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환수 (2)
라플라스는 최근에 이블케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연우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 사람 때문에 시끄러운 건 탑뿐만이 아니었다. 관리자 커뮤니티도 간만에 잔뜩 들뜬 상태였다.
팀 아르티야 이후 최고의 루키.
당연히 탑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블케가 연우를 두고 밑에 있는 관리자들과 내기를 해서 승승장구를 했다는 소식은 소소하게 퍼져 있었다.
그래서 관리자들은 연우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관장하는 층계에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가 이번에는 또 어떤 일들을 해낼지,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을 테니.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온 그들에게 이런 소소한 재미는 절대 놓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라플라스가 나선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원래 11층의 관리자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라플라스는 루키를 특별 관리하겠다는 되도 않는 명분을 들먹여 직권으로 11층 관리자를 찍어 누르고 나타난 거였다.
관리자들의 최고 우두머리를 자처한다는 12지신 중 ‘묘(卯)’에 해당하는 자.
그게 바로 라플라스였으니까.
라플라스는 지금쯤 잔뜩 우울해져 있을 11층 관리자에게 따로 맛있는 당근이나 사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도전자님께서는 11층에서부터 규칙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고 계시는지요?”
연우는 라플라스의 말을 들으면서 얼핏 일기장의 내용을 떠올렸다.
11층에서부터는 초심자 구간 때와는 난이도가 확연하게 달라지는 편이었다.
여태껏 주어지던 대기실이 폐쇄되고, 대신에 반드시 각 층계에서만 머물면서 장기적으로 주어지는 시련을 수행해 내야만 했다.
“더 이상 대기실이 주어지지 않고, 장기 미션이 주어진다는 것 정도만.”
“그렇다면 거의 대부분 알고 계시다고 봐야 할 테니, 이야기하기가 훨씬 순조롭겠군요.”
라플라스는 잘되었다는 듯이 빙긋 웃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여태껏 7개의 구획으로 이뤄진 튜토리얼이 플레이어의 자격을 ‘시험’하고, 10개의 층계로 구성된 초심자 구간이 플레이어의 실력을 점검한다면,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후부터는 진짜 ‘시련’을 겪어야만 한답니다.”
진짜 시련.
연우는 이 단어에 집중했다.
“플레이어란, 신이 되고자 도전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의 범주를 탈피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만큼 위험천만한 시련을 경험해야 하고, 그것을 능가하는 업적을 써 내려가야만 가능하고요.”
연우는 말을 자유롭게 하는 토끼 머리가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그러니 진짜 시련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11층에서부터는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이전과는 전혀 궤를 달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플라스의 설명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초심자 구간의 시련은 실패를 하더라도 몇 번의 재도전 끝에 극복해 낼 수 있었다.
대기실이 따로 존재해 부상을 입더라도 대기실로 이동, 상처와 피로를 회복하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기실이 폐쇄되는 11층에서부터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졌다.
시련에 실패를 하더라도, 층계에 계속 체류를 해야만 했다.
부상을 입더라도 층계 내에서 알아서 치료법을 찾아야 하고,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층계 내에서 해결법을 터득해야 했다.
시련을 극복할 때까지, 층계의 거주민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주어지는 시련의 내용들도 대부분 한 번에 해낼 수 없는 장기적인 것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끈기와 열성을 갖고 붙들고 있어야만 겨우 해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시련이자 수행이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별도로 회차라는 것이 존재하질 않으니 유의해 주시길.”
입관자와 체류자. 이렇게 둘로 나뉘었다.
연우가 11층으로 들어왔을 때에 대기실이 보이지 않고, 다짜고짜 스테이지가 나타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혹시 이 외에 궁금하신 내용이 있으신지?”
연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일기장을 통해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지금은 빨리 이것저것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았다.
‘11층은 시련 내용도 크게 어렵지 않은 편이고.’
조금 귀찮을 뿐이지.
연우가 속으로 작게 중얼거릴 때, 라플라스가 말했다.
“없으시다면 그럼 지금부터 시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라플라스의 토끼 얼굴이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짜악!
[11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시련: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환계는 사실 여러 차원에 걸쳐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 한데 뭉친 세계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거주하는 환수(幻獸)들은 사람들의 꿈을 먹고 자랍니다.
