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생명의 불꽃 (4)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원래 이런 곳이 아닐 텐데……?”
성웅 클랜의 리더, 백은 숲을 따라 감도는 잿빛 안개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잿빛 안개는 마치 맑은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나무 사이사이로 퍼져 나가 시야를 뿌옇게 가리고 있었다.
이래서는 집단으로 뭉쳐서 길을 뚫는다고 해도,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아서 작전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보이는 거리는 3미터 남짓.
게다가 잿빛 안개에는 뭐라도 담겨 있는지 주변으로 확장된 감각도 무디게 만들었다.
이러다 갑자기 뭐가 확 하고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안 되겠다. 이대로는 정말 각개격파라도 당하겠어. 일단 한데 뭉쳐!”
현재 클랜 연합은 횡대로 길게 늘어서 숲을 관통하면서 연우를 수색하는 방식을 택했다.
클랜원들을 한 지점으로 모은다면 포위망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백은 자신과 클랜원들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성웅 클랜은 백의 지시에 따라 한곳으로 뭉쳤다.
“뭐야? 이게 다야? 왜 이거밖에 없어?”
모인 클랜원은 모두 31명. 원래 60여 명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절반이 보이지 않는 셈이었다.
클랜원들은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동료들이 보이지 않자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음침한 잿빛 안개며 방금 전까지 들리던 비명 소리까지.
칼을 쥔 손에 식은땀이 잔뜩 냈다.
귀신에게 홀린 듯한 느낌.
이대로 있다가는 사라진 놈들처럼 자신들도 같이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클랜원들은 서로 흘깃 눈치를 봤다.
본능이 자꾸만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를 해 대고 있었다.
“대장, 아무래도 이거 좀 다시 생각해 볼……!”
결국 한 명이 대표로 나서서 백을 설득하려 하는 그때.
“서, 성웅 클랜장!”
갑자기 뿌연 안개를 뚫고 누군가가 울면서 뛰쳐나왔다.
클랜원들은 반사적으로 검집에 손을 가져가다가,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연우를 잡으러 갔던 베헤모스 클랜의 부클랜장.
오만한 성격 때문에 다른 클랜장들이 아주 싫어했었는데.
그는 자신만만하게 떠날 때와 다르게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호흡도 거칠었다.
“당신들이 왜 여기에……! 아, 아니. 서둘러 이곳을 나가야 하오! 어서! 빨리!”
베헤모스의 부클랜장은 뒤를 힐끔힐끔 훔쳐보면서 다급하게 백을 채근했다.
마치 뭔가에 급하게 쫓기는 사람 같았다.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런 생각에 백은 일단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일단 숨 좀 돌리시고. 돌아갈 때 돌아가더라도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귀, 귀신이 쪼, 쫓아오고 있소! 노, 놈들이 우, 우리들을 찢어 죽이고 여기도 주, 죽일 거요! 빨리! 빨리 도망쳐야 한단 말이오!”
부클랜장은 횡설수설하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백이 인상을 좁혔다.
“귀신? 레이스나 밴쉬 같은, 그런 몬스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그런 것과는 다, 다른……! 에이이! 나오시오!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
부클랜장은 백을 뿌리치고 다시 바깥쪽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백이 그를 붙잡기 위해 손을 내뻗는데, 갑자기 부클랜장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백은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말하려다, 수하들도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 채 뭔가를 가리키면서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패닉 상태에 잠긴 그들의 입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뒤?’
백이 재빨리 고개를 뒤로 돌린 순간.
크아앙!
갑자기 큼지막한 뭔가가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백과 부클랜장을 와그작 씹어 먹었다.
강제로 뜯긴 하체가 힘없이 쓰러졌다.
“으, 으아악!”
“괴물이다!”
성웅 클랜의 플레어이들은 리더와 베헤모스의 실력자를 단번에 먹어 치운 사귀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1미터 80센티미터는 훌쩍 넘는 덩치. 포악한 주둥이. 잿빛으로 둘러싸여 정확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지만, 짐승의 눈을 가진 괴상한 유령이었다.
사귀. 카가 포효했다.
쿠어어엉!
살아생전 불카로서 가졌던 포악한 성격과 귀곡성이 뒤섞이자, 숲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쿠쿠쿵-
카는 지축을 거세게 뒤흔들면서 다음 먹잇감을 향해 와락 달려들었다.
그리고.
숲속 전반 곳곳에서 이와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쾅!
