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올림포스의 보고 (2)
연우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아스트라페가 부서지다니!
아스트라페는 올림포스의 수많은 보물들 중에서도 단연 최강으로 손꼽히던 무기였다.
드디어 그걸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줄이야.
게다가 검은 팔찌에 연결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이게 대체 뭐기에?’
아카샤의 뱀을 잡고 나서 얻었던 아티팩트. 망령 귀속과 흑의 칼날은 연우도 자주 애용하는 옵션일 만큼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이게 비그리드처럼 굉장히 특별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따로 받지 못했었는데…….
연우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일단은 전후 사정을 파악해야만 했다.
‘감정.’
용마안을 활짝 열었다.
[칠흑왕의 절망]
분류: 손목 방어구
등급: ???
설명: 과거 ???들은 위대하며 지고한 존재인 칠흑왕을 당해 낼 재간이 없어 늘 두려움에 잠겨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그를 배신하고 어둠 속에 유폐시켰다.
칠흑왕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배신감에 치를 떨며 격노를 터뜨렸다. 덕분에 그를 구속하던 3개의 형틀은 변질되어 그의 수족이 되었다.
형틀 속에 담긴 원한은 음험하기 때문에 호시탐탐 소유자를 시험하려 들 것이다.
힘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주의하자.
* 망자 수집가
소유자가 죽인 대상자의 영혼을 거둘 수 있다. 이때, 영혼은 망령으로 타락해 생전의 힘을 모두 잃고, 짙은 원한만 남는다.
수집된 망령들은 컬렉션에 속박 되어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소유자의 숙련도에 따라 컬렉션의 크기도 대폭 늘어날 수 있다.
* 사귀 사역
컬렉션에 포함된 망령은 언제나 자신을 죽인 소유자를 원망한다. 하지만 그런 원망마저 모두 꺾일 시, 소유자는 일정 분의 마력을 소비해 망령을 사귀(邪鬼)로 진화시킬 수 있다.
사귀는 소유자의 충실한 충복이 되어 어떤 명령이든지 기쁘게 수행할 것이다.
* 흑기(黑氣)
흑의 칼날이 강화된 형태. 귀속 된 망령을 소모해 마력을 암흑 속성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소모 된 망령의 수만큼 속성력도 강화 된다.
소유자는 변환된 마력이 소진될 때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 ???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봉인)
* ???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봉인)
**이 아티팩트는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주인에게 완전히 귀속됩니다. 타인으로의 거래나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기능 중 일부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일정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춰야만 해제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일부 열람할 수 없습니다. 일정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춰야만 권한을 얻을 수 있습니다.
‘칠흑왕?’
연우는 난생 처음 보는 이름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뒤에 ‘왕’이라는 호칭이 붙은 걸 보면 군주인 게 분명할 텐데.
게다가 신의 무구인 아스트라페를 부숴서 재료로 삼는 아티팩트를 남길 정도라면, 신의 반열에 다다른 초월자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연우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무지 칠흑왕이 누군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동생의 일기장을 빠르게 훑어도 마찬가지.
칠흑왕이라는 단어는 전혀 언급 되는 바가 없었다.
원 소유자가 누군지 알 수 있으면 아티팩트를 다룰 수 있는 방법도 무궁무진해질 텐데.
아스트라페를 잃은 이상, 검은 팔찌라도 어떻게든 제대로 다뤄야 하는 연우의 입장으로서는 갑갑해질 노릇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단서라면 설명창에 적혀 있는 의미심장한 글귀 한 줄이 있긴 있었다.
‘유폐?’
검은 팔찌의 설명창에는 분명히 이런 대목이 있었다.
아카샤의 뱀이 돌아오지 않은 주인을 그리워한다는 말. 그래서 주인이 남긴 유품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했었다.
아카샤 뱀의 주인이 칠흑왕이고, 그런 그가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가 수하들의 배신 때문이었다면.
‘아카샤의 뱀을 수족으로 삼을 만큼 뛰어난 존재라.’
이렇게 된 이상, 연우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잃어버린 물건을 두고 전전긍긍해 봤자 나아질 건 없었다. 차라리 지금 얻은 것을 어떻게든 잘 효율적으로 다루는 게 더 이득이었다.
‘정보가 가려진 저 부분을 알 수 있으면 정체를 유추하기 더 좋을 텐데.’
연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아이기스를 선택해야 했을까?’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아니, 아이기스를 선택했어도 똑같은 꼴이 되었을지 모르지.’
곧 고개를 저었다.
검은 팔찌가 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단순히 아스트라페가 원래 분리해 나갔던 부품이었는지, 아니면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 에픽 아이템을 먹잇감으로 삼았는지는.
