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6화 (86/862)

11화. 생명의 불꽃 (2)

연우는 알바트로스의 둥지를 시작으로, 빠른 속도로 11층의 히든 피스를 훑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가 우글대는 그림자 뱀의 굴에서는 사귀들이 도살을 하다시피 하면서 컬렉션을 보충했다.

래서 드라군의 영역에서는 카가 심장을 뽑았다.

그 외에도 청학의 벼슬, 가고일의 날개, 잭 오 랜턴의 꼬리깃, 유니콘의 뿔 등, 11층에서 내로라하는 환수들을 죄다 싹쓸이 하고 다녔다.

덕분에 보상과 공적치를 빠른 속도로 쌓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때문에 발칵 뒤집힌 곳도 있었다.

11층의 체류자들이었다.

“젠장! 또?”

“어떤 놈이 이딴 짓을……! 대체!”

시련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들도 괜찮은 재료들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그게 모조리 동나고 말았으니.

아니, 동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어떤 서식지는 아예 씨가 마르다시피 하면서 과연 복구가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환계 특성상 언젠가는 복구가 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플레이어들에게는 언제나 한시가 촉박했고, 이런 사태를 저지른 범인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연우는 아주 은밀하게 돌아다녔다.

게다가 재료를 구하고 나면 곧바로 종적을 감춰 버리기 때문에 뒤를 밟기가 어려웠다.

‘미안하지만, 이쪽도 어쩔 수 없어서 말이지.’

연우는 재료를 구하기 힘들다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플레이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로브를 깊게 눌러썼다.

하늘벌레의 날개를 구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이 주로 모여 있다는 도시를 찾았는데.

들리는 거라고는 자신에 대한 성토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우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생명의 불꽃을 담기 위한 그릇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죄다 그런 것들뿐인데. 그라고 어떻게 방법이 있을까.

‘뭐, 꼭 재료들이 아니었다고 해도 한 번 다 쓸고 갈 생각이긴 했지만.’

연우가 먹지 않았더라도 다른 누가 먹었을 게 분명한 히든 피스들.

그걸 가로챘을 뿐인데 성토를 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가지는 사람이 옳은 세상이 탑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단순히 나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었다고 하긴 조금 이상하기도 한데. 정우가 말하는 것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

도시 버락은 11층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건물 구조가 독특한 양식을 자랑하고, 길가에 보기 드문 환수들이 많아 언제나 활기차기로 유명했다.

특히 숙소나 시장이 잘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11층의 장기 체류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층계의 플레이어들도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자주 찾았기 때문에 항상 활발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언제나 의욕적인 사람들로 가득했던 도시는 전체적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연우에 대해 분개를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안색이 어두웠다.

뭔가를 두려워하는 모습.

혹시 다른 뭔가에 휘말릴까 싶어 주변을 잔뜩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장사꾼들도, 체류자들도,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연우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지만, 곧 고개를 털었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버락을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일에 엮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때였다.

“다들 비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좌우로 확 갈라졌다.

연우는 뭔가 싶어 인파 속에 묻혀 중앙에 난 길을 살폈다.

검은 갑옷으로 복장을 통일한 플레이어 집단이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붉은색 괴물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베헤모스 클랜? 저놈들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연우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베헤모스는 중간 층계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고 있는 클랜이었다. 청화도의 산하 단체로, 위압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다만, 이런 저층 구간에는 잘 출몰하지 않는 놈들인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사람들이 긴장해 있는 것과 어떤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보군.’

베헤모스는 청화도의 앞잡이다. 놈들이 움직였다는 건 청화도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알아봐야겠어.’

연우는 인파 속에 묻혀 뒤로 슬쩍 빠졌다.

베헤모스 클랜과 부딪칠 생각은 없었지만,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궁금했다.

어쩌면 청화도와 관련된 어떤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히 연우가 하늘벌레의 날개를 구하기 위해서 들르려는 곳은 정보상으로도 유명했다.

‘여긴가?’

