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5화 (75/862)

25화. 돌파 (2)

[10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시련: 이곳은 시간과 공간에서 분리되어 이승과 저승, 하늘과 땅이 교차하는 지점,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생명.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탈출하십시오.]

‘1층 다음으로 플레이어들이 가장 많이 떨어져 나간다는 층계라더니. 확실히 그럴 만하군.’

일기장에서도 10층의 난이도는 1층에서부터 9층까지를 전부 합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었다.

그 전까지 선전하다가도 정신적으로 지친 나머지 나가떨어진다는 곳.

하지만 반대로 9층까지 겨우 전전하다가도 쉽게 통과할 수도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만큼 10층의 시련은 예측불허였다.

이곳에서 보는 것은 단 하나.

‘정신력.’

9층까지 기록을 매번 갈아 치우며 들어가면서 나와 동료들은 한창 분위기가 고무되어 있었다. 10층도 금세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 빌어먹을 탑은 절대 희망을 품지 못하게 만드는 데 너무 탁월했다……

……10층에서는 모든 것을 지워 버린다.

친구도, 가족도, 동료도 없이 혼자서 덩그러니 버려져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단서 하나 없이 고독을 겪고, 탈출에 성공해야만 한다.

물론 쉬울 리가 없었다.

아무리 정신이 단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 홀로 떨어진 곳에서는 미치기 마련이었다.

이 층계의 시련에 대해 안다고 해도, 스스로 깨우치지 않으면 극복하기 힘든 장소이기도 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인 싸움은 육체적인 싸움과 다르다.

고독은 멀쩡한 사람도 피폐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오히려 스스로에게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 사람이 다칠 때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 팀 아르티야는 승승장구를 하다가 10층에서 처음으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여태껏 파티 플레이를 하다가 솔로 플레이로 떨어졌을 때.

자신감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게 된다. 그러다 불안감은 동료들에 대한 그리움과 뒤섞여 사람의 정신을 좀먹어 버렸다.

동생도 바로 여기서 아주 힘들어했다.

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을 일이지만.’

연우는 아프리카를 뛰어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피폐와 고독을 겪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매번 스스로를 의심하고, 불신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스스로에게 차가운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에, 언제나 냉철한 이성을 관철할 수 있었다.

‘10층 어딘가에는 분명 문이 있다.’

하지만 문은 한 개가 아니었다.

‘총 10종류. 붉은색, 푸른색…… 색도 다양하댔지.’

연우는 눈을 감았다.

감각 강화 스킬을 통해 감각 영역을 확장시키면서 이 너머 어딘가에 있을 문들을 찾았다.

마갑에 마력이 실리면서 수십 개의 눈이 번쩍 열렸다.

인지 영역(認知領域)이 계속 확장되었다.

그러다 눈을 뜨고 마장대검을 역수로 쥐었다.

퍼억!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마장대검이 박혔다.

아래로 내리그었다.

공간이 열리면서 붉은색 문이 나타났다.

‘찾았다.’

* * *

10층의 시련은 일종의 미로였다.

문을 찾아 열면 새로운 백색 공간이 나타나고, 거기서 또 문을 찾아 열면 새로운 백색 공간이 나타나는 미로.

당연히 하얗기만 한 세상에서 숨겨진 문을 찾는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어떻게 찾는다고 해도 한 가지 의심에 부딪치고 만다.

문은 서로 다른 색깔과 형태를 가진 총 열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것들을 맞닥뜨렸을 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심을 가지게 된다.

뭐지? 왜 문마다 색깔이 다르지?

설마 내가 나온 문이 틀린 건가?

색깔 하나만 밀고 나가야 하나?

아니면 다른 순서가 있나?

그것도 아니면 다른 트릭이 있는 걸까?

‘이곳은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의심암귀라는 말이 있다.

마음속에서 자란 의심은 끝내 무럭무럭 자라 확신을 먹어 치우고, 정신까지 피폐해지게 만든다는 뜻이었다.

10층의 시련은 이것을 시험했다.

문을 열게 하고, 플레이어의 인내심을 테스트했다.

그리고 판단력과 정신력도 따졌다.

과연 이 속에 숨겨진 트릭을 간파할 수 있는지.

미로를 무사히 탈출할 수 있는지를.

하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의심암귀에 사로잡히다가 끝내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상당수가 자살을 하거나, 포기를 하는 등 정신적 이상을 겪는 경우도 태반이었다.

하지만 이 층의 정답은.

‘그냥 무작정 통과하는 것.’

문의 색깔과 형태에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그냥 문은 문이고, 다음 미로로 안내할 뿐이었다.

그렇게 열고 열면서, 계속 나오다 보면 시련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는 구조였다.

필요한 것은 정신력.

