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생명의 불꽃 (5)
그 말은.
남은 두 사람에게 마른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다가왔다.
“저흰 같……!”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으니 제발 기회를! 기회를 한 번만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명이 제대로 입을 떼기도 전에, 다른 한 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입을 제대로 열지 못했던 녀석은 두 눈을 부릅뜨면서 다른 한 명을 바라봤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은 친구였다. 둘도 없을.
그래서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친구는 그런 자신의 바람을 너무 쉽게 꺾어 버렸다. 미안하다는 눈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생각이었다.
퍼억!
연우는 앉아 있던 녀석을 해치우고 마장대검에 묻어 있던 핏물을 가볍게 털었다.
날을 허리춤에 도로 꽂아 넣으면서 서 있는 녀석을 돌아봤다.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했지?”
“그, 그렇습니다. 그러니 부, 부디 목숨만은…… 제게는 자식이 있……!”
연우는 손을 뻗어 녀석의 말을 도중에 막았다.
사연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퍼진 사연을 모두 듣다 보면 탑에서 독한 마음을 먹지도 못할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을 귀띔해 준 놈들 있지? 그놈들한테 전해. 한 번만 더 이딴 일이 벌어진다면 그땐 정말 다 쓸어버릴 거라고.”
녀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 게…… 끝입니까?”
“왜? 더 필요하나?”
“아, 아닙니다! 놈들에게 똑바로 전달, 아니, 경고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녀석은 혹여 연우의 말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부리나케 반대 방향으로 줄행랑을 쳤다.
스륵-
그때, 연우의 머리 위로 놀이 어스름하게 나타났다.
“쫓아.”
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자취를 감췄다.
이제부터 놀은 녀석의 뒤를 쫓으면서 정보를 퍼뜨린 놈들을 노릴 것이다.
녀석이 꼬리를 만나면 그 꼬리를 쫓고, 다른 꼬리가 나타나면 또 다른 꼬리를 쫓아 몸통이 있는 곳까지 다다라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애초 연우는 자신을 건드리거나, 이용하려는 놈들을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나타나면 나타나는 대로 잘라 내고, 뿌리까지 도려내야 뒤에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자신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귀의 힘도 그만큼 줄어드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만큼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해지니까. 힘도 부족하지 않을 테지.’
이미 그 정도는 염두에 두고 미리 강화를 시켜 둔 상태였다.
연우는 주변을 쓱 훑어봤다.
어느새 잿빛 안개가 걷혀 숲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숲은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다.
곳곳에 부러진 나무들이며, 탄 자국이 가득했다.
널브러진 시체들은 하나 같이 기괴한 모양으로 팔다리가 꺾이거나 목이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시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공포에 잔뜩 질린 얼굴.
잔뜩 일그러진 눈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 있기까지 했다.
숲을 누비는 내내 몇 번이고 봤던 모습.
처음부터 마지막 녀석까지, 놈들의 모습은 똑같았다.
“많이도 달라붙었었군.”
연우는 손을 뻗어 검은 팔찌로 죽은 플레이어들의 영혼을 모두 수거하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382명.
방금 전 그와 사귀들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숫자였다.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이었다.
부가 잿빛 안개를 가득 뿌리면서 클랜 연합을 갈가리 조각내고, 카와 놀 등이 불쑥 나타나면서 놈들을 먹어 치운다.
그리고 연우는 조용히 뒤를 따르면서 남은 놈들을 정리했다.
단순한 작전이었지만, 그만큼 아주 효과적이었다.
녀석들은 공포감에 질려 미쳐 가다가 스스로 자멸해 버렸으니까.
‘학살’이라는 단어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문제점이 있다면.
‘별 감흥이 들지 않아.’
이렇게 많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연우는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저주를 퍼부으면서 죽은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는 말.
하지만 그 말은.
‘아프리카에서도 숱하게 들었던 말이기도 하지.’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느낌.
먼저 덤빈 저쪽에 죄가 있으니 그것을 제대로 갚았을 뿐이라고 여기는 게 전부였다.
탑의 플레이어가 되면서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진 걸까. 아니면 애초 자신은 이런 사람이었던 걸까.
