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돌파 (1)
[이곳은 2층, 산과 들의 관입니다.]
연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에메랄드빛 바다만 가득했던 세상은 이제 온통 초록으로 가득했다.
1층이 험준한 절벽으로 가득했다면, 이곳은 숨이 탁 트일 만큼 상쾌한 광경을 자랑했다.
아직 아래층에서 사람들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3층은 연우를 비롯한 판트와 에도라밖에 없었다.
“역시 회차가 덜 끝나서 그런가.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네. 형님, 바로 시작할 거요?”
판트가 주변을 둘러보며 투덜거리면서 연우를 돌아봤다.
연우는 그럴 거라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찾아야할 건 데메테르의 열쇠.’
데메테르는 땅과 풍요를 관장한다는 신이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독식하는 게 아깝게 여겨지면 바로 리타이어해.”
“에이. 그럴 필요가 뭐 있수? 사실 형님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뭐. 같이 한 번 해 봅시다.”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하늘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솔로 스테이지를 신청한다.”
그때 허공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툭 떨어졌다.
사람의 몸에 늑대의 머리를 가진 늑대인간. 역시나 단정한 슈트를 입고 있던 그는 이블케나 아론처럼 흥미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2층의 관리자, 요하네스라고 합니다. 바로 시련에 도전하고 싶으시다고요?”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실 텐데요.”
“하지만 회차를 독식하게 되면 그만큼 높은 공적치를 쌓을 수 있지 않나?”
“탑의 시스템을 아주 잘 이해하고 계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카인 님, 판트와 에도라 님에게만 한정시켜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2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시련: 이곳의 대지는 여신의 은총으로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 숲의 풍요를 독차지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로부터 숲의 평화를 지키십시오.]
탑의 시스템은 수행자들을 돕기 위한 것.
플레이어가 혼자서라도 수행을 하겠다고 나서자, 탑이 이것을 하나의 회차로 인식해 버린 것이다.
정우와 아르티야가 단 며칠 만에 초심자 구역을 모두 돌파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덕분이었다.
그 뒤로 다른 플레이어들도 같은 방식으로 도전해 봤지만 엉망진창으로 깨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두두두!
곧 땅이 미약하게 울리더니 저만치 먼 곳에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오크 떼가 몰려 왔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도 소란이 있었다.
서쪽에는 놀이, 남쪽에는 고블린이, 북쪽에는 오우거들이 내려왔다.
그 외에도 작게나마 곳곳에서 다른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수없이 닥치는 몬스터들을 제압해 숲의 왕이 되는 것.
그것이 2층 시련의 주된 내용이었다.
웬만한 머릿수를 보유하거나, 작전을 계획하지 않으면 절대 통과할 수 없을 곳이었지만.
피식.
연우에게는 가장 자신 있는 곳이었다.
‘튜토리얼에 있었던 몬스터 러쉬와 별반 다를 게 없으니까.’
마장대검을 역수로 쥐고, 자세를 한껏 낮추면서 지면을 세게 박찼다.
‘착실하게 한 곳씩 처치한다.’
팟!
처음 노린 곳은 오크.
저 뒤쪽에 투구를 쓰고서 수하들을 진두지휘하는 오크 로드가 보였다.
* * *
[데메테르의 열쇠가 완성되었습니다.]
연우는 2층에서 모든 몬스터들의 로드를 잡아 나온 히든 피스를 하나로 합쳤다.
녹색 빛깔을 자랑하는 열쇠가 손에 잡혔다.
[위대한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시겠습니까?]
[등록을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아도 당신의 업적은 탑에 깊게 새겨져 원할 시에 언제든 등록 여부를 전환하실 수 있습니다.]
연우가 허공을 보며 소리쳤다.
“다음.”
화아악!
[이곳은 3층, 창과 칼의 관입니다.]
3층은 연우에게도 아주 익숙한 장소였다.
“우와아아!”
“와아! 죽여라!”
“막아라! 어떻게든! 놈들을 무찔러라!”
수많은 병사들이 창과 칼을 든 채 서로를 죽고 죽이는 곳.
바닥에는 시신들이 가득하고, 곳곳에 탄내며 피비린내가 진동을 해 댔다.
이곳에서 얻어야 할 것은 아레스의 열쇠.
각 병사들이 쥐고 있는 창과 칼을 분지르면 간간이 나오는 조각들이 히든 피스였다.
[3층의 시련을…….]
연우는 관리자가 나타나 시련을 따로 내리기 전에 이미 마장대검을 쥐고 움직이고 있었다.
체력과 마력이 계속 줄어들면서 피로가 몰려올 법도 했지만, 부족한 건 몬스터들을 대량으로 잡아 룬을 삼키는 것으로 대체하는 중이었다.
‘아르티야가 초심자 구역을 모두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은 열흘. 그렇다면 난.’
연우는 어느새 지휘관으로 보이는 놈에게로 마장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쉭!
‘닷새 안에 끝낸다.’
퍼억!
지휘관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튀었다.