그리고 자신에 대한 굳은 신뢰였다.

설사 자신이 온 길이 잘못되었다고 의심이 들더라도 끝내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굳건한 자신감이 있어야만 시련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안다고 해도, 정작 시련에 임하는 플레이어들은 쉽사리 그러지 못했다.

어느 문은 쉽게 찾아져 미로 통과가 쉬운 반면에, 어느 문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혼자서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미 들었던 충고 따위는 쉽게 잊혀졌다.

무엇보다 숨겨진 문이라는 것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전혀 그런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확장된 인지 영역을 바탕으로 숨겨진 문을 찾아 열고 다음 칸으로 이동하고, 다시 문을 열어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연우는 미로를 찾는 손길이 느려졌다.

아니, 오히려 문을 찾아도 도로 닫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다시 다른 문을 찾았다.

‘이게 아냐.’

‘이것도 아니고.’

‘이 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연우는 절대 자신이 찾은 문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사실 연우가 찾고자 하는 것은 10층의 탈출구가 아니었다.

‘이곳 어딘가에 히든 피스가 숨겨진 장소가 있어.’

사실상 헤르메스의 열쇠를 완성시키는 건 다른 신들의 열쇠를 완성시키는 난이도를 전부 합친 것보다 어려웠다.

수천 년 동안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올림포스의 보고를 열지 못한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미로 곳곳에 히든 피스가 각자 다른 문 너머에 숨겨져 있으며, 위치는 각 회차 때마다 갱신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백색 세상에서 아무런 힌트도 없이 100개나 되는 히든 피스를 찾아라?

사람으로서는 피가 말리는 일이었다.

모든 히든 피스를 모으는 것도 힘든 데다가, 자칫 다른 문이라도 실수로 열게 되면 시련이 끝나고 마니까.

히든 피스를 찾기 위해 시련을 미룬다니.

정말이지 웃긴 일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자신을 믿었다.

확장된 인지 영역과 감각을 믿고, 히든 피스가 갖고 있을 묘한 기운을 믿었다.

무엇보다.

‘찾아라.’

수십 개의 기에스 눈도 가지각색으로 데구루루 굴러가면서 히든 피스를 탐색했다.

그럴 때마다 백색 공간 너머, 문 너머의 공간을 뒤졌다.

이것이 바로 연우가 기에스의 눈을 손에 넣기 위해 지난 한 달 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이유였다.

헤르메스의 열쇠를 손에 넣기 위해서.

헤르메스의 열쇠를 만드는 일은 다른 층계의 열쇠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제우스의 열쇠나 하데스의 열쇠를 구하는 것 뺨칠 정도였으니.

만약 이런 편법이 동원되지 않았더라면 절대 꿈도 못 꾸었겠지.

아니, 어쩌면 헤르메스의 열쇠는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민해진 감각을 통해 미궁을 계속 더듬다 보면, 언젠가 히든 피스는 모두 찾아낼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랬다가는 하데스의 열쇠를 못 얻었겠지.’

연우는 계속해서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럴 때마다 기에스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찰칵, 찰칵-

연우가 기에스의 눈을 부리면서 모았던 ‘헤르메스의 깃털’이 한데 맞물리면서 열쇠가 탄생했다.

‘됐다.’

그리고.

[모든 관문이 끝났습니다. 1층부터 10층까지 초심자 구역을 모두 통과했습니다.]

[위대한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시겠습니까?]

[등록을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아도 당신의 업적은 탑에 깊게 새겨져 원할 시에 언제든 등록 여부를 전환하실 수 있습니다.]

……

[초심자 구역을 전부 통과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151시간 35분 01초입니다. 기존 ‘차정우’의 기록을 83시간 2분 9초 이상 앞당겨 신기록을 갱신했습니다.]

[위대한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시겠습니까?]

연우는 아주 잠깐 명예의 전당에 아로새겨진 ‘차정우’라는 이름을 가만히 응시했다.

‘역시 너는 여기에 있었구나.’

연우는 잠시 갖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등록을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공…….]

[보상으로 ‘하데스의 열쇠’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얼음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해골 문장’을 획득했습니다.]

……

여러 개의 보상이 나타났지만, 연우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하나뿐이었다.

검은 자수정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열쇠.

하데스의 열쇠였다.

동생이 얻기도 했던 히든 피스.

연우는 하데스의 열쇠와 헤르메스의 열쇠를 바닥에 내려놓고, 남은 10개의 열쇠들도 똑같이 옆에다 나열했다.

보석을 세공한 것처럼 서로 다른 빛깔로 반짝대는 총 12개의 열쇠들.

서로가 뿌리는 빛에 다시 반짝이며 아름답게 빛났다.

그 순간.