악몽을 먹고 자란 환수는 마수가 되어 자연재해를 일으키고, 길몽을 삼킨 환수는 영물이 되어 따사로운 햇살을 가져다줍니다.
시련자여, 지금부터 당신만의 환수를 부화시키세요.
당신의 꿈과 정성을 먹여 자라난 환수는 앞으로 기나긴 고난과 역경을 걸으려 하는 당신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어 줄 것입니다.]
그 순간, 연우의 손바닥 위로 둥근 알이 하나 툭 떨어졌다.
달걀만 한 작은 크기였다. 눈밭처럼 새하얀 껍질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주어진 알은 바로 환수의 알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무엇이 태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환수는 주인이 먹인 꿈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모습이 바뀔 수 있으니까요.”
라플라스의 붉은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하실 점은 주인의 꿈을 먹고 자란다고 해도 알 속에 있는 환수는 아직 새끼입니다. 주인이 열과 성을 다해 돌보지 않으면 절대 깨어나지 않는답니다. 좋은 음식, 좋은 태교, 좋은 것들…… 많이 주십시오. 정성을 기울일수록 당신의 환수도 강해질 테니까요.”
연우는 알겠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시련이 끝날 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라플라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자취를 감췄다.
포탈을 타고 사라진 건 아니니, 아무래도 층계 어딘가에서 계속 머물 것 같았다.
연우는 스타트존에 덩그러니 남아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환수의 알이라. 조금 골치긴 해. 돌보는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
동생은 11층을 아주 재미있어 했었다.
여태껏 삭막하기만 하던 시련들과 다르게 이 시련은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훈훈하다.
이런 좋은 환경은 탑의 다른 여러 층계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동생의 특성은 만통.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환수의 알과 동조 상태를 이루고, 좋은 꿈을 많이 먹이면서 다른 영초 같은 것도 흡수시켰다.
‘그리고 거기서 태어났던 게 환룡(幻龍)이라고 했었지?’
환룡은 환수 중에서도 발록이나 기린, 봉황과 같이 최상위로 손꼽히는 종이었다.
동생은 환룡을 부리면서 전체적으로 무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또한 이 일을 계기로 고룡 칼라투스와 인연을 맺어 용마안을 비롯한 용체의 권능을 얻었다.
여러 모로 11층이 그에게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셈이었다.
반면에.
‘나는 이런 쪽과는 거리가 멀지.’
정성스러운 성격의 동생과 다르게 그는 뭔가 돌보는 걸 어려워 하는 편이었다.
부화를 시키는 건 걱정하지 않았다.
일기장에도 여러 부화 방법이 적혀 있었으니까.
그중에는 특정 속성의 상위종을 탄생시키기 위한 히든 피스도 적혀 있었다.
‘피닉스. 남쪽에 있는 신수(神獸)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11층은 여러 모로 평화로운 분위기 대신에 보스 몬스터가 상대하기 아주 까다로운 편이었다. 심지어 랭커들조차 상대하기를 아주 꺼려 할 정도로.
환수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면 탄생한다는 신수. 그런 신수가 동서남북에 걸쳐 총 4마리가 존재했다.
북쪽의 어비스터틀, 동쪽의 허무룡, 서쪽의 샤벨 타이거.
그리고, 남쪽의 피닉스.
피닉스는 흔히 알려진 대로 푸른 불꽃에서 태어났다가 죽어서 재가 되고, 다시 그 속에서 부활을 이룬다는 불사조다.
불과 바람을 다루면서 펼치는 그 무한한 힘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연우는 오랜 고민 끝에 지금 주어진 환수에다 불과 바람 속성을 부여할 생각이었다.
벌써 숙련도를 50%나 넘긴 열화 스킬은 여러 방면으로 쓰임새가 다양했다.
원거리 타격부터 방어 용도까지. 그래서 연우는 더 강한 화력을 얻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 속성이나 풍 속성의 환수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바람과 불을 다스린다는 피닉스의 도움을 빌리는 게 가장 좋았다.
‘생명의 불꽃.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연우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그는 스타트 존에서 판트와 에도라가 올라오기를 조금 더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연우는 마장대검을 들어 스타트 존 인근에 있는 바위에다가 작은 표식을 남겼다.
10층 시련을 시작하기 전에, 만약 길이 엇갈리게 되면서로가 향할 위치를 적어 두기로 미리 입을 맞췄던 것이다.