사실 ‘카인’이라는 코드네임이 붙었던 것도 이런 성향 때문이었다.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연우는 수집한 영혼들을 모두 망령의 구슬로 바꿔서 사귀들에게 나눠 주고, 손을 털었다.
‘딱히 여기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을 숱하게 겪을 테니까.’
부나방에 불과한 것들을 계속 갖고 있어 봤자 재수만 없었다.
‘아니. 앞으로는 더 많이 꼬이려나?’
연우는 혀를 가볍게 차면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놈들을 상대하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빨리 남은 재료를 구하러 가야 했다.
* * *
“왜 이렇게 소식이 없지?”
도시 버락에 위치한 별빛 술집.
바텐더는 마른 행주로 닦던 컵을 선반에 내려놓으면서 눈살을 좁혔다.
도시에 위치한 여러 클랜들에게 소식을 넣은 게 불과 몇 시간 전.
버락에는 현재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 준비로 여러 클랜들이 모여 있었고, 독식자에 대한 정보는 아주 비싸게 팔렸다.
그리고 클랜들은 독식자를 사냥하기 위한 단체 사냥조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정보료를 지불할 여력이 되지 못한 소규모 클랜들은 사냥이 끝난 뒤, 배정 받은 전리품 중 일부를 별빛 술집에 나눠 주기로 약속했으니.
이번 사냥은 여러 모로 11층의 별빛 술집에게도, 정보 주체가 된 바텐더에게도 아주 중요한 거래였다.
‘사냥이 실패한다고 해도, 독식자가 얼마나 강한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기회다. 이런 정보도 아주 비싸게 팔리기 마련이지.’
이러나저러나 바텐더로서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과가 더 궁금했다.
바로 그때.
쾅!
갑자기 별빛 술집의 문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바텐더는 그것만 보고도 결과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실패했나 보군.’
성공했다면 느긋하게 거들먹거리면서 들어왔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고 들어온 녀석은 연합에 소속되었던 랑테 클랜의 리더, 슘이었다.
녀석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몰골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텐더를 노려보는 눈길에서는 분노마저 느껴졌다.
“너 이 새……!”
바텐더는 슘의 말을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테이블 앞에서 대기 중이던 거구 다섯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끄러운 놈들을 처리할 때 쓰기 위해 배치해 둔 처리조였다.
슘도 바텐더의 생각을 읽고 낯빛이 굳어졌다. 그리고 도망치기 위해 뒤쪽을 보던 그때.
츠츠츠.
별안간 슘의 머리 위로 놀이 나타났다.
처음 보는 사귀의 등장에 바텐더와 처리조가 인상을 굳혔고, 연우의 생각을 읽은 슘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사이 놀을 따라 풍겨 나온 흑기에 원격으로 지정된 화기 스킬이 더해져 버렸고.
곧 일어난 폭발에 녀석이 지른 비명은 금세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콰아앙-
슘이 일으킨 폭발은 단숨에 바텐더 등을 깡그리 밀어 버릴 뿐만 아니라, 일대 건물 십여 채를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
그리고.
도시 버락은 갑작스런 테러 사태에 혼란에 잠기고 말았다.
* * *
연우가 다시 피닉스의 등지로 돌아온 건 사흘 가량이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생각보다 조금 오래 걸렸구나.』
피닉스는 조금 지쳐 보이는 연우를 보면서 의외라는 말투로 말했다.
연우는 쓰게 웃었다.
“귀찮게 구는 놈들이 좀 많았습니다.”
『뭔 일이 있었나 보군.』
연우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랜 연합을 전멸시킨 후, 11층 거주민들의 연우에 대한 경계심은 더 커졌다.
그리고 피해를 입은 몇몇 클랜에서는 현상금을 걸고, 추적조까지 편성해 뒤쫓을 정도였다.
덕분에 연우는 조용히 다니면서도, 귀찮은 꼬리들을 여러 번 정리해야만 했다.
‘덕분에 사귀들만 포식했지만.’
11층 스테이지 내에 독식자에 대한 악명이 자자하게 퍼진 건 덤이었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맨티코어, 생각보다 강하더군요. 더구나 ‘무리’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랬군. 확실히 맨티코어는 무리 생활을 한다는 점이 조금 골치이긴 하지. 나도 잠시 잊고 있었어.』
꼬리들을 뿌리치고 난 뒤에 입장한 던전에서도, 골머리를 썩긴 마찬가지였다.
