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1화. 올림포스의 보고 (1)
보고 안쪽은 그야말로 수많은 재화와 보물로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들.
보석 하나만 하더라도 건너편이 비칠 정도로 속이 투명했다. 그런데 그 속에 담긴 마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최소 A++랭크 이상은 될 보석들.
아마 저것을 세공해 아티팩트를 만들거나, 마법을 완성한다면 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되겠지.
하나하나가 천금을 줘도 바꿀 수 없을 천상의 보물이었고, 사람의 탐욕을 자꾸 자극했다.
연우가 그쪽으로 발길을 들이려는데.
“아, 참. 그리고.”
헤르메스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연우가 시선을 돌렸다.
“혹시 이것들을 갖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헤르메스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무구들을 가리켰다.
하늘의 뜻을 읽는다는 모자, 페타소스.
날개 달린 신발, 탈라리아.
두 마리 뱀이 얽힌 지팡이, 헤럴드.
전부 신 헤르메스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스스로 얼굴에다 금칠을 하는 격이긴 하다만, 이것들도 제법 좋은 것이라서 말이지. 만약 네가 이 중 하나를 가지겠다고 하면 사도로 인정할 용의도 있다. 어떠냐?”
외부로 알려진다면 모두가 놀랄 일이었다.
지구에서 신은 개념적인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탑에서 신은 물리적인 영향력을 일부 행사할 수 있는 ‘실체’였으니.
당연히 신의 힘은 막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신을 추종하는 종교나 신전도 무수히 많았다.
8대 클랜 중 하나인 ‘마군’이 그런 신을 추종하는 대표적인 종교 집단에 해당했다.
그리고 그런 종교 집단의 정점에 서 있는 자가 바로 사도였다.
사도(Apostle).
그들은 신의 첫 번째 신도이며, 신의 뜻을 행사하는 대행자였다. 또한, 신의 영육을 나눠 받은 화신(化神, Avatar)이기도 했다.
당연히 몇 안 되는 사도라는 존재들은 탑 내에서도 항상 독보적인 활약을 보였다.
여러 추종자들을 거느리면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주(Lord)나,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인간의 한계를 벗어던지고 일인군단이 된다는 초인(超人)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그런 사도가 되라고 제안한다?
특히 헤르메스는 올림포스의 12주신 중 하나.
당연히 신 중에서도 이름값이 높은 편이었다.
그런 신의 사도가 된다는 건, 어마어마한 혜택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뛰어난 권능과 힘을 얻는다는 뜻이었으니까.
게다가 연우를 바라보는 헤르메스의 눈빛은 따스했다.
순수한 호기심.
여행객이자 수행자인 플레이어 들을 가호하는 신이기도 한 그는 연우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싶어 했다.
페타소스, 탈라리아, 헤럴드도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아이기스에 못지않을 만큼 좋은 것들이었다.
사도의 좌와 에픽 아티팩트까지 더해진다면.
‘제우스의 아스트라페를 꺾는 것에도 부족하지 않겠지.’
하지만 연우는 이번에도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연우의 생각은 한결 같았다.
‘어딘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피식.
“그래. 그대에게는 그대가 걸을 길이 있겠지.”
헤르메스는 한낱 인간이 신의 제안을 거절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존심 상해하기보다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대에게는 그대가 걸을 길이 있다?
연우는 순간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헤르메스는 어서 들어가 보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결국 연우는 보고의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순간, 곳곳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날, 데려가 줘.」
「나, 어때? 내가 탐나지 않아?」
「너에게 필요한 건 나일 것 같은데.」
「나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아티팩트 속에 담긴 에고(Ego)가 보내는 사념이었다.
신의 이름을 딴 만큼 자아를 깨닫게 되었으나, 그렇기에 시간의 흐름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제 능력을 썩혀야 한다는 사실에 울분을 토하는 것들.
녀석들의 목소리는 마치 악마처럼 달콤하면서도 처절한 울분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용마안을 활짝 열고 안쪽으로 걸었다.
[감정에 실패했습니다.]
[감정에 실패했습니다.]
