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생명의 불꽃 (3)
하지만 당장 연우라는 존재는 저층 구간에서나 주목을 받거나, 루키로 각광을 받고 있을 뿐.
두 거대 클랜에게는 여전히 그저 그런 수많은 플레이어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
수천, 혹은 수만 명의 플레이어들이 난립하고, 수백 명의 랭커들이 뒤엉킬 전쟁터를 좌지우지할 만한 능력은 안 되는 것이다.
그래도 연우는 어떻게든 전쟁에 참여하고자 했다.
바깥에서 전쟁을 지켜보는 것과 안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테니까.
‘생각지도 못한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특히 바할과 리언트가 부딪친 이유가 가장 궁금했다.
아르티야의 해체 이후, 두 사람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직접적인 충돌을 벌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다행히 전쟁에 참전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바할을 찾아간다면.’
바할은 자신더러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무엇보다 바할은 이번 전쟁의 원인. 그리고 아르티야의 멤버이기도 하니 옆에 있으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연우는 곧 고개를 가로저어야만 했다.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한 짓이야. 바할의 옆에 있으면 언젠가 정체를 들킬 수밖에 없어.’
당장 쓰고 있는 가면부터 벗어 보라고 하면 위험해지니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뭐가 있을까.
‘용병이라면. 어떨까?’
큰 전쟁은 당연히 그만한 머릿수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었다. 다만, 연우가 용병에 참여할 만한 자격이 되냐는 것인데.
‘당장 나에게는 가장 좋은 방식이기는 해.’
실력 테스트를 하겠지만, 그 정도는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첩자를 가려내기 위해서 신원 조회도 확실하게 하려 할 텐데. 바할을 찾아가는 것보단 정도가 덜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위험하긴 해.’
결국 무엇이 되었든 간에 ‘신원 조회’라는 부분에서 자꾸만 발목이 잡혔다.
‘아니면.’
가면 아래, 연우의 두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그런 조회도 필요 없을 만큼 압도적인 명성을 얻던가.’
연우는 이 방식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두 곳이 알아서 초빙하는 형태로 찾아온다면, 일은 훨씬 순조롭 게 풀릴 테니까.
‘어떻게 명성을 쌓을 것인지는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전쟁이 당장 발발할 건 아니니까. 시련부터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난 뒤에 계획을 잡아도 늦지 않아.’
연우는 대략적인 방법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퀘스트 창을 허공에다 띄웠다.
생명의 불꽃을 만들기 위한 필요 목록은 이제 대부분 ‘완료’ 표시가 떠 있었다.
남은 건 딱 하나.
‘맨티코어의 심장.’
맨티코어는 날개 달린 사자의 형태에 독침 달린 꼬리를 가진 환수, 아니, 마수였다.
11층에서도 4대 신수를 제외하면 사실상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상위종이었다.
게다가 머물고 있는 터전은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던전.
내부에는 녀석을 따르는 수많은 마수들이 있어 돌파하기가 극도로 힘들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여러 클랜들도 맨티코어를 잡기 위해서는 50인 이상의 대규모 레이드 파티를 조직해서 도전할 정도였다.
연우는 그런 곳을 단신으로 돌파할 생각이었다. 사실상 11층의 시련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히든 피스였으니까.
‘다만, 지하 10층이나 되는 그 긴 던전을 어느 세월에 다 돌파하느냐가 관건이긴 한데.’
멘티코어의 던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빠졌다.
아니, 바빠지려고 했다.
뚝!
연우는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이제는 패시브 스킬이 되다시피 한 감각 강화. 덕분에 연우는 항상 일정 범위에 걸쳐서 인지 영역을 확실하게 구축하고 있었다.
넓게 퍼진 인지 영역 사이로 무언가 걸려들었다. 숲 너머에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이만하면 나오지?”
곧 수풀이 부스럭거리면서 30여 명의 플레이어들이 나타났다.
무기를 뽑고 살의를 잔뜩 드러낸 채.
“독식자, 맞나?”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낯이 익은 얼굴들이었다.
도시 버락을 가로지르던 베헤모스 클랜.