만약 이유가 후자였다면, 무엇을 선택했던지 간에 이 꼴이 났을 거란 뜻이었으니까.
‘일단은 여기서 나가는 대로 칠흑왕이라는 존재가 누군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연우는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는 이미 잃어버린 물건에 대해 미련을 가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것.
차라리 그런 걸 안타까워할 시간에 당장 주어진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야 더 잘 다룰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설명창을 새롭게 확인했다.
내용이 확 바뀌어 있었다.
‘기존 두 옵션은 이름이 바뀌면서 기능도 훨씬 더 많이 추가되었어. 그리고 활성화된 조건도 있고.’
망자 수집가는 망령 귀속이, 흑기는 흑의 칼날이 강화된 형태였다.
내용도 더 다양해졌다.
망자 수집가의 경우, ‘컬렉션’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면서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망령의 숫자가 대폭 늘어났다. 크기도 숙련도에 따라서 계속 늘어난다고 했으니 수용 가능한 양도 자꾸 불어나겠지.
‘귀속시킬 수 있는 망령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에게는 훨씬 유리해. 어떻게든 쓸 곳은 많으니까.’
이미 연우는 튜토리얼에서부터 10층을 통과할 때까지, 망령을 이용한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그런데 이 참에 범위가 대폭 늘어난다고 한다.
나쁠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런 뜻에서 연우는 흑의 칼날이 강화된 흑기도 마음에 들었다.
여태껏 흑의 칼날은 무기에만 실어서 공격 일변도로만 사용이 가능했을 뿐, 다양한 범위에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흑기는 그런 범위 제약을 없앴다.
무기에 싣는 것뿐만 아니라, 마력을 몸에 둘러 방어 용도로도 쓸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신체 강화 용도로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가된 사귀 사역.
사귀는 이미 연우도 접해 본 적이 있었다.
튜토리얼에서 아랑단의 본거지를 습격했을 때. 희생된 유령들이 자신이 준 마력을 양분 삼아 강화되지 않았던가.
자신이 누군지 잊고 막연하게 음기만 쏟아 대는 망령과 다르게, 사귀는 스스로 의지를 갖고 행동할 수 있었다.
물리적인 행사도 어느 정도 가능하기 때문에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귀는 생전의 기억 중 일부를 가지고 있으니까. 생전에 뛰어났던 망령만 가질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큰 전력이 될 수 있어.’
연우는 이 부분을 잘만 이용한다면 앞으로 탑을 오르는데 있어 아주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만한 실력자의 망령을 얻기가 쉽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게 모든 보상 확인이 끝났다.
[아스트라페를 보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올림포스 보고의 문이 닫힙니다.]
철컹, 철컹-
연우를 둘러싼 공간을 따라 새카만 암전이 내려앉더니 마치 경첩이 닫히듯이 공간이 안쪽으로 서서히 좁아졌다. 그리고 연우까지 같이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연우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정갈한 턱시도를 입고, 한쪽 눈에 외눈 안경을 쓴 고블린.
튜토리얼의 관리자이자, 초심자 구역의 총관리자 이블케가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오효효효! 축하드립니다. 아무리 초심자 구역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압도적인 성적으로 통관을 하실 줄이야. 튜토리얼 때도 대단하시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군요. 저희 모두가 감탄을 했습니다. 이렇게 오시게 된 것, 다시 축하드립니다.”
정성스러운 이블케의 태도.
그는 정말 연우의 성적에 칭찬과 감탄을 같이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헤르메스라는 위대한 존재를 만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스트라 페가 사라지는 걸 눈앞에서 봤기 때문일까.
아주 조금이라도 고양심이나 자긍심이 들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문득 ‘원래 그렇게 되는 게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왔을 뿐이라는 느낌.
이렇게 생각하는 걸 남들이 알면 아마도 오만하다고 손가락질을 하겠지.
하지만 연우는 정말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전장을 전전하면서, 기쁨이라는 감정이 심하게 마모된 건지도 몰랐다.
게다가.
연우는 이블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아스트라페가 사라진 이유가 뭐지?”
“오효효. 영업 비밀이랍니다.”
“그럼 칠흑왕이란 사람은 누구고?”
“역시나 영업 비밀이랍니다.”
“내게 이 팔찌가 주어진 이유는?”
“탑은 플레이어의 업적에 맞춰서 보상을 내어 드릴 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지요.”
이블케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이 무언가를 단단히 숨기고 있는 능구렁이처럼 비쳐졌다.