* * *
츠츠츠-
잿빛 안개로 둘러싸인 숲의 상공을 따라 사귀가 두둥실 떠돌아 다녔다.
키키킥! 키킥!
부두술사의 영혼, 부는 아래를 굽어보면서 기괴한 소리를 냈다.
어떻게 들으면 웃음소리 같기도, 또 어떻게 들으면 구슬픈 바람 소리 같기도 한 귀곡성.
그만큼 부는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재미있어서 죽을 것 같았다. 이미 죽은 몸이긴 했지만.
손이 가볍게 허공을 짚을 때마다, 숲에서는 잿빛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난다.
그럴 때면 대부분 인간들의 반응은 두 가지 중에 하나였다.
공포에 질려 자지러지거나, 악에 받쳐 소리를 꽥 지르거나.
사실 잿빛 안개에는 몇 가지 기능이 숨겨져 있었다.
먼저 플레이어의 감각을 아주 무디게 만든다. 시야를 차단하고, 청각과 후각을 비롯한 여러 감각에 혼선을 일으킨다.
아주 사소한 디버프 계통의 저주였지만, 이것만으로도 효과는 아주 컸다.
워낙에 광범위적인 영역에 걸쳐서, 다수의 인물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집단 행동에 상당한 애로 사항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자신들의 정확한 위치를 헷갈려 하고, 바로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사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게다가 시야가 차단되다시피 해서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주고, 음산한 에너지를 흘리면서 자연스레 공포스런 분위기를 연출시켰다.
그러다 보면 아주 약간이나마 든 공포심이 점점 마음과 정신을 좀먹을 수밖에 없게 되니.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분위기는 점점 옆 사람에게로 번지다가, 곧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크게 불어나 집단을 통째로 집어삼키게 된다.
집단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부는 상공에서 그런 광경을 숱하게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을 보면서 도저히 비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렇게 나약하기 짝이 없고, 멍청하기 그지없는 놈들이. 감히 주인님을 죽이러 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부에게 있어 연우라는 존재는 신처럼 절대적으로 떠받들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아니, 그런 존재였다.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던 망자의 굴레 속에서. 억겁처럼 느껴지던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구해 주신 고마우신 분.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물리적인 실체를 만들어 주고, 힘까지 쥐게 해 주신 분이었다.
아주 작게나마 ‘이성’이라는 게 생겨났을 때부터 부는 연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망자의 구슬을 먹어 계속 이성이 강화될 때마다 충성심은 더 깊어졌다.
아마 그건 다른 사귀들도 같은 생각일 터.
그렇기에.
부는 감히 주인님을 해하러 온 저놈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놈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을 욕보이러 온 더러운 종자들이었으니까.
녀석들이 주인님에게 직접 해악을 끼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놈들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했다.
아니, 죽어서도 망령으로 만들어 고통스러운 억겁의 굴레 속에 가둬야만 했다.
그래서 부는 전력을 다해 잿빛 안개를 더 크게 흩뿌렸다.
그럴수록 곳곳에서 인간들의 비명소리는 커져만 갔고, 다른 사귀들의 사기는 점점 올라갔다.
녀석들의 공포와 비명은 그에게 있어 유희이자, 아주 즐거운 오락거리였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이 놈들이 다 처리하고 난다면, 마음이 넓으신 주인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망자의 구슬을 하사하실 게 분명하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지금도 강해졌는데,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있다면.
그때는 또 어떤 유희를 즐길 수 있을지.
또한.
주인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너는 곧 ‘리치’라는 생명체가 되어 앞으로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주인님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다니. 더 큰 유희도 같이 즐길 수 있다니.
없는 심장이 다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주…… 인님…… 의 적은… 파멸로……!」
드문드문 남아 있는 생전 속 기억을 따라, 부는 자신의 외침을 크게 외쳤다.
츠츠츠-
* * *
“뒈져 버렷!”
놀은 하체를 쓸어 오는 두 개의 칼날을 피해 허공으로 높이 도약했다.
자이언트 놀의 영혼답게, 크기도 사귀 중에서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건만.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날렵하기도 가장 날렵했다.
2미터도 훨씬 넘는 사귀가 제비 돌기를 하고, 밑으로 착지하면서 거세게 손톱을 휘두르는 장면은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촤아악!
네 개의 손날이 스쳐 지나간 곳으로, 다섯 등분으로 잘게 쪼개진 사체 조각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웬만한 몬스터나 마수의 공격에도 끄떡없다고 자랑하던 방패도. 방어구도. 흑기로 단단히 뭉친 사귀의 예리한 손톱을 막을 수가 없었다.