리더의 질문에 옆에 있던 플레이어가 인상착의가 그려진 종이와 연우를 비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착의를 보니 맞아. 독식자야.”
클랜원 중 몇몇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렀다.
말로만 듣던 독식자를 직접 마주하게 되었으니 신기했던 것이다.
녀석들의 얼굴에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 떼처럼 눈이 탐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연우가 싸늘한 어투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확인?”
“그래. 너도 최근에 11층 스테이지의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든 놈에 대해서 들어 알고 있겠지?”
연우는 비웃음이 나왔다.
무슨 의도로 자신의 뒤를 밟았는지 빤히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지. 우리는 네가 그 범인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그러니 조사하는 데 적극 협조를 해 줬으면 하는데.”
리더는 붉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살짝 훔쳤다.
그리고 신호에 맞춰서 플레이어들이 연우의 주변을 에워쌌다.
뜻대로 따라오지 않으면 강압적으로 나서겠다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조사를 해 보고 범인이 맞다 싶으면 재료들을 압수하고, 아니어도 독식자의 아티팩트를 강탈할 수 있으니.
녀석들로서는 무조건 남는 장사였다.
특히 10층까지 신기록을 주파하면서 달려왔으니, 어떤 보상을 가졌을지 궁금하기도 할 테고.
게다가 녀석들은 ‘감히 자신들을 건드릴 수 있겠냐는 자신감도 있어 보였다.
베헤모스의 뒤에 청화도가 앉아 있다는 건, 11층의 거주민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거대 클랜을 적으로 돌리는 멍청한 짓을 할 거라고 여기지는 못하는 거겠지.
그래서.
피식-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가면 사이로 비웃음을 흘렸다.
하는 짓이 너무 같잖아서.
베헤모스 클랜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웃어?”
“튜토리얼에서나 여기에서나. 남이 가진 것에 왜 이렇게 욕심이 많은 건지.”
연우는 어깨를 가볍게 풀며 허리춤에서 천천히 마장대검을 뽑았다.
“덤빌 거면 덤벼. 구질구질한 변명은 그만 붙이고.”
순간, 정곡이 찔린 리더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지만, 녀석은 곧 포악하게 웃었다.
“역시 너였나 보군. 여하튼 너 때문에 받았던 피해, 보상을 좀 받아야겠다.”
연우는 코웃음을 쳤다.
“할 수 있으면.”
“뭔……!”
리더는 연우가 무슨 자신감으로 저렇게 나서나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입언저리에서만 맴돌았다.
그리고 의식이 아래로 꺼졌다.
스걱-
푸우우!
갑자기 리더의 머리통이 목에서 분리되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 분수가 위로 치솟았다.
리더가 서 있던 자리로 유령이 나타났다.
잿빛 안개를 둘러싼 채 음침하게 웃는 사귀. 놀이었다.
키키킥!
“대장!”
“무, 뭐야, 이거!”
갑작스런 상황에 플레이어들이 놀라 쓰러진 리더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건 시작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있던 사이사이로 다른 아홉 마리의 사귀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이미 사귀들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피닉스의 둥지를 떠날 때보다도 더 강화된 상태.
하나하나가 이미 웬만한 플레이어쯤은 가볍게 찜 쪄 먹을 정도였다.
사귀들은 찢어지는 귀곡성을 흘리면서 베헤모스 클랜원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기 시작했다.
스걱, 스걱!
“끄아악!”
“젠장! 도망쳐!”
클랜원들은 칼을 휘둘러도 물리적 타격을 크게 입지 않는 사귀들을 보며 패닉 상태에 잠겼다.
팔다리가 찢어지면서 공포에 질린 절규가 숲을 가득 메웠다.
몇몇은 연우를 잡을 생각으로 앞으로 튀어 왔지만.
촤아악!
연우는 마장대검에다 흑기를 감아 그대로 휘둘렀다. 공간이 길게 찢어지면서 세 명이 그대로 쓸려 나갔다.
뚝.
피가 한 가득 뿌려지면서 바닥이 붉은색 웅덩이로 가득 찼다.
“너, 너, 너 우, 우리 뒤에 누, 누가 있는지 알고 이, 이딴…… 컥!”
