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환수 (4)
『고맙다, 인간.』
“별 말씀을.”
『그런데 내 아이를 데리고 갔던 그놈들은?』
“죽었습니다. 혹시 다른 배후가 있을까 싶어 시체도 모두 소각시켰고요.”
『아쉽군. 그런 놈들은 내가 벌을 내려야 하는데.』
뒤늦게 안 사실이었지만, 피닉스는 부화가 끝나면 곧바로 트레저 헌터들을 뒤쫓을 생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제대로 어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다가, 층계를 벗어나면 뒤쫓는 데 한계가 있기도 했다.
부화 전에 되찾아 온 게 천만다행인 셈이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넌 내 대신 내 아이를 구해 준 은인이다. 은인이 한 일이 곧 내가 한 일과 뭐가 다를까? 여하튼.』
피닉스는 살짝 말을 끊으면서 동공을 굴렸다. 커다란 노란 동공 속에 연우의 모습이 비쳐졌다.
『너는 나의 아이를 구해 주었다. 약속은 약속. 약속했던 대로 시험을 내어 주겠다. 정확히 말하라. 무엇을 원하느냐?』
“당신이 품고 있다는 생명의 불꽃을 원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겠지?』
“예. 당신을 있게 하는 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피닉스는 불에서 태어나 불 속에서 죽는 존재다. 그리고 불에서 새로 태어나 하늘로 날아오른다.
부활과 재생을 상징하는 불꽃.
그것이 바로 생명의 불꽃, 흔히 ‘성화(聖火)’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따로 따르는 신이나 악마가 있다면 말해야 할 것이다. 속였다가 받게 되면 자칫 안 맞을 수 있으니.』
“없습니다.”
연우가 헤르메스가 제안한 사도의 좌를 거절한 이유이기도 했다.
성화는 원초적인 생명력을 타고 난 불꽃. 하지만 이미 ‘완성’되어 있는 신성과는 맞지 않았다. 완성 된 신들은 따로 추구하는 불꽃이 있기 마련이었다.
『다행이군. 하면 너의 환수에게로 줄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좋다. 원래대로라면 따로 시험을 내리겠으나, 은혜가 있으니 생략하도록 하겠다. 어차피 너의 실력이라면 시험 역시 별반 어렵지도 않을 것 같고.』
‘잘되었군.’
[보상으로 ‘피닉스의 환심’을 획득했습니다.]
[피닉스와의 친화도가 200만큼 상승했습니다. 피닉스가 당신에 대한 경계심을 낮춥니다.]
[보상으로 ‘생명의 불꽃’의 시험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피닉스의 인정을 받아, 히든 퀘스트 ‘피닉스의 시험’을 달성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5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1,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생명의 불꽃을 얻기 위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피닉스의 말마따나 지금의 연우에게 크게 어렵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런 시간을 건너뛸 수 있다면 대환영이었다.
『하지만 나의 불꽃을 옮겨 담기 위해서는 그만한 그릇을 필요로 한다. 그 정도는 만들어 오너라.』
[새로운 퀘스트가 주어졌습니다.]
[히든 퀘스트 / 생명의 불꽃]
내용: 피닉스가 가진 힘의 원천인 ‘생명의 불꽃’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지만, 그만큼 옮겨 담기도 아주 까다로운 성질을 자랑합니다. 11층 곳곳에 흩어진 재료들을 모아, 생명의 불꽃을 옮겨 담을 그릇을 완성하십시오.
*필요 목록
1. 알바트로스의 알 (0/5)
2. 그림자 뱀의 사과 (0/80)
3. 래서 드라군의 심장 (0/1)
……
제한 시간: 없음.
보상:
1. 피닉스의 환심
2. 생명의 불꽃
연우는 레시피(Recipe) 목록을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불꽃을 얻기 위한 시험보다 그릇을 만들 재료 구하는 게 더 힘들 거라더니. 정말이군.’
퀘스트에 필요한 재료 아이템은 전부 50여 가지.
전부 11층에서 충분히 구할 수 있지만, 몇 가지는 난이도가 있어서 꽤 고생을 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생명의 불꽃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11층을 돌아다니면서 틈틈이 수련도 가능할 테고.
『그럼 볼일 다 끝났으면 이만 나가 보아라. 나중에 필요하면 따로 부를 것이니.』
이제 부화 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용히 물러섰다.