지하 10층까지 돌파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많이 귀찮기는 해도, 연우는 이미 저층 구간 플레이어들의 실력은 훨씬 뛰어넘은 데다가, 사귀들도 끊임없이 강화되어 마수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연우를 골치 아프게 한 점은 맨티코어가 집단생활을 한다는 점이었다.
수컷 맨티코어가 암컷 20여 마리를 거느리고, 그 아래로 100마리도 훨씬 넘는 새끼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가뜩이나 한 마리만 하더라도 상위종으로 분류되는 녀석들이 떼거지로 뭉쳐 있으니.
문제는 동생도 일기장에 여기에 대해 ‘몇 마리와 같이 살고 있다’고만 서술해 놨을 뿐.
자세하게 적어 놓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니면 그사이에 그만큼 무리를 크게 불렸거나.’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혼자서 많은 맨티코어들을 사냥하는 건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었지. 아니, 오히려 득이 더 컸어.’
연우는 튜토리얼을 통과하고 11층까지 오르면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어 고민하던 중이었다.
특히 칠흑왕의 절망과 아이기스를 얻으면서 전력이 대폭적으로 상승한 뒤에는 더더욱.
‘그동안 훈련을 꾸준히 했다지만, 그건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사귀들을 가득 뿌려 암컷과 새끼들을 상대하게 하고, 그는 비그리드와 아이기스를 꺼내 전력으로 수컷 맨티코어와 충돌했다.
10마리의 사귀 중 6마리가 찢어지고, 비그리드가 꽤 많이 훼손되었다. 아이기스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머리에 막대한 두통이 가해지기도 했다.
곳곳에 흩날린 풍압과 불똥 때문에 던전은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연우는 속이 탁 트이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자신이 이제야 제대로 된 힘을 손에 쥐었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수리해야 할 아티팩트들이 꽤 많아졌지만.’
연우는 조만간에 다시 모루와 망치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마안을 이용하면 제작은 힘들어도, 수리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사귀들의 능력치도 대폭 향상했고.’
사실상 가장 큰 이득은 사귀들의 강화가 아닐까 싶었다.
비록 절반 이상이 부서졌지만, 남은 녀석들은 그만큼 강해질 수 있었으니.
던전을 통과하면서 막대한 양의 영혼을 삼켰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맨티코어의 유령들까지 먹어 치웠다.
덕분에 부, 카, 놀은 이미 사귀가 닿을 수 있는 최대 능력치까지 성장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별 존재감도 없던 녀석들이, 이제는 2미터나 되는 크기로 커져서 잿빛 안개를 잔뜩 몰고 다닐 때면 연우도 한 번씩 섬뜩해질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히 얻고 싶은 것들은 다 얻은 것처럼 보이는구나.』
“이곳에 와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피닉스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연우의 말에 기분이 많이 좋아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예.”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행낭을 바닥에다 내려놓았다.
그러자 행낭이 알아서 스르르 풀리더니, 안에 있던 물건들이 허공 위로 둥실 떠올랐다.
『후후. 재료들도 전부 질 좋은 것들로만 엄선해서 모았군. 이런 면에서 보자면 그대는 참 꼼꼼한 것 같단 말이지.』
[히든 퀘스트(생명의 불꽃)을 달성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피닉스의 환심’을 획득했습니다.]
[피닉스와의 친화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짹짹이가 여기에 반응해 크게 기뻐합니다.]
[화 속성에 대한 친화도가 30만큼 상승했습니다.]
[풍 속성에 대한 친화도가 30만큼 상승했습니다.]
[신수와 이뤄진 계약의 효과가 더 강해집니다. 앞으로 마수를 포함한 모든 환수들의 경계심이 옅어지고, 친화도가 상승합니다.]
……
[피닉스가 ‘생명의 불꽃’의 제작을 시작합니다.]
화르륵-
허공에 떠 있던 물건들 위로 하얀색 불꽃이 타올랐다.
피닉스를 구성하는 불꽃, 성화(聖火).
성화는 성스러운 느낌을 가득 풍기면서 공양된 여러 물건들을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리고 하나둘씩 한쪽 지점으로 뭉치면서 사람 크기만큼 높게 타올랐다.
