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3화 (83/862)

8화. 환수 (6)

에도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판트가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문지르면서 다가왔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온 거요, 아버지. 아르티야가 그 난리를 부렸을 때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셨던 양반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겁니까?”

바깥일에는 철저하게 중립을 지킨다.

오랫동안 외뿔부족에 내려오던 철칙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최강의 일족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나도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그러기가 힘들 것 같다.”

중년인의 말에 판트와 에도라는 얼굴을 잔뜩 굳혔다.

자신들의 아버지는 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는 ‘아홉 왕’ 중 한 명.

순수하게 무력만 따진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그런 사람이 ‘힘들다’고 말할 정도라면 대체 무슨 일인 걸까?

“우린 용병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예? 하지만.”

“플랑 녀석이 자기 ‘뿔’을 내놓겠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피할 수가 없었다. 이미 다른 장로들도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하였다.”

“……!”

“……!”

판트와 에도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외뿔부족에게 있어 뿔은 자긍심과도 같은 것. 플랑은 중년인의 동생이며, 부족에서도 손꼽히는 전사였다.

그런 자가 뿔을 내놓겠다고 말한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말과 똑같았다.

중년인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겠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 * *

“저도 잘 모릅니다.”

『으음. 그런가.』

연우는 피닉스가 없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위로 들면서 물었다.

“혹 보이는 게 있으십니까?”

『보이는 것이라? 아니. 보이지 않는다. 웬만한 건 다 볼 줄 알고 느낄 줄 안다지만…… 그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마치.』

피닉스는 말꼬리를 살짝 흐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 마치 안개로 싸여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내 눈에는.』

‘신수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아티팩트라. 난감한데.’

연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피닉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알 수 있을 것 같구나.』

“무엇입니까?”

『그건 나와 정반대되는, 대척점에 놓인 물건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같은 선상에 놓인, 거울과 같다는 것.』

‘대척점? 거울?’

알 수 없는 비유였다.

『나는 생명을 태우고 생명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그 물건은, 죽음으로 태어나 죽음으로 스러지는구나. 생과 사는 종이 한 장 차이이며, 나와 그 물건 모두, 순환과 재생, 부활을 갖고 있으니.』

피닉스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거울이고, 양면이며, 대척점이고, 같은 선상이다.』

“…….”

연우는 도통 피닉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피닉스도 그런 연우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었다.

『그래. 많이 혼란스럽겠지. 정작 나만 하더라도 묘하기 짝이 없는 물건인데, 필멸자인 그대에게는 오죽할까?』

그러다 묘한 말을 남겼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알아 둬라. 그럼 그 물건에 대해 언젠가는 비밀을 풀 수 있을 것 같으니.』

“무엇입니까?”

『생사(生死)는 다르되, 다르지 않다는 것. 하나라는 것.』

“생사는 하나……?”

『그래.』

피닉스는 생명이면서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반면에 검은 팔찌는 죽음을 다룬다. 죽은 영혼을 거둬서 망령과 사귀란 형태로 부린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부활의 한 형태가 아닐까.

어쩌면 피닉스는 이걸 두고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선문답 같은 내용이지만, 연우는 이게 어쩌면 칠흑왕이라는 존재를 밝혀내는 열쇠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팔찌와 다르게 그 방패는 확연하게 신성이 느껴져. 음. 전쟁 신의 가호를 받은 물건인가? 아니면 직접 쓰던 것?』

연우는 조금 놀란 눈이 되었다.

피닉스가 살짝 우쭐해하는 어투가 느껴졌다.

『크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는 않은 눈치로구나. 알았다. 거기에 대해서만큼은 언령에 두고 침묵을 약속하지.』

언령에 둔 약속.

존재를 묶어 약속을 어길 경우 영혼이 소멸하게 되는 마법의 계약이었다. 다른 곳에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너는 내 아이를 구해 준 은인이 아니냐. 그 정도 배려쯤은 당연한 거지. 다만, 그 방패는 나도 한번 살펴보고 싶으니 옆에서 보는 걸 허락해다오. 간만에 신의 무구를 보니 참 재미나.』

언령의 계약을 맺었으니 보여 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신의 무구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으니. 모르는 게 있으면 묻기 쉽겠어.’

연우는 등에서 아이기스를 꺼내 가만히 쓰다듬었다.

반투명한 연분홍빛의 9겹 방패.

