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생명의 불꽃 (6)
연우와 피닉스는 한참 동안 알을 쳐다봤다. 새끼 환수가 뒤늦게라도 알을 깨고 나올까 싶어서.
하지만 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연우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짹짹이는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던지 알에 찰싹 달라붙어 기분 좋게 울어 대고 있는 중이었다.
짹! 짹!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야. 부화를 할 것처럼 굴더니 왜 안 깨어나는 거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아니. 그건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진즉에 알았겠지.』
피닉스의 말 속에는 조금 언짢아하는 기색도 느껴졌다.
그가 연우에게 내준 성화는 피닉스 자신의 영혼 중 일부이기도 했다. 달리 보면 그를 모욕하는 말이 될 수도 있었다.
연우도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어차피 인간과 환수는 종이 다르니까. 보는 관점도 다를 수밖에 없지.』
피닉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다시 알 쪽으로 집중했다.
『다만, 조금, 아니, 많은 구석이 이상해. 분명 알 속에 있는 녀석은 다 자란 게 확실한데. 왜 나오질 않는 거지?』
연우도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어떻게 의견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일기장에 적혀 있는 건 원하는 속성의 환수를 태어나게 할 방법뿐. 다른 건 전혀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일단은 더 차분하게 시간을 두고 관찰하도록 하지. 안에 든 녀석이 언제 생각이 바뀌어서 나올지 모르니까.』
연우는 피닉스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 * *
그 뒤로, 연우는 11층의 스테이지를 몇 번씩이나 쏘다녀야만 했다.
혹시 알이 부화하지 않은 이유가 생명의 불꽃이 부족해서가 아니겠냐는 피닉스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처럼 상급 성화는 주지 못하더라도, 평범한 성화를 피우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니 수고스럽더라도 조금만 더 고생해 보아라.』
생명의 불꽃을 전달받는 데에 필요한 재료를 조달하느라 고생을 해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가뜩이나 연우가 싹쓸이를 하면서 부족해졌던 히든 피스들이 더 희소해져 곳곳에서 아우성이었지만.
연우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생명의 불꽃을 흡수할수록 알도 계속 크기를 더해 어느덧 3미터까지 다다랐다.
3미터.
말이 3미터지, 크기만 따진다면 무려 아파트 한 층 높이였다.
게다가 그 속에 새끼 환수가 웅크리고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깨어났을 때 크기가 얼마나 클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미쳤어.”
『……돌겠군. 허어!』
연우와 피닉스는 끝도 없이 커지기만 하는 알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새끼가 이만큼 성장해서 태어난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정말 내 불꽃을 전부 빨아들이기라도 할 셈인가?』
피닉스는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작게 투덜거렸다.
물론, 그가 불꽃을 나눠 준다고 해도 정말로 모두 사라질 만큼 줄어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허탈한 건 사실이었다.
짹! 짹!
게다가 짹짹이는 알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 좋다는 듯이 크게 지저귀었으니.
마치 ‘엄마! 엄마! 봐봐! 내 친구 이만큼 크다!’ 하고 자랑하는 꼬마 아이처럼 보였다.
연우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계속 생명의 불꽃을 불어 넣는 것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밖에는 안 되는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문제지?’
알과의 연결 고리는 계속 튼튼해지는 중이었다. 녀석은 무럭무럭 자라면서 감정과 지능도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문제는 기뻐한다는 감정만 전달 될 뿐,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마치 연우로부터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를 경계해서가 아니라, 그와 장난을 치고 싶어서 그러는 중이었다.
‘장난 때문에 알에서 깨어나질 않는다고?’
하지만 또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환수는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어렵고 복잡한 존재였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암초를 만난 셈이었다.
‘이대로라면 계속 11층에 묶이게 될 텐데.’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첫 전장이 11층이 될 확률이 높다지만, 확실하게 결정이 난 건 아니었다.
전쟁이란 수많은 변수가 도사리는 정글 같은 녀석이니까.
‘아니, 11층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그 전에 시련은 끝내 놔야 해. 시련을 마치고 마치지 않고의 차이는 너무 커.’
연우의 고심이 커질 무렵이었다.
같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피닉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깨어나지 않는다는 건, 이 이유밖에 없는 것 같군.』
연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뭔가 짚이는 게 있으십니까?”
『계기.』
연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계기?
『그래. 계기. 무릇 환수는 꿈을 먹으며 사는 존재들이다. 꿈에서 태어나고, 꿈을 좇으며 살아가지. 그리고 꿈이 없는 곳에서는 태어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연우는 뭔가 짚이는 바가 있었다. 가면 아래로 비치는 두 눈이 살짝 굳어졌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주 사소하더라도 꿈을 갖고 있기 마련이지. 추억이 삶을 지탱하는 받침대라면, 꿈은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니까.』
연우는 동굴에 깔린 어둠 너머로, 피닉스가 고요한 눈길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대에게는, 혹 꿈이란 게 없는 게 아닌가?』
“…….”
피닉스는 대답 없는 연우를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맞나 보군.』
연우는 둔탁한 뭔가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쓰게 웃고 말았다.
‘꿈이라.’
피닉스가 추론한 대로 그에게는 꿈이란 게 없었으니까.
있다면 딱 하나. 복수뿐.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다. 목적이었다. 하고 싶은 희망인 꿈과는 전혀 달랐다.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들이 흔히 가지는 ‘강해지고 싶다’나 ‘신이 되고 싶다’는 꿈도 연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강해지고자 하는 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신이 되고 싶은 마음 따윈 추호도 없었다. 신이 되면 뭐가 좋은지 고민해 본 적도 없었다.
