역대 튜토리얼 중에서도 가장 거칠었다던 회차를 1위로 통과했던 그에게 이런 시련은 너무 손쉽기만 했다.
더구나 그의 머리에는 오로지 헤라의 열쇠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연우는 모든 크리스탈을 한 손 위에 얹었다.
다섯 개의 블루 크리스탈과 다섯 개의 레드 크리스탈. 총 10개의 크리스탈은 자잘한 흠집은 있을지라도, 모양은 건재했다.
화아악!
그 순간, 크리스탈이 일제히 빛 무리에 잠겼다.
그리고 하나로 합쳐지면서 열쇠가 나타났다.
우윳빛으로 빛나는 열쇠.
[히든 피스 ‘헤라의 열쇠’를 획득했습니다.]
제우스의 열쇠가 토파즈를 세공한 것처럼 노랗게 빛났다면, 헤라의 열쇠는 다이아몬드를 세공한 것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헤라의 열쇠]
분류: 잡화
등급: C+
설명: 천공과 정절의 여신, 헤라의 보고를 열 수 있는 열쇠. 사용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두 번째 열쇠의 획득이었다.
그리고.
[모든 시련이 종료되었습니다.]
하늘을 따라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련이 시작된 지 불과 30분.
최단기 회차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 * *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체력과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
[모든 플레이어들이 대기 공간으로 소환됩니다. 충격에 유의하십시오.]
……
[공적치를 합산합니다.]
[공적치 결과]
1위. 비공개(50,000Point)
2위. 없음
3위. 없음
……
[위대한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시겠습니까?]
[등록을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아도 당신의 업적은 탑에 깊게 새겨져 원할 시에 언제든 등록 여부를 전환하실 수 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아무리 1층이라 해도, 시련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주파하신 분은 처음 봅니다. 과연 독식자랄까요…… 기록을 갱신하셨습니다. 신기록입니다.”
아론은 모든 플레이어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 나타나 혀를 찼다.
관리자실로 들어가 이블케와 내기를 했던 게 불과 몇 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끝나 버리게 될 줄은.
내기로 이블케에게 뭘 내놓아야 할지가 골치긴 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연우가 튜토리얼에서 세운 성적은 절대 운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히든 피스의 존재까지 알고 있다.’
올림포스 12주신의 열쇠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까지도.
아무래도 당분간은 내기를 할 때 무조건 이블케가 건 곳에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시련의 보상을…….”
“잠깐.”
아론은 손바닥을 펼치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우가 도중에 그의 말을 끊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보상, 초심자의 구역을 전부 통과하고 난 뒤에 한꺼번에 받고 싶은데.”
아론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각 층마다 주어지는 보상을 받아야만 위층 공략이 한결 수월해질 텐데, 그것마저도 끝까지 미루겠다니.
미루면 미룬 만큼 훨씬 더 좋은 보상이 주어질 테니 그걸 획득하겠단 뜻이었다.
이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놀라울 건 아니었다.
다만.
‘각 층계마다 지금처럼 기록들을 갱신한다면, 그 뒤에 받을 수 있는 보상은 과연 무엇이 될까?’
아론은 이제 관리자실이 떠들썩해지다 못해 머리가 터지도록 시끄러워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관리자뿐만 아니라, 탑 자체가 흔들리고 말겠지.
도대체 얼마나 더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블케가 왜 그렇게 이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론은 손길을 거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서도 좋습니다. 그럼.”
우아하게 인사를 올리는 아론의 머리 위.
거대한 빛의 장막이 드리워졌다.
[관문이 종료되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시겠습니까?]
블루 팀의 플레이어들 머리 위로 공통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침음을 흘렸다.
그들 대부분이 몇 회차에 걸쳐서 1층 공략을 시도했던 사람들.
당연히 지긋지긋한 1층을 통과해 2층에 올라간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연우를 제외하면 공적치를 획득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각 층계에서 획득한 공적치를 바탕으로 보상을 얻고, 다음 층계의 공략을 위한 아티팩트와 포션을 구매해서 준비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번 회차는 연우가 아예 독식을 해 버렸으니.
그들에게 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연우에게 업혀 승리하긴 했어도, 해낸 일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업적이랄 게 없었다.
공정한 시스템을 표방하는 탑에서는 그에 따라 보상이나 공적치를 전혀 주지 않았다.
이래서야 2층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오히려 더 험난한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리타이어 선언을 던졌다. 통과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렇게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붉은색 포탈을 따라 대기 구역으로 사라지고.
자리에는 연우와 판트 남매, 그리고 아론만 남았다.
“올라가시겠습니까?”
아론이 웃는 눈길로 세 사람을 돌아봤다.
연우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판트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콧방귀를 뀌면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에도라는 담담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다음 층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연우의 발밑에 포탈이 열렸다.
리타이어한 플레이어들에게 열린 붉은색과는 전혀 다른 푸른색 포탈.
연우는 그대로 다음 층으로 이동했다.
아직 목표까지 9개의 층이 남아 있었다.
쏴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