그냥 보고 있으면 장인이 만든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두터운 방패에는 어울리지 않게, 흉측하게 생긴 몬스터의 머리 하나가 박혀 있었다.

『고르곤이로군.』

눈이 마주친 사람에게 석화의 저주를 내린다는 메두사.

『그래. 들은 적이 있어. 올림포스에 거주하는 한 여신이 있어, 머리가 아주 명석하고 용감하기가 이를 데 없다고. 삿된 기운을 물리치고, 옳은 힘만을 가져온다더니. 이게 그 여신의 물건이었나?』

연우는 피닉스의 감탄을 들으면서 용마안으로 아이기스를 살폈다.

[아테네의 아이기스]

분류: ???

등급: ???

설명: 9개의 꽃잎 방패로 이뤄진 절대방어구. 전쟁의 여신, 아테네의 신명과 축복이 담겨 대부분의 공격에서 사용자를 보호해 준다.

하지만 신의 무구답게 스스로 주인을 가린다고 알려져 있으며, 사특한 마음이 깃들거나 아테네의 명예를 더럽히는 추악한 행동을 저지를 시, 반대로 주인을 해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고르곤의 저주

아테네는 한때 올림포스에 반기를 든 고르곤 세 자매를 징벌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도였던 페르세우스를 시켜 그들의 목을 잘라, 방패 정중앙에 붙이도록 지시했다.

벽사(關邪)의 기능을 자랑해 사특한 기운을 물리치고, 눈이 마주친 적에게 강렬한 석화(石化)의 저주를 내린다.

* 여신의 창칼

소유주에게 강한 여신의 축복을 내린다. 눈 먼 화살과 창칼로부터 육체를 보호해 주고, 압도적인 패기를 발산시켜 상대의 의지를 꺾는다.

또한, 아군으로 인식된 자들에게 동시 축복을 내려 일정 범위 내 능력치와 사기가 10%씩 향상되고, 모든 속성 방어도가 15%씩 증가한다.

숙련도가 오를수록 더 넓은 범위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가 전가된다.

* ???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봉인)

**이 아티팩트는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주인에게 완전히 귀속됩니다. 타인으로의 거래나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기능 중 일부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일정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춰야만 해제할 수 있습니다.

** 정보를 일부 열람할 수 없습니다. 일정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춰야만 권한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연우의 소유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인지, 정보창의 내용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검은 팔찌와는, 많이 다른 모양이지? 하지만 그만큼 좋을 테고.』

“예.”

연우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무구이기 때문일까?

이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연우는 여태껏 일기장의 내용을 토대로 수많은 히든 피스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좋은 아티팩트와 스킬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아이기스는 그것들을 전부 내어 주고도 남을 만큼 아주 뛰어났다.

아이기스는 방어구와 무기의 역할을 동시에 겸비한다.

뛰어난 방어도를 바탕으로 벽사 기능과 석화 저주를 가져 아주 넓은 범위의 적들로부터 소유주를 안전하게 지켜 준다.

하지만 연우가 가장 주목하는 점은 따로 있었다.

‘군중 제어 기술.’

아군에게는 버프를, 적군에는 디버프 효과를 주는 옵션.

보통 이런 건 군주들의 스킬이나 특성으로 자리를 잡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신의 권속’이라는 한계가 명확했고, 그마저도 숫자적인 제약이 있거나 범위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기스의 효과는 연우가 인식하고 있는 아군에게 두루 통용될 수 있었으니.

이는 연우가 사귀나 망령 군단을 여럿 두었을 때, 그들의 능력을 동시에 향상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단순히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전력적인 증강을 가져오는 것이다.

‘정우 녀석이 파악했던 것보다 기능이 훨씬 다양해. 이것만 있으면 최소한 눈 먼 칼에 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현재 탑 내에서 신의 무구를 지녔다고 알려진 자들은 몇 되질 않는다.

있다고 해도 대부분 사도로서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들. 연우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군. 원주인의 성격이 깐깐한 만큼 사용 조건도 꽤 까다로운 것 같다만.』

연우는 피닉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의 말마따나 제약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연우는 설명창 내용 중에 두 가지 대목에 집중했다.

‘사특한 마음’과 ‘아테네의 명예’라는 대목.

신화 속 아테네는 정결하며 고귀한 전쟁의 여신이다. 명예와 정의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했다.

‘삿된 마음이라.’