연우는 ‘별빛 술집’이라고 푯말이 적힌 펍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쪽은 거친 인상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담배를 피워 대고 있었다.

연우는 담배 연기를 가로질러 카운터 옆 자리에 앉았다.

컵을 닦고 있던 바텐더가 야릿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오시는 손님이로군. 가면이 참 독특해. 그거 어디서 났는지 혹시 나도 가르쳐 줄 수 있나? 가면 같은 걸 모으는 게 취미라서 말이지.”

연우는 바텐더의 말을 무시하고, 카운터 위에 미리 포인트를 환전시킨 금화 주머니를 던졌다.

찰그랑.

바텐더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바텐더가 씩 웃으면서 금화 주머니를 챙겼다.

“주머니가 두둑하신 손님은 언제나 대환영이지. 그래, 뭘 필요로 하시나?”

“하늘벌레의 날개. 되도록 많이 구하고 싶은데. 있나?”

“그런 자잘한 거야 당연히 있…….”

“31층의 발렌 숲에 머무는 종으로만.”

“……지. 좀 비싸서 그렇지만. 뭐, 그래도 이만한 액수라면 얼마든지 내어 줄 수 있네만.”

별빛 술집은 노련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제법 유명한 상점이었다.

각 층계 별로 지부를 마련해서 필요한 물건과 정보를 사고파는 곳.

때문에 시련에 필요한 물건이나, 해결 힌트를 얻기 위한 플레이어들이 주로 찾곤 했다.

가격이 비싼 편이라 문제였지만, 이미 연우는 자신이 잡았던 여러 몬스터와 환수의 부위들을 조금씩 따로 팔아서 포인트를 마련해 둔 상태였다.

히든 퀘스트로 쌓아 올린 공적치는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다. 시련이 끝난 뒤에 높은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공적치를 최대한 쌓아 둘 필요가 있었다.

“여기 있네.”

바텐더는 안쪽 창고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야 돌아왔다.

연우는 녀석이 건넨 주머니 안 쪽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마안으로 살피니 진짜가 맞았다.

“하늘벌레의 날개는 환수의 먹이로 각광을 많이 받는 편이라, 11층에서 수요가 가장 많지. 나중에 더 필요하면 따로 찾아오게.”

“그러지.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맨입으로?”

철그럭. 연우는 금화 주머니를 하나 더 얹었다.

“흐흐. 손이 큰 친구였군. 그래, 뭔가?”

“바깥에 베헤모스 클랜이 돌아다니던데. 11층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순간, 바텐더의 표정이 묘해졌다.

“음? 11층은 처음인가?”

“그동안 인적 없는 곳에만 있다 보니.”

“하긴. 그럼 모를 수도 있겠군.”

바텐더는 손으로 목을 벅벅 긁었다.

난감해하는 투. 꺼려 하는 게 아니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럼 혹시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거란 사실은?”

“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화아악-

연우를 따라 기운이 확 퍼졌다.

바텐더를 비롯해 펍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움츠러든 몇몇은 무기에 손을 가져가기도 했다.

그러다 연우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기운을 가라앉혔

‘너무 경거망동했어.’

난데없이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가 전쟁을 벌인다고 하니 자기도 모르게 날을 세운 것이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데.’

신비 상인이 마정석을 크게 필요로 할 때부터 언젠가 거대 클랜 사이에 전쟁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레드 드래곤은 클랜 랭킹 2위로, 올포원을 제외하면 사실상 탑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곳이 움직였다면.

‘크게 흔들릴 거야. 아주 크게.’

연우는 눈을 싸늘하게 가라앉히고 바텐더를 쳐다봤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

연우가 뿌리던 투기는 아주 강렬했다.

바텐더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 뭘 말인가?”

“아까 말했던 거. 자세히 말해 보라고.”

바텐더는 그제야 연우가 자신을 해코지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처음처럼 쉽게 농을 던질 수가 없었다.

“하긴…… 두 거대 클랜의 전쟁이라면 흥분할 법도 하지.”