그들 세 사람만 알고 있는 표식이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걱 정도 할 필요 없었다.
남쪽. 대수림.
‘이렇게만 해 두면 금방 찾아오겠지.’
연우는 환수의 알을 끌어안으면서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순보를 펼쳤다.
팟!
* * *
연우는 판트와 에도라에게 표식을 남겨 놨듯이, 곧장 남쪽으로 이동했다.
일기장에는 각 층계의 시련 내용과 공략법, 그리고 히든 피스의 위치뿐만 아니라, 간략한 지도도 첨부되어 있었다.
연우는 스테이지를 크게 가로지르면서 일기장의 지도와 현실의 지형을 대조해 보았다.
시간이 지난 만큼 많은 부분이 변해 있을지 모르니, 앞으로 11층을 공략하는 데 있어 미리미리 수정 작업을 해 둬야만 했다.
‘11층은 알의 부화가 시련의 주 내용이니 만큼, 초심자 구간처럼 빠른 통과가 불가능해. 최소한 보름. 길면 1년, 2년이 걸릴지도 몰라. 다른 히든 피스들도 스테이지 곳곳에 숨겨져 있고. 그러니 지형지물을 우선적으로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알의 부화 기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태어날 환수의 종류에 따라, 주인의 정성 여부에 따라, 성장 속도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플레이어는 3년이 넘도록 11층에 묶여 있는 경우도 있다고 일기장에 적혀 있었으니.
11층의 시련은 여러 모로 공략 난이도가 크게 어렵지 않은 만큼, 불확실성이 강했다.
‘그러다 실수로 알이 부서지거나 다른 환수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하면…… 그냥 끝이지.’
알을 잃으면 시련은 실패로 끝난다. 그리고 더 이상 층계를 올라갈 자격조차 박탈당하게 되어 있었다.
대체할 만한 다른 알을 구할 방법이 있다는 말도 있었지만, 정확하게 알려진 건 없었다.
어떤 외부 환경에서도 알을 소중하게 지킬 것. 그리고 뛰어난 환수를 부화시킬 것.
이게 이번 시련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쉬우면서도 쉽지 않아. 자신이 실패했다고 다른 플레이어들도 실패하게끔 해코지하려는 놈들도 분명히 있을 테고.’
그러니 더더욱 피닉스를 찾아갈 필요가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신수의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이지는 않을 테니까.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연우가 머릿속으로 11층의 시련 내용 정리를 마쳐 갈 때쯤.
그는 어느덧 스테이지를 크게 가로질러 남쪽에 우거진 밀림에 들어서고 있었다.
[‘피닉스의 영역’에 입장했습니다.]
[피닉스의 영향에 따라 불과 바람의 속성 방어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피닉스의 영향에 따라 마력이 짓눌려 전체적인 스탯이 하향 조정됩니다.]
[피닉스가 어딘가에서 당신을 지켜보기 시작합니다.]
연우는 순간 물 먹은 솜처럼 몸이 축 늘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피닉스가 영역에 걸쳐 뿌린 기운이 육체를 속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불편한 기분이었지만, 연우는 만족에 찬 미소를 흘렸다.
피닉스가 자신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메시지가 떴으니까. 어떻게 그의 주의를 끌까 싶었는데 일차적인 성공은 한 셈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원래 이렇게 경계심이 많은 성격이었나? 일기장에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연우는 대수림의 공기를 타고 흐르는 미약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살의. 무언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충동이 물씬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연우는 의문을 가지면서 어느새 영역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암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풍처럼 높게 선 암벽. 그 끄트머리에는 굴이 있었다. 사람은 자그마한 점처럼 보일 것 같은 거대한 굴.
‘피닉스의 둥지.’
그리고 연우가 둥지에 가까워질수록 공기에 섞인 살의도 점점 뚜렷해졌다.
연우가 암벽 등반을 위해 다시 위로 몸을 던지려던 그때.
『멈춰라.』
연우는 갑자기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건 정확하게 목소리가 아니었다. 의사 전달. 의념을 실어 보내는 고위 기술이었다.
‘피닉스.’
연우의 두 눈이 깊어질 무렵, 의념이 다시 전달되었다. 살의와 경계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이 이상 다가온다면. 죽일 것이다,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