* * *
탑의 층계 외곽에 위치한 아공간, 관리자실.
스크린을 보고 있던 관리자들은 일제히 경악을 내질렀다.
“조금 전, 7층의 관문도 통과……!”
“시간은? 이번엔 시간이 얼마나 걸렸지?”
“12시간 28분입니다!”
“미쳤어!”
“저게 가능해?”
“아르티야는 팀플레이기라도 했지, 저놈은 혼자라고. 젠장!”
관리자들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거나, 담배를 피거나, 머리를 벅벅 긁는 등 허탈한 심정을 어떻게든 풀어야만 했다.
처음에 이블케가 아론에게 내기를 걸었을 때까지만 해도, 모두 반쯤 장난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한 층, 한 층을 통과할수록.
그들은 이블케가 했던 말이 절대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연우의 활약만큼이나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판트와 에도라도 어느 정도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으니.
물론, 탑 내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관리자들에게 연우 등의 실력은 크게 관심을 줄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오래전에 플레이어로 활약하며 높은 층수를 공략하거나, 군주의 자리까지 디뎠던 자들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들이 놀란 점은 연우가 시스템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층계를 통과하는 족족 기록을 갱신할 뿐만 아니라, 숨겨진 히든 피스까지 쏙쏙 뽑아 먹었으니까.
간만에 주목할 만한 플레이어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지고 쳐다봤다.
하지만 그게 계속될수록.
3층, 4층, 5층을 넘어갈수록.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시련을 통과하는 시간이 단축되면 될수록.
관리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만 했다.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가.
아무리 초심자 구역이라고는 해도, 시련은 시련일 텐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계속 돌파해 버리다니.
이건 정말이지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떻게 제재를 가할 수단도 없었다.
관리자의 권한은 어디까지나 시련을 통과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될 소지가 큰 편법을 제어하는 것에만 국한될 뿐.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들에게 보고를 올리던 막내 관리자는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현황 보고를 보면서 경악성을 질렀다.
“8층, 7시간 5분 컷! 아테네의 월계관을 완성시키고, 열쇠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
“……허!”
관리자들은 이제 허탈하게 웃다시피 했다.
“오효효효. 제가 또 이겼군요.”
그때, 이블케가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익살맞게 웃더니 8층의 관리자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아론과 요하네스 등에 이어서 벌써 8번째 내기 희생자였다.
물건을 넘기는 관리자의 손길이 덜덜 떨렸다.
이블케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아무래도 카인 님 덕분에 금세 부자가 되겠어요. 매일 오늘만 같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요, 오효효효!”
* * *
끄어어!
온통 불과 용암만이 흐르던 세상.
갑옷처럼 탄탄한 붉은 가죽에 뾰족한 뿔을 지니고 있는 몬스터, 불카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녀석은 원래 9층, 불과 용암의 관에서 히든 피스로 존재했다.
당연히 초심자 구역의 솜씨로는 절대 잡을 수 없어야 했지만.
퍼퍼퍽!
이미 몸 곳곳에 박힌 날카로운 대검은 그의 신경을 다발로 끊어 고통을 선사했고, 파리 떼처럼 돌아다니는 놈들은 그의 광증을 더 도지게 만들었다.
감히, 불의 왕인 나를……!
하지만 그런 불카의 분노 따위, 연우에게는 전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쯧. 역시 아직 종속에는 한계가 있나? 어쩔 수 없지. 에도라, 이목을 집중시켜. 판트, 쳐.”
“예.”
“알았수다!”
연우의 지시에 따라 뒤쪽으로 빠져 있던 판트와 에도라도 앞으로 튀어나갔다.
5층이 될 때까지 연우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기만 하던 그들은 언제부턴가 공략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연우의 플레이를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다가, 스타일을 어느 정도 숙지하게 되자 보조 역할을 도맡은 것이다.
원래 판트 남매의 자존심이라면, 그들이 주도적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보조 역할에 그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연우를 도우면 도울수록 뭔가 깨닫는 게 많아졌다.
원래 두 사람은 여태껏 단순히 스킬 수련에만 집중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연우는 그들에게 그 외의 것을 가르쳐 줬다.
시야.
스킬의 응용 방식이나 전황을 읽는 법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줬다.
이것은 두 남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태껏 세상을 보던 시각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각자 스스로를 냉정한 시각에서 되돌아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실력을 재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빠르게 확인했다.
그리고 거기서 깨달은 바를 토대로 곧바로 스킬에 응용시키니.
파지지직-
실력도 금세 늘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새로운 수련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판트가 뇌기를 잔뜩 끌어올렸다. 굵은 팔뚝 위로 샛노란 뇌전이 튀어 오르면서 전신을 뒤덮더니.
“으랏차차!”
콰아앙! 마치 포탄처럼 지면을 으스러져라 박차면서 불카에게로 달려들었다.
츠팟-
에도라도 신마도를 한 손에 움켜쥐면서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판트와 에도라의 합공(合攻)은 자로 잰 것처럼 완벽했다.