……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용마안’의 스킬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용마안’이 강화됩니다. 세상의 더 많은 이면과 진실들을 엿보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졌다. 각 아티팩트들이 품고 있는 사연이나 비밀이 엿보였다.
대부분 ‘감정 불가’라고 떴지만, 이런 것들을 보고 있으니 숙련도도 제법 빠른 속도로 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들어가다, 연우는 몇 번씩이고 문을 열었다.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더 좋은 아티팩트들이 있는 방이 나타났다.
그러다 어느덧 가장 끝 방에 도착했다.
12주신의 무구들이 잠들어 있는 방.
끼익!
가볍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순간 웅혼한 기운이 연우를 감싸다 사라졌다.
벽면을 따라 갑옷이며 무기들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 각 신들이 벌인 활약상들을 재현한 성화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들.
밖에서 봤던 재화들을 전부 한 순간에 삼류 저질 물품으로 만드는 것들이었다.
연우는 감정을 시도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용마안의 숙련도를 대거 상승시킨 덕분인지, 몇 번 실패를 거치고 나자 바로 정보를 읽는 것에 성공했다.
[아폴론의 태양궁]
분류: ???
등급: ???
설명: 음악과 점성의 신, 아폴론이 사용한 활. 태양의 불길을 실어 만악(萬惡)을 불사른다.
[헤파이스토스의 불꽃망치]
분류: ???
등급: ???
설명: 불꽃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사용한 망치. 내려칠 때마다 화염이 치솟으며 이것으로 제작한 아티팩트는 뛰어난 성능을 자랑한다.
[포세이돈의 트라이던트]
분류: ???
등급: ???
설명: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사용한 삼지창. 해일을 일으키는 권능이 담겨 있다.
신의 이름이 담긴 아티팩트라서 그럴까.
분류와 등급은 모두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었고, 설명창의 내용도 조금밖에 엿볼 수 없었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나하나가 전부 절대적인 무구라는 사실을. 모두 눈이 저절로 커질 만큼 대단한 권능을 가진 것들이었다.
특히 야금술을 갓 익히기 시작한 연우로서는 불꽃망치에 살짝 관심이 갔다.
하지만 다음 물건을 보고는 주었던 관심을 바로 지웠다.
[아테네의 아이기스]
분류: ???
등급: ???
설명: 9개의 꽃잎 방패로 이뤄진 절대 방어구. 대부분의 공격에서 사용자를 보호해 주며, 중앙에 박힌 고르곤의 머리로 상대를 마비 및 석화(石化)시킨다.
‘찾았다.’
연우는 아이기스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우웅, 웅-
아이기스가 반갑다는 듯이 잘게 떨렸다.
방패라는 이름과 다르게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얇은 판막 형태로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판막이 총 9겹으로 이뤄져 있으며 중앙에 독특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게 시선이 마주친 사람을 석화시킨다는 고르곤의 머리인 모양이었다.
[아이기스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을 보상으로 얻으시겠습니까?]
작게 떠오르는 메시지.
연우는 예정대로 승낙을 할까 싶다가 잠깐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제우스의 무구는 어디에 있는 거지?’
주신들의 방인데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우스의 무구들만 없었다.
‘랭커들 중에 올림포스 12주신의 무구를 가진 놈들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우스의 무기를 가졌다는 녀석은 없었어.’
사실 연우는 내심 아이기스보다는 아스트라페를 더 선호했다.
빠른 기동력과 민첩성을 주로 해서 히트 앤 런의 전략을 구사하는 그에게 있어 들기도 버거울 것 같은 9겹의 방패보다는, 벼락을 일으켜 단번에 적을 격살할 수 있는 아스트라페가 훨씬 편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스트라페도 크기에 따라서 들고 다니기 버겁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 확인해 보고 결정을 짓고 싶었다.
바로 그 순간.
웅, 우웅-
연우는 안쪽 주머니가 잘게 떨리는 걸 느끼고 회중시계를 꺼냈다.
팽그르르, 시침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다 탁 하고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11시 방향.
무구실 내 가장 깊숙한 곳.
연우는 살짝 눈을 크게 뜨다가 곧 시침이 가리키는 대로 벽 쪽에 다가갔다.