바닥에 주저앉은 플레이어는 덜덜 떨면서 소리를 질러 댔다.
잔뜩 공포에 질렸는지 축축하게 젖은 바짓가랑이에서는 지린내가 났다.
청화도를 팔아서 어떻게든 살아 보고자 했지만.
“누가 안다는 거지?”
“무, 뭐?”
“어차피 여기서 전부 다 죽을 텐데 말이야.”
“……!”
연우의 칼은 거침이 없었다.
촤악-
철퍼덕.
“히이익!”
“제기라아알!”
결국 남은 녀석들은 정면에서 부딪쳐 봤자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쉽게 죽지 않는 유령을 부리는 괴물.
그들의 눈에 연우는 그렇게 비쳐졌다.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죽여. 그리고 영혼은 따로 챙겨 놓고.”
키키킥!
쿠륵, 쿠륵-
사귀들이 알겠다고 대답하면서 도망친 놈들의 뒤를 쫓아 숲 속으로 들어갔다.
공포에 질린 채로 죽은 영혼은 요긴하게 쓸 데가 많다. 특히 사귀를 강화시키는 용도로.
연우도 순보를 밟으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아아악!
사람 살려!
숲을 따라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아아악!
“시작했나 본데.”
“독식자를 잡으러 갔다는 놈들. 베헤모스 안에서도 한가락 하는 놈들 아니었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독식자가 세다는 뜻이겠지.”
“하긴…… 그 많은 보상들로 떡칠을 하는데 안 셀 수가 있겠냐마는.”
숲의 외곽을 따라 포진해 있던 클랜 연합들은 비명 소리를 듣고 얼굴을 잔뜩 굳혔다.
저 비명과 절규가 누구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베헤모스는 저층 구간과 중층 구간을 포함해 탑에서도 제법 유명한 중소 규모의 클랜이었다.
위압적인 성격 때문에 적도 많았지만, 그만큼 실력도 확실했다.
그리고 청화도의 산하 단체가 되고 난 뒤부터는 타 클랜들도 웬만해서는 척을 지지 않으려는 편이었다.
베헤모스와 충돌했다가는 자칫 청화도와도 적대 관계에 놓일 수 있었으니까.
청화도는 그만큼 자신들의 위신과 체면을 중요시 여겼다.
그래서 처음 베헤모스가 앞장서서 독식자를 상대한다고 했을 때, 다른 클랜들은 여기에 대해서 항의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충돌을 해 봤자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헤모스를 단신으로 격파한다고?’
‘미친! 청화도와 척을 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겠다는 거잖아?’’
그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봤다.
별빛 술집에서 싹쓸이의 주범이 누군지 알려 주고 위치까지 밝혀 왔을 때.
도시 버락에 머물고 있던 클랜들은 하나같이 연우를 쫓을 준비를 했다.
그만큼 연우 때문에 그들이 받은 피해가 어마어마했으니까.
특히 큰 전쟁을 코앞에 둔 그들로서는 자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태였다.
그래서 연합을 맺었고, 연우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혹시 잘못된 선택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당시에는 아무리 독식자가 대단하다고 해도, 이 많은 숫자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렇게 쉽게 생각할 사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섣불리 이 자리를 떠나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탑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약하더라도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만용과 용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서 생기는 결과도 그들의 책임이었다.
“그래도 놈은 한 명.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머릿수는 어떻게 감당할 수 없을 거요. 다 같이 포위망을 촘촘하게 구축하고 한 곳으로 몰아넣읍시다. 갇혀 버리면 제깟 놈이라도 어쩔 수 없겠지.”
한 명이 내뱉은 제안에 다른 클랜 수장들의 눈가가 빛났다.
어쩌면 연우를 다른 쪽으로 몰아 그쪽 클랜들과 부딪치게 하고, 자신들은 뒤를 쳐서 어부지리를 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미 연우를 잡아 생긴 전리품에 대해서는, 그를 죽인 클랜이 독차지하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다.
그렇게.
그들은 포위망을 갖추면서 천천히 숲 속으로 들어갔다.
츠츠츠-
그때, 숲을 따라 잿빛 안개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