화아아!
[‘생명의 불꽃(상급)’이 완성되었습니다. 피닉스가 자신의 영혼을 일부 옮겨 담아 불꽃은 더 찬란한 빛을 품기 시작합니다.]
[보상으로 ‘생명의 불꽃(상급)’을 획득했습니다.]
『어떤가? 간만에 제법 힘을 좀 써 봤는데.』
피닉스의 살짝 우쭐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연우는 이렇다 할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생명의 불꽃을 바라봤다.
생명의 불꽃은 여러 색을 뿌려 대고 있었다.
어떨 때는 찬란한 금색으로, 어떨 때는 선홍빛으로, 푸른 바다색으로, 하늘색으로, 검은색으로, 다양하게 반짝였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저절로 개운해졌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동안 여러 사건과 차후 계획으로 복잡하게 헝클어진 머리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또한, 저 기억 밑바닥에 묻어 뒀던 따뜻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따스했던 시절의 기억들.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웃을 수 있었던 순간들의 기억들이……. 추억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리고.
그런 모든 추억 속에는 항상 동생이 앉아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자신과는 다르게 웃음이 많고 남을 잘 배려할 줄도 알았던 동생이.
“…….”
연우는 그렇게 한참 동안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다, 뒤늦게 상태를 깨닫고 몸을 반대로 돌려 눈가를 훔쳤다.
대체 언제 흘린 건지.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인 것 같습니다.”
『추태는 무슨. 얼음처럼 보이던 그대도 실은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는데.』
피닉스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태껏 보였던 근엄 어린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성화는 생(生)을 상징하지. 그리고 무릇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도 삶을 지탱케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지난 추억이 아니겠나. 추억이 겹겹이 쌓여 생을 이룬다고 봐도 무방하지.』
말을 잇는 피닉스의 목소리에는 정겨운 느낌마저 감돌았다.
『그대가 무엇을 보았는지 나는 알 수 없어. 하지만 그 추억이 자네를 여태 지탱케 하였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만들 것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지. 그러니 앞으로도 그 추억, 잘 간직하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내 자식과 연결된 인간인데, 어찌 그냥 보낼 수 있을까?』
그때, 둥지 한쪽에 보관되어 있던 환수의 알이 둥실 떠오르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짹짹이가 날갯짓을 하면서 다급하게 달려왔다.
짹! 짹!
『그대가 없는 동안 막내가 자네의 알과 많이 친해졌었어. 그런데 이제 헤어질 때가 된 걸 알고 서운해 하는군그래.』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을 놓치지 않으려 날개를 파닥거리는 짹짹이가 너무 귀여웠다.
그러면서 짹짹이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연우도 그동안 자신의 알과 짹짹이가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자신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런 걸까.
짹짹이는 자신이 수련을 하는 동안에도 줄곧 자기 형제들보다는 알에 바싹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짹짹이에게서 친구를 빼앗는 것 같아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짹짹이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11층을 통과한 뒤에도 자주 찾아와야겠는데.’
연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화아아-
생명의 불꽃이 수십 가지로 분리되더니, 하나둘씩 알 쪽으로 스며들었다.
불꽃을 하나씩 흡수할수록 알도 조금씩 성장했다. 크기가 무럭무럭 커졌고, 표면에 박힌 무늬도 점차 또렷한 색을 드러냈다.
연우도 알과의 연결 고리가 계속 뚜렷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튼튼해지고, 굵어졌다. 알 속에서 크게 기뻐하는 환수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것은 자그마한 쾌감이기도 했다.
마치 분신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 같은 쾌감.
그리고 모든 불꽃을 받아들였을 때쯤에는 연우보다도 훨씬 커져 2미터나 되어 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렇게 커지는 경우는 잘 없는데. 혹시 환룡의 계통인가……?』
피닉스의 자그마한 중얼거림과 함께.
알은 희뿌연 광채에 휩싸였다.
안에 있는 환수도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스르르-
알을 감싸던 광채가 가라앉으면서 조용히 껍질 쪽으로 사그라졌다.
크게 요동치던 알도 다시 가만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뭐지?”
『……뭐지, 이건?』
연우와 피닉스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똑같이 중얼거렸다.
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