연우는 언제나 복수를 꿈꾸고 있다. 때문에 아테네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관건일 것 같았다.

‘벽사의 기능도 조심해야 할 것 같고.’

연우는 아까 전부터 일정 거리 안쪽으로 오지 않으려 하는 사귀들을 바라봤다.

[사귀들이 당신이 소지한 물건을 두려운 눈길로 바라봅니다.]

[친화도가 소폭 하락했습니다.]

사귀들은 혹시 고르곤의 얼굴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약한 녀석들은 오들오들 떨고 있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흑기를 뽑아 봤지만.

쩌엉-

손가에 맺히던 흑기는 뭉치다 말고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연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검은 팔찌와 아이기스의 상성이 좋질 않아.’

이건 예상도 못했던 결과인데.

검은 팔찌는 저주와 악념을 이용하고, 아이기스는 성스러운 특징을 자랑한다. 당연히 서로 간에 충돌을 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두 무구를 사용할 때에는 주의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하나를 사용할 때에는 다른 하나는 기능을 꺼 놓는 방식으로.

‘그럼 비그리드는?’

연우는 등에 고정시켰던 비그리드를 뽑아 오른손에 쥐었다.

한때는 성검이었지만 너무 많은 피를 삼켜 마검으로 변질됐다는 이 보구는 과연 어떨까?

지이이잉-

아이기스의 성스러운 기운과 맞닥뜨린 비그리드가 잘게 몸을 떨었다.

그런데.

[‘비그리드’에 맺힌 저주가 ‘아이기스’의 벽사 기능에 의해 조금씩 씻기기 시작합니다.]

[성검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마검의 저주가 너무 강렬하기에 더 많은 신기를 필요로 합니다.]

‘이렇단 말이지?’

연우는 작게 감탄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비그리드의 기능을 제대로 깨우기 위해서는 단단히 맺혀 있는 저주를 씻길 필요가 있었는데.

이건 아이기스로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았다.

『죽음을 다루는 팔찌는 거부를 하고, 저주를 받은 성검은 환영을 한다라. 재미있군. 참 재미있어!』

피닉스가 즐거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머릿속을 빠르게 두들겼다.

‘그렇다면 당장 취할 수 있는 무구 조합은 두 가지.’

연우는 머릿속으로 몇 번씩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다.

평소에는 마장대검과 크라슈나의 단검을 주무기로 삼고, 검은 팔찌로 보조 역할을 하는 전투 스타일을 고수해야 한다.

이때에는 탁월한 민첩성이 주를 이루게 되겠지.

여태 연우가 가졌던 싸움 방식이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다만, 강한 공격력과 파괴력을 필요로 할 때, 혹은 난전이 벌어질 때에는 비그리드와 아이기스가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았다.

비그리드는 강한 파괴력을, 아이기스는 단단한 방어력과 넓은 군중 제어 기술을 자랑할 테니.

게임으로 치자면 1번 장비, 2번 장비인 셈이었다.

연우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로써.

계획했던 대로 장비는 거의 다 갖춘 셈이 되었으니까.

* * *

불길한 물건과 신성한 물건.

피닉스는 칠흑왕의 절망과 아이기스를 두고 각각 그렇게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칠흑왕의 절망은 자신과 가깝고, 아이기스는 자신과 멀다고 했다.

『말했듯, 팔찌는 나와 한 줌의 차이밖에 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방패는 거리가 아주 멀다. 신이라는 존재는, 그들의 법칙을 어기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많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면서 연우에게 말했다.

『다만, 이렇게 서로 특징이 확연하게 다른 무구를 동시에 가진 자는 탑에서도 흔하지 않다. 탑이 왜 이런 선물을 했는지, 아마 차차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거다.』

여전히 선문답 같은 말이었지만, 연우는 좋은 말을 많이 들었다는 생각에 감사 인사를 했다.

피닉스의 여러 설명 덕분에 두 무구에 대한 개념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다만.』

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탁? 아직 그럴 만한 게 남아있나?

『덕분에 방금 전에 세 아이가 모두 건강하게 부화했다. 네가 구해주었던 막내 아이도.』

‘벌써?’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알을 구해 오는 게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었던 모양이다.

가면 아래로, 연우의 두 눈이 살짝 호선을 그렸다.

“축하드립니다.”

『고맙구나. 그래서 말이다만.』

피닉스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불쑥 물었다.

『막내 아이의 이름, 혹 그대가 지어 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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