[올림포스 신들의 12개 열쇠를 모두 모으셨습니다. 신들의 열쇠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메시지가 떠오르면서 열쇠가 만들어졌을 때처럼, 이번에는 신들의 열쇠가 빛에 휩싸여 한데 맞물리면서 새로운 열쇠가 탄생했다.

새로운 열쇠는 기존 열쇠들과는 달랐다.

은을 세공한 것처럼 아주 평범한 모습.

하지만 연우는 열쇠를 따라 은은하게 퍼지는 신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올림포스의 열쇠’가 탄생했습니다. 이로써 당신은 올림포스 신들이 수만 년간 쌓은 재화와 보물의 창고, 올림포스의 보고를 열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올림포스의 보고에서는 원하는 물품을 딱 한 가지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우의 바로 눈앞에 새로운 문이 나타났다.

여태껏 마주쳤던 것과 다른 황금색 문.

올림포스의 보고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연우는 문고리 아래에 있는 열쇠구멍을 찾아 열쇠를 밀었다. 그리고 옆으로 돌렸다.

찰칵!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고.

파스스-

올림포스의 열쇠는 고운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여태껏 이 열쇠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모진 고생을 했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허망하기까지 한 결과.

하지만 연우는 미련을 버리고 주저 없이 황금색 문을 활짝 열었다.

문 너머는 10층의 백색 세계와 또 다른 세계였다.

온통 칠흑 같이 어두운 세계 아래, 높이를 짐작하기도 힘들 만큼 거대한 철문이 놓여 있었다.

마치 신화를 다룬 그림, 〈천지 창조〉처럼 12주신을 비롯한 올림포스의 많은 신들이 거대한 거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모습을 아로새긴 철문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저절로 느껴졌다.

마치 탑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가진 경외라는 감정이 절로 일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사내가 의자에 앉아 흥미 가득한 눈길로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깃털이 달린 모자와 가벼워 보이는 신발, 그리고 뱀 두 마리가 서로 얽힌 지팡이.

‘헤르메스.’

위대한 존재가 연우를 보면서 웃었다.

“너로구나. 관리자들을 놀래게 만들었다던 아이가.”

헤르메스는 유일하게 신들 중에서도 천상과 지옥을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는 존재.

당연히 그에게는 한 가지 과업이 주어져 있었다.

보고의 수문장.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탐내고 있으니. 그들로부터 보고를 지키는 게 임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달리 말하자면 이런 뜻도 되었다.

‘관조자.’

그는 언제나 세상을 돌아보며, 굽어다본다.

당연히 연우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또한, 그 때문일까?

연우는 헤르메스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탑을 보고, 이곳의 문을 보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위압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헤르메스에게서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한낱 물건이 아닌, 진짜 신인데도 불구하고 인지 영역에는 전혀 잡히질 않았다.

철저한 무(無).

아예 이 자리에 없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쪽을 배려해서 그런 것이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할 수 있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런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에게는 절대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이전에도 이곳을 찾는 이가 있었고, 최근에는 더 많이 늘어난 듯하지만, 이렇게까지 놀라움을 함께 주었던 아이는 없었던 것 같건만.”

헤르메스는 연우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감탄을 터뜨렸다.

“너 같은 아이는 정말이지 처음이로구나.”

그만큼 연우가 준 충격이 크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보고(寶庫)를 열고 싶습니다.”

연우는 무덤덤하게 헤르메스의 칭찬을 옆으로 흘렸다.

그의 칭찬을 듣는다고 해서 딱히 얻는 게 없었다.

그저 지금은 조금이라도 빨리 올림포스의 보고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얻을 것도 이미 점찍어 뒀다.

‘제우스의 아스트라페와 아테네의 아이기스.’

아스트라페는 인위적으로 뇌기(電氣)를 일으켜 적을 섬멸한다는 벼락창으로 최강의 유니크라 불렸다.

아이기스는 9개의 방패로 이뤄진 무구로, 대부분의 공격을 막아 내고 중앙에 박힌 고르곤의 머리를 통해 상대를 마비시키거나 석화시킬 수도 있는 최고의 유니크였다.

각각 신을 상징하며 신화 속에서도 몇 번씩 이름을 떨쳤던 에픽 아티팩트들.

또한, 신명(神名)을 품고 있기 때문에 아티팩트를 가진 순간, 자연스레 신의 힘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그 두 가지는 보고 내에서도 손꼽히는 보물이었다.

“푸핫! 마음이 벌써부터 저기로 가 있나 보구나. 알았다. 그렇게 소원이라고 하니 들어줘야겠지.”

짝!

헤르메스는 경쾌하게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그러자.

그그긍-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대지가 들썩이고, 천장이 울렸다.

그리고.

칠흑 같던 어둠으로, 황금색 빛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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