“저흰 어디까지나 탑이 결정하고 내린 의지를 집행하는 대변자들일 뿐. 이것은 전부 도전자께서 이룬 업을 바탕으로 이뤄진 결과이며, 탑이 내린 보상입니다. 전부 도전자께서 개척하시고, 개척하실 길이니 저희에게 따지셔도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건 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외눈 안경 너머로, 이지적인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희 관리자들이 도전자님을 주시하는 것은 사실이나, 도전자님은 어디까지나 저희가 관리하는 수천만, 수억에 달하는 플레이어 중 한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만은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지.”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관리자 입장에서 자신은 당장 치워져도 별 감흥이 가지 않을 존재에 불과할 테니까.
다만, 그가 한 이야기 중 개척할 길이라는 말이 자꾸 걸렸다.
‘그대에게는 그대가 걸을 길이 있겠지.’
사도의 좌를 거부했을 때, 헤르메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내가 걸을 길이라니.’
연우는 눈살을 좁혔다.
신은 만물을 관장하고, 만물을 관조하는 존재.
절대적 존재인 만큼 허언을 하지 않는다.
아마 헤르메스도 연우를 둘러싼 어떤 것을 엿보고 나서 말해 준 것이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갈 길이, 칠흑왕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뜻일까.
연우는 머리를 털었다.
더 이상 깊게 고민해 봤자 나오는 대답은 없었다.
헤르메스의 말마따나 이것이 그가 걸을 길이라면.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가는 무언가에 부딪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 일에 집중하면 되겠지.
“생각을 정리하신 모양이시군요. 그럼 이제 다음 보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블케가 쾌활하게 웃으면서 크게 박수를 쳤다.
짜악!
[누계 공적치: 1,420,119Point]
“정말이지, 이번에도 이렇게 터무니없는 공적치시라니. 대단하십니다. 이 외에도 각 층계 간 보상 아티팩트 9점과 신기록 달성 보상, 모든 초심자 구역까지의 누계 공적에 해당하는 보상까지. 총 12개의 보상을 받으실 수 있으십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연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보상 전부에 쌓은 공적치를 합쳐서 하나로 받고 싶은데.”
이블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사하게 웃었다.
“따로 받고 싶은 것이 있으신가요?”
“아스트라페.”
“이미 끝났다는 걸 아시면서도 짓궂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농담이 아닌데.”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지만, 이블케는 못 들은 척을 하고 말했다.
“따로 찾는 게 없으시다면 저희가 산정해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40만점에 달하던 공적치가 한 순간에 ‘0’으로 줄어들고, 이블케를 따라 감돌던 12개의 빛무리도 같이 합쳐져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블케가 손바닥을 활짝 펼치는 순간.
“이건?”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블케의 손바닥 위에 떠오른 아티팩트는 그에게도 낯이 익은 보구였다.
9겹의 꽃잎 모양으로 이뤄진 방패.
아이기스였다.
“이미 도전자님의 공적은 여태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주어져도 결코 이상하지 않지요.”
연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쌓은 업적이 탑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
최고 공적치를 한데 모아 한꺼번에 받을 때에 어떤 보상을 받을까 하고 의문을 던진 적은 있지만 결과가 이렇게 돌아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받으시겠습니까?”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 ‘아테나의 아이기스’를 획득했습니다.]
아이기스가 연우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연우는 연분홍빛이 감돌면서도 바깥쪽이 살짝 투명한 아이기스를 매만졌다.
9겹이나 되어 무거울 줄 알았는데, 상당히 가벼웠다. 마치 깃털처럼.
“그럼 저는 모든 보상도 끝났으니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를 올리는 이블케의 머리 위로 창이 떠올랐다.
[모든 시련이 끝났습니다. 11층으로 올라가시겠습니까?]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밑으로 푸른 포탈이 열렸다. 연우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빛무리가 공간을 환하게 밝혔다.
* * *
연우가 초심자 구역의 마지막 구간을 벗어난 순간.
탑의 모든 층계를 따라 거대한 창이 내려앉았다.
하나의 층계에 기록된 공적이 갱신될 때마다 모든 층계에 전달되는 공지 사항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정체를 비공개로 설정한 어떤 플레이어가 초심자 구역 내 모든 층계의 기록을 갱신하고,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는 내용.
그리고 그 플레이어가 튜토리얼을 압도적인 점수로 갱신했던 독식자라는 사실이 전해졌을 때, 플레이어들의 이목은 더욱 집중되었다.
그중에는 새로운 강자의 출현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지우고자 애썼으나,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던 이름, 아르티야. 하위 층계에 영원히 전설로 남을 줄만 알았던 그 이름이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사람들의 뇌리에 ‘독식자’라는 별칭이 깊게 아로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