바텐더는 제 딴에 알아서 납득을 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할과 리언트 간에 충돌이 벌어졌고, 리언트가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로 도망쳤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선전포고가 오고 가면서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 사이가 급속도로 냉각되어 전면전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까지.

‘바할과 리언트가 붙어?’

연우는 문득 탑 외 지역에 있을 때 바할이 찾아왔던 이유가, 사실은 리언트를 쫓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랑단의 소식을 듣고 리언트가 튜토리얼 스테이지로 이동했을 건 분명했으니까.

‘뭔가 재미있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두 거대 클랜을 대표하는 하이 랭커들끼리 붙었다면 전쟁은 절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게다가 바텐더가 덧붙인 말은 연우를 더 흥미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 클랜의 첫 번째 전쟁터가 11층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다네.”

“이 층이? 굳이, 왜?”

바텐더는 마침 손수건으로 닦고 있던 유리잔을 행거에 걸면서 대답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본격적인 층계의 시작이 11층이니 상징적인 의미로도 괜찮고, 환수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자원 보급도 쉬워서 그렇겠지.”

‘확실히.’

11층의 환수들은 전력 증강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특히 빠른 성장을 원하는 플레이어들은 환수의 내단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편이었으니, 전쟁 준비로 적절했다.

‘물론, 랭커나 그에 준하는 자들에게는 환수의 내단이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중간층 재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지.’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판국에 환수들을 내가 죄다 싹쓸이하고 다니니 원망도 그만큼 더 큰 거였고.’

연우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더 많은 플레이어들이 11층에 도착하기 전에 시련부터 끝내야겠는데.’

아무래도 생명의 불꽃을 좀 더 빨리 받을 수 있도록 빠르게 그릇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도시 버락의 분위기가 이렇게 어두운 것도 이해가 갔다.

온갖 클랜과 플레이어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연우는 궁금한 두어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여러 정보를 얻게 된 연우는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한 뒤에야, 잔금을 마저 치르고 펍을 나왔다.

* * *

연우가 떠난 자리.

바텐더는 닦고 있던 유리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남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뭔 놈의 살기가 저렇게 사나워……? 목 서늘해 죽는 줄 알았네.”

바텐더가 연우가 나간 문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친구에 대해서 따로 한 번 조사해 봐. 뭔가 나올지도 모르겠어.”

“으응? 그거 나더러 죽으란 뜻인가? 딱 봐도 모르오? 눈에 밟히는 놈이 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확 밟아 버릴 놈이더만. 저거, 맹수요, 맹수.”

“알아. 그러니 시키지.”

“뭔……!”

남자는 울컥한 듯 뭐라 말하고 싶어 했지만, 가늘게 뜬 바텐더의 눈을 보고 꼬리를 말아야만 했다. 그래도 불만은 완전히 숨길 수가 없어 입술을 삐죽 하고 내밀었다.

“저치가 뭐하려는 줄 알고?”

“너는 대체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냐? 아니면 옹이 장식이냐? 어떻게 봐도 몰라?”

“응? 누구기에?”

바텐더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콧가에 걸린 수염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저 가면, 독식자가 아니냐.”

“……!”

남자의 눈이 커졌다.

독식자.

튜토리얼부터 초심자 구간까지, 탑을 한창 떠들썩하게 만들던 슈퍼 루키.

하지만 지금은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으로 소문이 확 묻혀 버린 사람이었다.

“뭔가를 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뒤를 밟아 봐. 요즘 환수들의 서식지들을 죄다 쓸고 다닌다는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정보들은 비싸잖아?”

* * *

연우는 도시 버락을 빠져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도시 외곽에서 대기 중이던 사귀들이 따라붙었다. 물건을 따로 맡겨 놨었는데, 생각보다 잘 지키고 있었다.

연우는 녀석들을 컬렉션으로 돌려보내고, 천천히 걸으면서 한참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했다.

‘우선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은…… 어떻게든 내가 개입할 만한 요소 거리를 만들어야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