처음에는 판트가 튀어 나가면서 주의를 끌고, 에도라가 뒤에서 불카를 공격했다. 그러다 불카가 에도라에게로 몸을 돌리려 하면 이번에는 판트가 뒤에서 불카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빈틈을 공략했다.
물론 이 둘만 있는 건 아니었다.
바로 이 뒤에는 연우가 나타났으니까.
파바밧!
연우는 벽면을 디디면서 천장까지 올라갔다가, 불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오른손에는 카르슈나의 단검, 왼손에는 마장대검을 역수로 쥔 채로.
퍼어억!
쿠어어엉-
졸지에 정수리 부근이 칼로 꿰뚫린 불카는 끔찍한 고통 때문에 몸을 뒤틀었다.
쿵! 쿵!
그럴 때마다 대지가 들썩였다.
‘역시 두개골이 너무 단단해.’
마력을 잔뜩 실어도 두 단검은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았다. 불카의 맷집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
일기장에서 봤던 내용 그대로다. 연우는 불카에게 붙잡히기 전에 순보를 밟아 멀찍이 녀석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연우가 떨어진 자리를 판트가 다시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콰아앙-
불카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커다란 몸뚱이가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벽에 세게 부딪쳤다.
무지막지한 힘.
정확하게는 불카의 체력을 지속적으로 깎아 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우는 언제부턴가 세 사람의 호흡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맞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아마 이 둘이 없었다면 닷새 만에 돌파하는 게 쉽지 않았겠지.’
공략법을 안다고 해도, 각 시련 곳곳에 흩어진 히든 피스를 빠르게 모으는 건 결코 만만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불카를 상대하는 것도 마찬가지.
녀석은 왜 초심자 구역에 있나 싶을 정도로 너무 강했다. 연우가 전력을 다해도 겨우 잡을 수 있는 수준.
당연히 시간 내 사냥은 힘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판트와 에도라가 도우면서 빈 공백을 빠르게 채울 수 있었으니.
둘은 그의 지시를 너무 잘 따라 주고 있었다.
마치 아프리카에서 함께 손발을 맞추던 사병들처럼.
한 가지를 지시하면 그 속에 담긴 다른 의미까지 금세 알아챘고, 말로 하지 않아도 호흡에 알맞게 섞여 들어왔다.
‘외뿔부족이란 존재들은 다 이런가?’
싸움에 있어서의 천부적인 재능.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쿠웅!
그때, 결국 불카가 계속되는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츠츠츠.
녀석이 붉은색 빛을 띠면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원래 시체를 남기지 않는 녀석인 것이다.
연우는 불카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에 몸뚱이에서 마지막 남은 히든 피스를 꺼냈다.
그리고 하나로 연결시키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헤파이스토스의 열쇠’가 완성 되었습니다.]
……
[위대한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시겠습니까?]
[등록을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아도 당신의 업적은 탑에 깊게 새겨져 원할 시에 언제든 등록 여부를 전환하실 수 있습니다.]
연우는 루비를 깎은 것처럼 아름답게 붉은색 빛깔을 띠는 열쇠, 헤파이스토스의 열쇠를 손에 꽉 쥐었다.
‘이제 남은 건 헤르메스의 열쇠. 단 하나.’
연우는 여태껏 2층에서부터 9층까지, 각 기록을 계속 갱신하면서 신들의 열쇠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1층의 헤라, 2층의 데메테르, 3층의 아레스를 시작해서, 4층의 포세이돈, 5층의 아폴론, 6층의 아르테미스, 7층의 아프로디테, 8층의 아테네, 9층의 헤파이스토스까지.
기존에 갖고 있던 제우스의 열쇠까지 합친다면 벌써 10개를 손에 넣은 것이다.
이제 올림포스의 보고를 열 수 있는 것까지 남은 개수는 단 두 개.
하나는 초심자 구역 내 최고 기록을 세워야만 얻을 수 있는 하데스의 열쇠.
다른 하나는 10층에서 얻을 헤르메스의 열쇠였다.
여행과 전령의 신, 헤르메스.
그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고,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던가?
‘이것도 빨리 처리하자.’
연우는 바닥에 깔린 푸른색 포탈 위에 올라갔다.
[모든 시련이 끝났습니다. 10층으로 올라가시겠습니까?]
[단, 다음 층계는 솔로 스테이지입니다. 파티 플레이가 임시 해체 될 수 있으니, 입장하시기 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연우는 판트와 에도라를 돌아봤다.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뒤처지지는 않겠지?”
“하! 우리보다 늦어져서 쪽팔리지나 마슈.”
판트가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걸렸다.
연우도 가볍게 피식 웃으면서 포탈을 타고 초심자 구역 마지막 층계로 넘어갔다.
[10층, 백색의 관에 입장하셨습니다.]
10층은 여태껏 다양한 환경이었던 다른 층계와 다르게 온통 하얗기만 한 백색 세상이었다.
연우는 고개를 들었다.
다른 층계들처럼, 이곳도 바로 시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