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환수 (1)
“오효효효. 결국 칠흑왕의 절망을 깨울 뿐만 아니라, 아이기스까지. 참 재미난 플레이어에요.”
이블케는 포탈을 타고 사라지는 연우를 보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튜토리얼에서부터 초심자 구간까지, 모든 걸 홀로 돌파하다시피 하는 연우의 기행은 언제나 그를 즐겁게 했다.
내기로 벌어들인 수익도 꽤 쏠쏠했고.
“탑의 시스템도 그만큼 차연우 님을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일 테지만요.”
그렇게 이블케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 문득 11층에서부터의 관리자들이 누군지를 되짚어 보았다.
“이후부터는 총관리자가 라플라스일 텐데.”
이블케가 씩 웃었다. 두꺼운 입술을 따라 송곳니가 삐죽 나왔다.
“이 친구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긴 하군요. 꽤 호기심이 많은 친구라 짓궂은 짓을 할 때가 많긴 한데 말이지요.”
그의 시선은 점점 사그라지는 포탈에 고정되어 있었다.
* * *
“독식자?”
바할은 플레임 비스트를 이끌고 이동을 하다 말고, 단장이 불쑥 꺼낸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예. 1층부터 10층까지, 모든 초심자 구역의 기록들이 전부 갱신되었다더군요.”
바할은 재빨리 손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러자 눈앞으로 창이 하나 불쑥 떠올랐다.
[1층 랭킹]
1위 비공개 (9,345Point)
공동 2위 차정우, 에도라 (6,566Point)
4위 판트 (2,210Point)
……
[2층 랭킹]
1위 비공개 (31,008Point)
2위 판트 (7,299Point)
3위 차정우 (6,900Point)
……
[3층 랭킹]
1위 비공개 (18,115Point)
2위 차정우(11,331Point)
……
“오?”
바할은 비공개로 설정된 사람이 연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현재 두각을 드러낸 사람들 중에 이만큼이나 활약을 보일 사람은 그밖에 없었으니까.
“재미난 친구로군.”
바할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느끼긴 했다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난놈이었다.
그동안 초심자 구간에 새겨졌던 차정우의 기록은 팀 아르티야의 보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들.
하지만 지금 연우가 기록한 건 전혀 달랐다.
녀석이 혼자서, 자신만의 힘으로 이룬 것이니까.
앞으로 연우에 대한 이목이 더더욱 집중될 수밖에 없을 터. 미리 침을 발라 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지 않으십니까?”
그때 단장이 물끄러미 그를 보면서 물었다.
바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뭐가 말인가?”
“기록 말입니다. 그 기록은 바할 님의 기록이기도 하니까요.”
바할은 무슨 말뜻인지 알아채고 피식 웃고 말았다.
차정우의 기록은 곧 아르티야의 기록. 바할이 걸었던 길이기도 했다.
“사상 검증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개인적인 궁금증일 뿐입니다.”
바할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우리 여왕 폐하께서 아끼는 손가락이 사적인 질문을 던진다고? 믿을 걸 믿으라고 하게. 차라리 개가 야옹 하고 운다는 말을 믿겠어.”
단장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할은 기록창을 종료시키고,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뭐, 아예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어쨌든 아르티야 역시 내가 걸었던 흔적이었으니까. 그 흔적이 사라진다는데 누가 좋아할까.”
“…….”
순간, 단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지만, 곧 이어지는 바할의 말에 눈빛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옛날 일은 옛날 일일 뿐이야. 과거는 흘려보내야지. 거기에 얽매일 이유는 전혀 없어.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단 하나뿐이야.”
바할이 활짝 웃으면서 말꼬리를 달았다.
“이 루키를 어떻게 하면 우리의 손에 넣을 수 있냐는 것.”
“…….”
“언젠가 우리 손에 들어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길어져서는 안 되겠지?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부술 생각도 해야 할 테고.”
바할은 뒷말은 마저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장은 바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옛 아르티야처럼.’
아르티야는 원래 여러 클랜들에 있어 애증의 대상이었다.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었지만, 굴러들어 오지 않았던 이레귤러.
그러다 내친 김에 탑까지 집어삼키려고 했던 곳이었다.
8대 클랜은 이제 다시는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아 했다. 아르티야 같은 놈들은 아르티야 하나로 족했다.
싹이 보이면 애초 짓밟거나, 아니면 가지거나.
반드시 둘 중에 하나여야 했다.