* * *
연우는 피닉스의 둥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그리고 환수의 알을 위한 ‘둥지’를 빠르게 만들었다.
알 속에 있고, 환수라고 해도 새끼는 새끼. 본능적으로 바깥 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조용하고 안락한 환경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많이 늦은 거였다.
하지만 알은 피닉스가 내뿜는 따스한 기운이 좋았던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마음 편하게 둥지를 만들 수 있었다.
연우는 일기장에 적혀 있는 대로 스테이지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재료들만 다 가져와 둥지를 꾸몄다.
알카스의 나뭇가지로 둥지 틀을 촘촘하게 짜고, 기화초의 풀잎을 왕창 뜯어와 둥지 안쪽에다 부드럽게 깐다.
그리고 다른 환수들이 몰리지 않도록 식인목의 수액을 주변에다 촘촘히 바르며, 인근 샘물에서 물을 길어와 알을 꼼꼼하게 씻기기도 했다.
알을 정성스럽게 다루면 다룰수록 뛰어난 환수가 태어난다. 이런 건 필수였다.
‘별짓을 다하는군.’
연우는 졸지에 팔자에 없던 보모 노릇을 하게 되자 살짝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우웅- 웅-
그때, 기분 좋다는 듯 알이 살짝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연우는 살짝 놀랐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둥지 제조에 박차를 가했다.
* * *
둥지는 ‘바람’을 잘 느낄 수 있도록 가장 높은 거목의 끄트머리에다 놓았다.
다행히 환수의 알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메시지창이나 소리로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느낌’이 그렇게 다가왔다.
‘그럼 이쪽은 이만하면 되었고.’
연우는 둥지 작업이 끝나자, 가볍게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 슬슬 보상으로 받은 것들을 확인할 차례였다.
레시피는 확인이 끝난 뒤에 찾을 생각이었다.
‘현재 보상으로 받은 게 총 여덟 가지인가?’
보상 목록은 아주 많았다.
얼음 반지, 해골 문장, 크라투가의 죽창 등등.
연우는 용마안을 열어 아티팩트를 전부 확인했고, 가볍게 혀를 찼다.
‘건질 건 이것밖에 없나?’
연우는 자그마한 해골이 걸린 귀걸이를 다시 살폈다.
손톱만 한 작은 크기에, 자그마한 보석을 물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해골 문장]
분류: 보조 장비
등급: D
설명: 생전 부두술사였던 플레이어의 두개골로 만든 귀걸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꽤 좋은 성능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보조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가능하다면 손재주가 뛰어난 대장장이를 찾아가도록 하자. 수리를 하거나, 다른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좋은 재료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 부두술사의 악다구니
부두술사의 영혼은 두개골에 계속 남아 소리 없는 절규를 질러 댄다. 그때마다 풍기는 저주는 암흑 속성의 마력을 소량으로 증폭시킨다.
해골 문장은 단순하게 옵션만 본다면 갖고 있는 보상 목록 중에서도 가장 안 좋은 편이었다.
암흑 속성을 다룰 수 있는 연우에게도 단순한 보조적인 장치 외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 이제 연우에게 D등급의 아티팩트는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연우는 다른 점에 집중했다.
‘부두술사의 영혼이 맺혀 있다.’
검은 팔찌의 바뀐 옵션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제는 더 이상 팔찌라고 할 수 있나 싶긴 하지만.’
연우는 검은 팔찌와 팔을 칭칭 감고 있는 쇠사슬을 보면서 피식 웃으면서 용마안을 활짝 열었다.
검은 동공을 따라 세로로 또 다른 동공이 열리면서 해골 문장을 직시했다.
「끼아아!」
예상대로 해골 문장에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유령이 하나 맺혀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아티팩트에 묶여 있어 이제는 짙은 원한만 남은 망령.
힘도 마력도 전부 잃어 이제는 진짜 소리를 질러 대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전혀 불필요한 녀석이었다.
연우는 귀걸이를 꽉 쥐었다.
그리고 마력회로를 가동, 컬렉션에 담겨 있던 150마리의 망령 중 30마리 정도를 암흑 속성으로 치환시켜 마력과 함께 귀걸이에다 불어 넣었다.
칠흑왕 절망의 옵션, 〈흑기〉.
거무스름한 기운이 꾸역꾸역 해골 문장으로 스며들었다.
낡아 빠졌던 해골이 검게 물들기 시작하고, 입에 문 보석이 화려한 빛을 틔웠다.