“미쳤……!”
그것을 보고 경악하던 다른 플레이어는 튀어 오른 흑기의 파편에 미간이 관통당해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영혼이 사체를 벗어나려 한다.
놀은 영혼이 완전히 달아나기 전에 아가리를 쩍 벌려 그것을 꿀꺽 집어삼켰다.
영혼과 유령은 망령으로 타락시킨다. 그렇게 해야만 주인이 좋은 먹잇감을 그들에게 나눠 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번 영혼은 제법 질이 좋은지 맛이 괜찮았다.
크어엉! 놀은 기분이 좋아 하늘에다 대고 크게 포효했다.
망령의 구슬을 흡수하면서 영혼의 격이 나날이 높아짐에 따라 살아생전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본능도 저절로 깨어나면서 이런 퍼포먼스도 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포효를 들은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놀에게 달려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물러섰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건 괴물이었다.
칼을 쑤셔 넣으면 허공에 휘두른 것처럼 흩어져 버리고, 마법을 뿌리면 재빨리 피해서 달아나는 녀석이었다.
어떻게 궁지로 몰아 죽이려고 해도,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시 힘을 되찾아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 때에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날렵하고, 매섭고, 포악하다.
그들쯤은 너무 쉽게 찢어 버리고, 씹어 먹을 정도로 강했다.
11층에서 머물며 숱한 마수들을 상대해 봤다지만, 이런 녀석이 있다는 말은 도무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눈가에 자꾸 아른거리는 잿빛 안개는 그들의 심력마저 좀 먹어 갔으니.
정신을 차렸을 때쯤에는 단 세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이 숲에 자신들 말고 남아 있는 자는 없다는 것을.
계속 간간이 이어지던 비명 소리도 언제부턴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으으…….”
“제기랄……! 대체 왜 이딴 꼴을 당해야……!”
세 플레이어들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눈물과 콧물을 있는 대로 질질 짰다.
이미 바짓가랑이에서는 지린내가 풀풀 날렸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미 주변에 자욱하게 깔린 잿빛 안개는 쇠창살보다 더한 감옥으로 보였다.
아니, 무저갱이었다.
저 너머에 뭐가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그저 세 명은 서로 어깨를 맞댄 채,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위기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바로 그때.
뚜벅.
뚜벅.
무겁게 깔린 적막 사이로 발자국 소리가 무겁게 들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안개 사이로 강렬한 두 개의 도깨비불이 맺혔다. 커지는 발자국 소리에 따라 도깨비불도 덩달아 커지면서 점차 이곳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흐릿한 검은색 형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이윽고 사람이 되어 그들 앞에 섰다.
검은 가면을 푹 눌러쓴 채, 강렬한 안광을 피워 댔다.
연우는 무심한 눈길로 그들 앞에 섰다.
한 손에 쥔 마장대검에서는 피가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곳까지 직선으로 이동하면서 아직까지 겨우 숨이 붙어 있던 플레이어들의 명줄을 마저 끊으면서 묻었던 핏물이다.
세 플레이어는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쉴 새 없이 요동치는 눈동자는 연우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겁에 잔뜩 질린 눈빛이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러다 한 녀석이 겨우 입을 뗐다.
너무 가라앉아서 목소리가 칙칙했다.
“대,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연우는 녀석들에게 다가가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말이지?”
“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이,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할 피, 필요는 어, 없잖아!”
그들은 하루 사이에 친구는 물론, 동료까지 모두 잃어버린 셈이었다.
아니, 그 정도도 넘어섰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던 라이벌 클랜들까지 모두 잃어버린 셈이었으니.
아마 당분간 11층 스테이지는 주요 클랜들의 상실로 힘의 공백이 심할 게 분명했다.
이게 전부 한 사람이 저지른 일이었다.
단 한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는 플레이어들을 단번에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하지만.
“헛소리를 잘도 해 대는군.”
“뭔……!”
촤악!
허공에다 가볍게 내그은 칼질에 발악을 해 대던 플레이어의 머리통이 부서졌다.
단 둘만 남은 플레이어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녀석들은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삶의 의지나 마지막 희망 따윈 버린 지 오래였다.
여기서 살아날 수 있는 방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놈들을 보면서.
연우는 악마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살고 싶은 놈, 있나? 딱 한 명만 기회를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