“……이 정도면, 대답은 됐겠지?”
바할이 씩 웃으면서 단장을 돌아봤다.
단장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통과점은 넘었나 봐.”
“하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셨습니다. 다음부터 주의해 주십시오.”
“하하! 그 정도는 봐줄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우리 여왕 폐하께서는 날 의심하시나 본데. 그나저나.”
바할은 갑자기 달리다 말고 걸음을 뚝 멈췄다. 뒤따라오던 플레임 비스트도 일제히 정지했다.
그들이 멈춘 곳은 어느 낭떠러지의 끄트머리였다.
“여기였지?”
“좌표로는 그렇습니다.”
“청화도의 개구멍이라. 그렇게 품위를 찾아 대더니. 결국 사람 사는 건 똑같은 것 같아? 하하!”
바할은 낭떠러지 끝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아래로 나무가 잔뜩 우거진 숲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절벽이 얼마나 높은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질 정도였다.
탑 외 지역의 가장 외곽에 위치한 곳이라 인적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할은 마력을 한껏 눈가에 실어 한쪽을 주시했다.
그러자 시력이 강화되면서 숲지대 한쪽 구석이 선명하게 망막에 잡혔다.
교묘하게 위장한 나무 틈 사이로,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중앙에 마련된 제단에는 푸른색 포탈이 열려 있었다.
“아랑단으로 연결되는 포탈이라.”
바할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뭘 숨기려고 이런 외진 곳에 포탈을 열어 둔 건지. 리언트, 너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정말이지 하나도 없구나.”
바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단장을 돌아봤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준비하자.”
“예.”
단장은 높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플레임 비스트는 절벽 곳곳으로 흩어져 자세를 바짝 낮췄다.
리언트가 나타날 타이밍을 노려서 습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리언트의 복귀까지는 몇 시간이 남지 않았다.
그리고 두 시간 가량이 지났을 때쯤.
잔잔하게 일렁이던 포탈이 갑자기 크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공간 이동이 개시된다는 뜻이었다.
플레임 비스트는 일제히 품속에 있던 무기를 꺼냈다. 팔뚝만 한 길이만큼 자른 대나무 통이었다.
통 안쪽에는 쇠 화살 수십 개와 마법 화약이 내장되어 있어, 격발 장치를 잡아당기면 즉시 일대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일회용 아티팩트였다.
그리고 곧 포탈에서 게이트가 활짝 열리면서 플레이어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하나같이 청화도의 복장을 입고 있는 자들. 그 속에 리언트도 섞여 있었다.
플레임 비스트는 일제히 낭떠러지 아래쪽으로 격발 장치를 잡아 당겼다.
콰콰쾅-
마치 천등 수십 개가 한 번에 치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렸다.
폭발은 포탈을 비롯한 숲 지대를 깡그리 밀었다.
경계를 서고 있던 플레이어들이며 갓 포탈을 빠져나오던 자들까지, 그들 대다수가 이렇다 할 반응도 하지 못하고 쓸려 나갔다.
어떻게 살아남은 자들마저도 하늘에서부터 소낙비처럼 무더기로 쏟아지는 쇠 화살 세례에 누더기가 되고 말았다.
리언트는 폭발과 굉음, 빛이 산란하는 세상 속에서 겨우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위 랭커라 할 만한 뛰어난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리언트는 상처를 잔뜩 입은 맹수가 되어 크게 포효했다. 전신은 시커먼 그을음과 붉은 핏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가뜩이나 오랫동안 공을 들여 세웠던 아랑단이 무너지고, ‘돌’마저 사라져 짜증이 극에 달한 지금.
빌드와 함께 자신을 지탱하던 수하 네 명까지 어이없게 유명을 달리해 버리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 리언트는 매연과 불기둥 사이로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한때, 같은 팀에 있으면서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지금은 원수만도 못한 사이가 되어 버린 놈!
“바할-!”
“리언트, 오랜만에 보는구나.”
바할은 상당한 거리가 있어도 리언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반갑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면서 힘차게 땅을 박찼다.
콰앙-
바할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리언트에게로 떨어졌다. 플레임 비스트는 절벽을 타고 내려가면서 여전히 숨이 붙어 있는 플레이어들을 척살하기 위해 움직였다.
리언트는 아예 두 눈이 헤까닥 뒤집힌 채로 허공에 솟구쳐 바할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어마어마한 두 개의 기류가 나선 모양으로 빙글빙글 꼬이면서 꼬리처럼 따라오다가, 곧 폭풍이 되어 앞으로 쏟아졌다.