거기에는 성화가 그려져 있었다.
제우스로 보이는 신이 황금색 벼락을 온몸에 두른 채 저 높이 까만 먹구름 속에 가려진 어떤 존재에게로 위엄 있게 창을 던지는 모습.
얼마나 역동적이던지 금방이라도 성화 속 사람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화에 미세하게 난 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문이란 뜻이었다.
‘여기다.’
연우는 성화를 힘껏 밀었다.
그그긍-
보고의 철문이 열렸을 때처럼 석문도 잘게 울리면서 옆으로 열렸다.
안쪽은 10여 평 남짓할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바닥, 좌우 벽면, 천장까지 위대한 제우스의 신화를 다룬 성화로 가득했다.
또한, 다른 주신들의 아티팩트보다 더 위엄 가득한 무구들로 가득했다.
연우는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제우스의 방!’
연우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방을 가로질러 중앙에 놓인 재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좌우에 놓인 청동화로에서 노란 불꽃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가운데에는 가만히 의자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제우스 석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무릎 위.
족히 3미터는 될 법한 길이에 마치 황금을 부어 만든 것처럼 온통 샛노란 창이 있었다.
표면을 따라 파직, 파지직, 하고 뇌기가 튀어 오르면서 장엄한 광경을 연출했다.
이게 무엇인지는 감정할 필요도 없었다.
‘아스트라페.’
신화 속에서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와 티탄 신족들을 정벌할 때에 뿌렸다던 벼락이 여기에 있었다.
‘이거다. 다른 건 필요 없어.’
본능적인 감각이 말했다.
반드시 이것이어야만 한다고.
아이기스? 탈라리아? 불꽃망치?
다 필요 없었다.
저 밖에 있는 12주신의 무구들을 전부 갖다 놓는다고 한들, 올림포스의 모든 재화들을 통째로 준다고 한들 여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만큼 아스트라페는 대단했다.
그리고 이렇게 위대한 아티팩트인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탑에 등장하지 않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꽁꽁 숨겨진 곳에 있었으니 어떻게 찾을까.
연우도 회중시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절대 찾지 못했을 것을.
‘그런데 이 시계는 어떻게 제우스의 방을 찾아낸 거지?’
연우는 회중시계를 보면서 묘한 생각에 잠겼다.
애초 동생이 일기장을 비롯한 여러 기능을 담아 놨고, 그것을 파악하면서 시계도 고칠 생각으로 야금술을 익히긴 했지만.
연우는 여전히 회중시계에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거뒀다.
회중시계의 비밀은 용마안의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풀릴 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회중시계가 가져다 준 행운을 가지는 게 더 중요했다.
‘가진다.’
연우는 아스트라페로 오른손을 뻗었다.
그때.
지이이잉-
손가락 끝이 아스트라페에 닿자마자 오른쪽 손목에 차고 있던 검은 팔찌가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더니.
파스스-
아스트라페가 잘게 부서졌다.
올림포스의 보고 문을 열었을 때 사라진 제우스의 열쇠처럼.
고운 입자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
연우는 안색이 굳어 버렸다.
‘아스트라페가 부서졌다고?’
제우스의 무구가?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
촤촤촤!
흩날렸던 아스트라페의 노란 입자들이 돌개바람을 그리면서 검은 팔찌 쪽으로 모였다.
화아아-
검은 팔찌는 다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빛났다. 마치 세상 전부를 어둠 속에 담을 것처럼.
그리고.
촤르륵! 촤륵!
철컹- 철컹-
흩어졌던 아스트라페의 입자들이 한데 모이면서 검은 팔찌에 연결되고, 기다랗게 이어지면서 마치 똬리를 튼 뱀처럼 팔뚝을 따라 올라갔다.
그것은 시커먼 검은 쇠사슬의 형태를 띠면서 손목에서부터 어깨까지, 연우의 오른팔 전체를 휘감았다.
쩌어어어엉-
그리고 또 한 번 공명하면서 맑은 종소리를 냈다.
검은 쇠사슬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변한 아스트라페는 검은 팔찌와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 순간.
연우는 헤르메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대에게는 그대가 걸을 길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