그리고 부두술사의 영혼이 내뱉는 기괴한 절규도 점차 커져갔다.
「끼아아아아!」
또 다른 옵션, 〈사귀 사역〉. 인위적으로 사귀를 만들어 보고자, 부두술사의 영혼을 실험체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번쩍!
갑자기 보석이 시린 빛을 토해 내더니.
파스스-
두개골과 보석이 함께 잘게 부서졌다. 가루가 흩날리면서 자그마한 돌개바람을 그렸다.
그것은 곧 사람 상체만 한 크기의 유령으로 조금씩 커져 갔으니.
그렇게 사귀로 거듭난 부두술사의 영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흐릿하게 빛났다.
「아아아…….」
부두술사의 영혼은 사귀가 되고서도 여전히 기괴한 귀곡성을 자꾸 토해냈다.
「아아…… 아아아아아!」
사귀로 거듭났어도 이지가 완전히 망가져 정신이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덜덜 떠는 모습이 뭔가를 아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플레이어의 영혼이라더니. 어떤 몬스터한테 잡아먹히기라도 한 걸까?
연우는 과연 제대로 된 실험이 될까 싶어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가볍게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자신이 현재 가진 망령 중에 당장 실험체로 쓸 만한 게 이것밖에 없으니.
일단은 해 봐야 했다.
연우는 손을 뻗어 부두술사 영혼의 머리통을 꽉 쥐었다.
아직 녀석은 사귀로만 만들어졌을 뿐, 종속시킨 건 아니었다.
우선은 사역부터.
연우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녀석의 머리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두 눈을 강제로 마주치면서 말했다.
“사역되어라.”
「아아아아아!」
“사역되어라.”
「아아아!」
연우는 같은 말을 계속 되뇌면서 영혼에다 계속 마력을 불어넣었다.
자신의 마력을 강제로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럴수록 부두술사의 영혼은 마치 간질 환자처럼 더 크게 부들거렸다.
이렇게 해서 제대로 된 사역이 될까 싶었지만.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언제부턴가 영혼이 내뱉는 절규는 이지를 띠기 시작했다.
“사역되어라.”
그렇게 연우가 내뱉은 말은 부두술사의 영혼에 단단히 각인이 되었다.
탁한 색깔이 감돌던 영혼의 색도 한 차례 부르르 떨리다, 곧 검은색으로 확 하고 물들었다.
부두술사의 영혼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또렷해진 눈은 연우를 응시했고, 연우는 그 눈빛에서 녀석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느낌이로군.’
연우는 ‘사역한다’는 느낌이 이제야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여전히 그에게 초능의 영역은 낯선 구석이 남아 있었다.
연우가 부두술사의 영혼을 보면서 말했다.
“앉아.”
츠츠츠.
영혼은 멀뚱하게 연우를 바라보다가 살짝 자세를 낮췄다.
연우는 눈을 살짝 빛내면서 몇 가지 명령을 더 내렸다.
“일어서.”
“뛰어.”
간단한 명령에서부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저쪽에 보이는 나무까지. 전력으로 뛰어갔다 와.”
움직이는 명령과.
“저기 있는 과일 보이나? 저걸 따다 줄 수 있나?”
구체적인 명령까지.
부두술사의 영혼은 연우가 내리는 명령을 군말 없이 잘 수행했다.
특히 높은 곳에 있는 과일을 따 달라고 했을 때는 직접 자그마한 마법을 부리기도 했으니.
비록 영혼의 격이 낮아 큰 마법은 구사할 수 없었지만, 자잘한 마법 정도는 언제든지 가능한 것 같았다.
반항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고, 이렇다 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정말 충실한 권속이 된 것이다.
그 뒤로도 몇 가지 실험을 더 해 보았다.
먼저 최대 속력.
순보에 조금 못 치는 정도였다. 이만하면 데리고 다니는 데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사귀 특성상 은밀하기도 해서 기습도 가능해 보였다.
그 다음에는 범위.
대략 100미터 내외 정도로 그리 멀지 않았다.
가까이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사귀와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둘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선도 점차 얇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선이 희미해지는 기점부터 사귀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역 관계가 해제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강제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선이 얇아져도 사라지는 건 아니라, 다행히 간간이 어떤 메시지는 던질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선을 강화시키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
연우는 사귀와의 연결 고리에 감응선(感應線)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여기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