사실 그에게 꿈은 별 필요 없는 자질구레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했다.
그랬는데.
‘그게 방해가 되었다고?’
연우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난관에 부딪친 것 같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이딴 시련을 계획한 게 누군지는 몰라도 그를 향한 욕지기가 나왔다.
‘시련은 시련이란 거겠지.’
육체적인 고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난도 함께 가져다주는.
연우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면서 환수의 알을 바라봤다.
연결 고리를 통해 여전히 녀석의 감정이 전달되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연우는 고개를 들어 피닉스를 바라봤다.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지만, 피닉스는 연우의 눈빛에서 애타는 절박함을 읽을 수 있었다.
『일단은 확실하게 머리를 정리해 보아라. 당장 서두른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지는 않으니까.』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꿈이라.’
연우는 조용히 절벽 끝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어렵군. 당장 뭔가를 생각해 품으라고 한다고 해서 가지기 쉬운 것도 아니고.’
탑을 오르는 주목적 외에 다른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까.
더구나 지금은 해야 할 게 산더미처럼 많았다.
탑을 올라야 했고, 두 거대 클랜의 전쟁도 임박해 있었다. 이런 데에서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래도.
바람을 조금 쓰고 있으니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돌아가려는데.
짹? 짹짹!
짹짹이가 어느덧 그의 앞으로 날아와 무릎 위에 앉았다.
아직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조그마한 날개를 쉴 새 없이 퍼덕이는 모습이 귀여웠다.
짹짹! 짹!
짹짹이는 연우의 무릎과 허벅지를 마구 돌아다니면서 쉴 새 없이 부리를 지저귀었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날 위로해 주러 온 거냐?”
짹! 짹!
“친구는 그냥 자고 있는 것뿐이니 너무 걱정 말라고?”
연우의 입가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이 천진난만한 녀석을 볼 때면 진지하다가도 왜 이렇게 웃음이 자꾸 나는 건지.
짹!
“그래. 알았다.”
짹짹!
연우는 이름을 지어 주면서 연결된 고리를 통해 짹짹이의 생각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환수의 알만큼은 아니었지만.
녀석은 연우를 독려하면서도 친구가 절대 나쁜 마음을 품은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가만히 짹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짹짹이는 기분 좋게 연우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불안한 눈망울로 연우를 올려다봤다.
연우는 그런 눈빛을 받았지만, 아무 대답 없이 묵묵히 짹짹이를 만지는 데만 몰두했다.
짹짹이는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녀석은 연우가 알이 부화하질 않아 의기소침한 상태라 생각해서 위로를 하는 중이었지만.
사실 연우의 속내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계기가 필요한 거라면. 차라리 그런 계기가 필요 없게 만들어 버리면 되지 않을까?’
연우의 눈빛이 고요하게 빛났다.
그가 그동안 탑을 오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시련에는 절대 정답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배가 터질 때까지, 성장이 끝나서 알이 아예 깨져 버릴 때까지 계속 뭘 먹여도, 과연 부화를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연우는 아예 끝장을 볼 때까지 알에다 계속 생명의 불꽃을 먹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생명의 불꽃으로도 안 된다면.
‘다른 4대 신수의 기운을 가져오면 되겠지.’
어비스터틀, 허무룡, 샤벨 타이거.
피닉스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시험’은 존재했고, 그 시험을 통과하면 생명의 불꽃에 못지않은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불과 바람 속성을 필요로 해서 피닉스의 시험만 고집했을 뿐.
이렇게 된 이상에는 특정 속성만을 계속 고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지.’
연우가 알기로 4대 신수의 기운을 모두 삼킨 환수가 태어난 전례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이건 그걸 확인해 볼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그만큼 높은 공적치를 쌓는 건 덤이었다.
‘4대 신수의 기운으로도 안 된다면 다른 것도 더 많이 먹여 주지. 어디 먹고 싶은 만큼 실컷 먹어 봐.’
살짝 말려 올라간 연우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번뜩였다.
그런 연우의 생각이 고스란히 전해진 걸까.
부르르-
연결 고리를 통해 알이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엿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째액?
짹짹이만 영문을 몰라 고개를 귀엽게 갸웃거렸다.
* * *
그 날 밤부터 연우는 새로운 계획을 준비했다.
‘본격적으로 이런저런 것을 먹이기 전에, 확실하게 파악하고 진행하고 싶은데.’
사실 홧김에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먹일 때 먹이더라도 알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면서 진행을 해야만 했다.
자칫 알이 탈이라도 난다면 큰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용마안으로 알을 파악하는 데는 아직 한계가 있었다.
에도라의 혜안이 필요했다. 칠흑왕의 절망을 자세히 파악하고 싶었을 때처럼.
‘대체 이 녀석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11층의 스타트 존에 새겨 둔 표식이 아직 남아 있는 것도 확인했다. 판트와 에도라가 못 보고 지나갔을 가능성은 없었다.
아직 11층에 들어오지 않은 이유가 대체 뭔지.
‘혹시 전쟁과 어떤 관련이라도 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방해를 해서 미안하다만. 아무래도 그대에게 손님이 온 것 같다.』
“손님이라니요?”
연우는 갑작스런 피닉스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때, 그의 의식 속으로 피닉스가 보고 있는 광경이 똑같이 공 유되었다.
연우는 잠깐 흠칫거렸지만, 곧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한 사내가 앞길을 막은 두 마리의 환수와 대치를 하고 있었다.
덤불처럼 기른 머리카락 사이로 단단한 눈매가 보인다. 연우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지만, 유독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보라색 눈과 관자놀이를 뚫고 나온 뾰족한 뿔.
“외뿔부족?”