리언트의 별칭은 스톰 브링거.
폭풍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이었다.
쿠쿠쿵!
태풍과 불벼락이 하늘 한가운데서 부딪쳤다. 공간이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열풍이 대지에 작렬해 모래 기둥이 높이 솟구쳤다.
마치 신화 속에서나 그려질 것 같은 초인들의 충돌.
바할과 리언트, 두 사람은 이미 재앙을 몰고 다니는 자들이었다.
플레임 비스트도 두 사람의 충돌 여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야만 했다. 미처 피하지 못했던 리언트의 수하들은 이제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감히! 감히 나를 건드려? 이게 무슨 짓인지 알고나 저지르는 것이냐!”
리언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상처를 잔뜩 입은 맹수는 다른 어느 때보다 날이 서 있었다.
“알고말고.”
하지만 바할은 가볍게 웃었다. 어차피 리언트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란 건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제 딴에는 책략을 짠답시고 머리를 굴리지만, 실속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엉성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니까.
“전쟁을 치른다는 뜻이잖아?”
리언트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전, 바할이 내뱉은 말에 담긴 뜻은 절대 가벼운 게 아니었으니까.
선전 포고.
레드 드래곤이 청화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청화도를 다스린다는 다섯 무신 중 한 사람의 머리라면…… 간만에 벌어질 이벤트의 시작치고는 그럴싸하지 않겠어?”
“……!”
“그래도 한때 친구였는데.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기는 뭣해서 말이지. 그래서 내가 대신 나선 거야.”
바할은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아래로 세게 내리쳤다.
스킬 〈불벼락〉. 바할이 자랑하는 시그니처 스킬이 가동되면서 하늘에서부터 붉은 불꽃이 신이 휘두른 망치처럼 내려쳐지면서 폭풍을 발기발기 찢었다.
리언트는 그 순간 깨달았다. 바할은 자신이 알던 것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라는 것을.
“그러니 줬으면 한다.”
“무엇을 말이냐!”
“네가 갖고 있다는 마력 기관. 그것만 준다면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 주지.”
설마 ‘돌’의 행방을 물을지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리언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걸 거절로 받아들인 바할은 가볍게 혀를 찼다.
“하여간, 그깟 자존심은. 안되겠군. 일단 자네부터 제압하고 나서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어.”
계속 위기로 내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력 기관을 내놓겠지.
바할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리언트에게로 다시 와락 달려들었다. 하늘에서부터 수십 개의 불벼락이 잇달아 내려와 아래로 작렬했다.
콰콰쾅-
어차피 이곳에서 리언트가 도망칠 곳 따위는 없었다.
퇴로는 플레임 비스트들이 모두 차단했고, 주변은 온통 불바다가 되어 틈이라곤 없었으니까.
바할의 별칭은 화권.
불바다라는 지형 위에서 그를 당해 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설사 그가 모시는 레드 드래곤의 수장, 여름여왕이라 할지라도!
콰아아앙-
수십 개의 불벼락이 응축된 불꽃이 리언트를 후려쳤다. 폭풍이 갈기갈기 찢기면서 일대를 몇 번이고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 * *
[이곳은 11층, 꿈 속 세계의 관입니다.]
연우는 이제는 익숙하게 여겨지는 알림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탁 트인 평원 위로 갖가지 언덕이 야트막하게 여러 개 올라와 있는 세계.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꽃과 잎사귀가 파르르 떨렸다. 햇살도 따사로워서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저절로 편안해졌다.
여태껏 경험했던 삭막한 층계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올라오지 못했나?’
아무래도 판트와 에도라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연우도 기에스의 눈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쉽게 10층을 통과하지 못했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기다려야겠군.’
연우는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10개나 되는 층계를 단번에 통과한다고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으니까.
게다가 검은 팔찌도 크게 바뀌었고, 뜻하지 않게 아이기스도 얻었다. 둘 다 쓰임새를 제대로 확인해야만 했다.
‘능력치나 스킬도 여러 모로 많이 달라졌고.’
개인적으로 여러 점검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였다.
우웅-
하늘을 따라 푸른색 포탈이 크게 맺히더니 누군가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토끼 얼굴에 늘씬한 턱시도 차림을 한 관리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흰 토끼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앞으로 11층의 안내를 맡게 된 관리자, 라플라스라고 합니다.”
연우를 바라보는 라플라스의 붉은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